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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우조선 노조결성과 이석규 장례투쟁

1987년 7월 울산 현대엔진 노조결성을 시작으로 노동자 대파업투쟁이 전국으로 번져갔다. 거제도 옥포 대우조선에서도 8월 8일 "노조결성 보장하라", "임금 인상하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파업농성이 시작됐다. 방위산업체에서 5년 근무하면 군 근무가 면제되기 때문에 움직이지 않으려던 노동자들도 마침내 노동자 대투쟁 시기를 맞이해 그동안 억눌렀던 분노를 터뜨렸다. 이석규도 그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대우조선은 1985년 이후 세계 조선산업의 전반적인 퇴조와 무리한 과잉 중복투자 등으로 경영이 어려워지자 경영합리화라는 명목으로 노동자들의 감원, 해고, 징계를 대대적으로 진행하였다. 1985년에 3만여 명이었던 노동자 수는 1987년에는 1만6천여 명으로 줄었으며, 임금은 거의 동결에 가까웠다. 육지와 떨어진 관계로 물가가 20~30% 비쌌고, 해고라도 당하면 전세보증금을 오랜 기간 돌려받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1987년 1월과 2월, 군 입대를 앞둔 노동자들이 작성한 유인물 수천 장이 두 번에 걸쳐 현장과 기숙사 등지에 뿌려지면서 노조결성투쟁은 시작되었다. 회사는 부서이동, 파견근무, 해고 등으로 맞섰지만, 노동자들은 4월 20일부터 4차례에 걸쳐 노동조합 결성을 시도했다. 노조결성은 회사의 폭력적인 방해공작으로 실패했다. 1987년 8월 8일 이상용 등 30여명의 노동자들이 '민주노조 결성', ‘임금임상’을 외치며 공장안을 돌기 시작하자 지게차와 중장비 기사까지 합세하여 삽시간에 대오는 수천 명으로 늘어났다. 그들은 지게차와 트레일러를 앞세우고 종합운동장으로 집결하여 결의를 다진 후 옥포 시가지와 충무의 신아조선까지 진출하여 차량시위를 벌였다. 그 다음날인 8월 9일 대우조선 노동조합이 결성되었다. 8월 11일 노조위원장이 회사 측에 회유 당하자 대우조선 노동자들은 2차로 새로운 노조를 결성한 후 3천여 명이 파업농성을 계속하면서 협상을 촉구했다. 그러난 회사 측은 협상을 거부하고 휴무를 하는 등 계속 무성의한 태도를 보였다. 8월 14일부터 가두로 진출한 노동자들은 연일 가두시위와 차량시위를 옥포, 장승포 등지에서 전개했다. 8월 20일에는 5천여 명의 노동자들이 연좌농성에 돌입한 가운데 6차례에 걸친 협상이 진행되었지만 협상은 결렬되었고 회사 측은 무기한 휴업을 통보해왔다. 이날 전국 각지에서 동원된 12개 중대 1천 5백여 명의 전투경찰은 장승포에서 옥포구간 도로를 차단한 채 최루탄을 쏘며 집회가 끝난 후 행진하는 노동자들을 향해 무차별 최루탄을 난사했다.

한편, 치안본부는 6월 21일 전국 시도경찰국 대공과장 및 정보과장 연석회의를 열고 좌경세력 척결을 위한 방안을 시달하면서 최근 확산되고 있는 노사분규에 강력 대처할 것을 지시했다. 8월22일 오후 1시 30분, 거제도 옥포관광호텔 앞에 3천여 명의 노동자와 1천5백여 명의 전투경찰이 대치해 있는 가운데 호텔에서 열렸던 마지막 협상이 결렬되었다. 노동자들의 호텔 진입 시도에 최루탄과 각목 쇠파이프로 해산하던 경찰은 웬일인지 “평화적 시위를 보장하겠다”고 약속했다. 노동자들은 평화적 시위의 결의를 보여주기 위해 20열 종대를 갖춰 오리걸음으로 행진을 시작했다. 그러나 노동자들이 50m쯤 전진했을 때, 3면을 포위하고 있던 경찰이 최루탄을 퍼붓기 시작했다. 이 때 한 노동자가 경찰이 쏜 직격 최루탄을 가슴에 맞고 쓰러졌다. 스물 한 살의 대조립부 외업반 이석규였다. 오후 3시 30분, 이석규는 대우병원으로 옮기던 중 사망했다.

