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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ㆍ18민주화운동

발생배경을 먼저 살펴보면, 1961년 5·16 군사쿠데타를 통해 권력을 장악한 박정희 정권은 자신의 권력을 정당화하기 위해 경제성장에 집착하였고 귄위주의 정권에 대항하는 민주화 운동에 대한 극심한 탄압으로 일관하였다. 1979년 10월 16일 부마항쟁 으로 권력유지의 한계에 도달한 박정희 독재정권은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자신의 심복인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총탄에 의해 막을 내리게 되었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 때부터 군부 내에서 자신의 세력을 규합해 온 전두환을 주축으로 한 신군부 일당은 오히려 민주화 과정의 과도기를 틈타 자신들의 집권 시나리오를 착착 진행하였다. 그들은 12·12 군사반란으로 권력을 장악한 다음, ‘서울의 봄’으로 상징되는 전 국민의 민주화 열망을 잠재우기 위해서 민주화운동세력과 자신의 정적을 제거해야 했다. 그 제물이 광주였다.

전두환 신군부의 진압과 이에 대한 항쟁주체들의 대응을 시기별로 살펴보면, 1980년 5월 16일 전국의 대학들이 일단 시위를 중단했다. 그러나 광주의 전남대, 조선대 등 9개 대학 3만 여명은 오후 3시부터 도청 앞 분수대 광장에서 시국성토대회를 열고 저녁 8시부터 횃불시위를 벌이며 ‘계엄철폐’ 등을 요구했다. 5월 17일 비상국무회의가 18일 0시를 기한 비상계엄 전국확대를 의결하고 민주인사와 학생운동 지도부 등에 대한 예비 검속을 하였으며 광주시내 각 대학에 계엄군을 진주시켜 학생들을 연행했다. 5월 18일 아침 계엄군에 의해 전남대생들이 교문 앞에서 등교를 저지당하자 학생들이 "계엄 해제하라" "휴교령 철폐하라"는 구호를 외치며 항의시위을 하였으며, 이에 곤봉을 휘두르는 공수부대원들의 진압으로 학생들이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학생들이 금남로로 이동하기 시작하자 공수부대가 등장하면서 진압작전을 감행했고 계엄사령부는 광주지방 통행금지시간이 저녁 9시로 앞당겨졌다고 발표했다.

5월 19일 새벽 증파된 11여단 병력이 광주역에 도착하였고, 시민들이 계엄군의 무자비한 탄압에 맞서 임동, 누문동 파출소를 방화하였으며, 금남로에서 공수부대원들과 투석전을 전개했다. 저녁이 되자 수만 명의 시민들이 "전두환 타도"를 외치며 시위에 나섰다. 5월 20일 고등학교에 휴교조치가 내려진 가운데 10시 20분 경 가톨릭센터 앞에서 남녀 30여명이 속옷만 입힌 채 심하게 구타당하였으며 공수부대와 시민간의 공방전이 계속되었다. 저녁에는 금남로에서 200여대의 택시가 전조등을 켜고 경적을 울리며 차량시위를 벌였다. 시민들이 도청을 향해 금남로, 충장로, 노동청 방면에서 공수부대, 경찰과 대치하는 가운데 21시 경 노동청쪽에서 시위대 버스가 경찰저지선으로 돌진하여 경찰 4명이 사망하였고, 21시 50분에는 광주 MBC건물에 불이 났다. 23시 광주역 광장에서 계엄군의 발포로 시민 2명이 사망했다. 5월 21일 0시 35분 노동청 방면에서 군중 2만 여명이 계엄군과 공방전을 전개하는 가운데 2시 18분 시외전화가 두절되었으며, 4시 30분 광주 KBS건물이 불길에 휩싸였고, 10시 19분 광주세무서건물이 전소되었다. 11시 10분 대형헬기가 도청광장에 도착하였으며, 12시 59분 아시아자동차공장에서 몰고 온 장갑차 1대가 도청광장으로 진출했다. 정각 13시 도청 스피커에서 애국가가 울려 퍼지면서 계엄군의 조직적이고 계획적인 발포가 시작됐고 수많은 청년들이 금남로에서 공수부대의 집중사격을 받고 쓰러졌다. 15시 48분 공수부대원들이 주요빌딩 옥상에서 시위대를 향해 조준사격을 가했다.한편 화순, 나주지역에서 무기를 획득한 시위대들이 도청 앞에서 시가전을 전개하였다. 17시 30분 경 공수부대가 도청에서 조선대학교로 철수했다.

5월 22일 9시 도청광장과 금남로에 시민들이 집결했다. 군용헬기가 공중을 선회하며 "폭도들에게 알린다"는 내용의 전단을 살포하는 가운데 적십자병원 헌혈차와 시위대 지프가 돌아다니며 헌혈을 호소했다. 이런 가운데 시민수습위 대표 8명이 상무대 계엄분소를 방문하여 7개항의 수습안을 전달했으며 서울서 대학생 5백 여 명이 광주에 도착하여 환영식이 거행되었다. 15시 58분 시체 18구를 도청광장에 안치한 채 시민대회가 개최되었다. 이날 밤 박충훈 신임국무총리는 "광주는 치안 부재상태"라고 방송했다. 하지만 계엄군인 공수부대가 철수한 시기의 광주는 치안부재상태가 아닌 진정한 ‘자치공동체’로 단 한건의 강도나 절도도 발생하지 않았다. 5