이석규의 사망 소식을 전해들은 노동자들은 “돈도 필요 없다, 이석규를 살려내라!”며 대우병원 영안실로 모여들었다. 동료들은 시신이 안치된 영안실 문을 용접으로 봉하고, 24시간 삼엄한 경계를 폈다. 전태일의 어머니 이소선, 변호사 노무현·이상수 등 각계 인사들이 속속 도착하면서 국민운동본부를 중심으로 장례준비위원회가 발족되었다. 유족로부터 장례에 관한 일체의 사항을 위임받은 장례준비위원회는 노조 집행부와의 연석회의에서 “장례를 ‘전국 민주노동자장’으로 하고, 장지는 망월동 묘역으로 하되 묘지를 구할 수 없을 때에는 모란공원으로 한다”고 합의했다. 8월 23일 아침 8시에 실시된 시체부검에서 확인된 이석규의 사망 원인은 오른쪽 가슴과 폐에 박힌 4개의 최루탄 파편으로 인한 산소부족 때문인 것으로 밝혀졌다. 그러나 8월24일 친척 행세를 하던 특전사 소속 육군 소령 이청수가 유족대표가 되면서 장례절차를 두고 유족, 회사 측과 장례위원회의 의견대립이 계속되었다. 8월 28일, 우여곡절 끝에 오전 7시부터 노동자 지역주민 등 2만여 명의 애도 속에 발인하여 대우조선 운동장에서 영결식이 거행되었다. 오후 3시경 총 28대의 버스에 분승한 1천 5백여 명의 노동자들은 옥포호텔 앞 도로에서 노제를 지낸 뒤, 영구차를 앞세우고 망월동 묘지로 향했다.

그러나 전두환 정권은 차량 행렬이 고성 삼거리에 도착했을 때 영구차와 만장차만 통과시키고는 15톤 덤프트럭을 동원하여 도로를 차단한 뒤 시신을 탈취했다. 이어 주변 야산에 잠복하고 있던 2천 5백여 명의 전경과 백골단이 몰려나와 장례집행위원 등 재야인사들의 차와 동문인 광주직업훈련원 출신들이 타고 있던 2대의 버스 창문을 박살내고 문을 강제로 연 뒤 이들을 집단구타하며 강제연행하였다. 이들 연행자 중 이상수, 노무현, 박용수는 구속되었다. 이어 경찰은 1,2호차에 타고 있던 노동자들을 하차시키고 유족 3명만을 태운 채 2개 중대 3백여 명이 탄 6대의 전경버스로 호위하여 남원으로 시신을 탈취, 밤 9시경 폭우 속에서 남원 선산에 시신을 매장하였다. 한편 장례식이 거행될 시각인 8월 28일 6시를 기해 전국적으로 '고 이석규 민주노동열사 추모대회'가 개최될 예정이었지만, 5만여 명 경찰의 원천봉쇄로 성사되지 못하고 전국에서 밤늦게까지 산발적인 시위가 계속되었다.

전두환 정권은 이날 전국적으로 개최된 추모제와 관련하여 933명을 연행했으며, 이 가운데 64명을 구속했고, 전태일의 어머니 이소선 등 10여 명을 수배했다. 또 대우조선에서는 해고된 3명 외에 추가로 7명에게 몰래 잠입한 형사계장을 구타했다는 혐의로 살인미수죄를 적용, 구속했다. 대우조선 노동자들의 투쟁은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의 위대함과 더불어 그 한계까지도 있는 그대로 드러냈다. 또한 이 사건은 노동쟁의에 대한 경찰의 폭력진압, 직격최루탄으로 인한 노동자 사망, 시신탈취에 이르기까지 전두환 정권의 폭력성을 적나라하게 볼 수 있는 사건이었다. 전두환 정권은 이 사건을 기점으로 대대적인 탄압국면으로 전환했다.

주요출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민주화운동관련 사건·단체사전편찬을 위한 기초조사연구보고서』 전국노동조합협의회 백서 발간위원회 노동운동역사자료실 엮음,전국 노동조합협의회 백서 제1권 기나긴 어둠을 찢어버리고(1987년~1988년)』 유시춘 외, 『70·80 실록 민주화운동Ⅱ- 우리 강물이 되어』

대우조선 노조결성과 이석규 장례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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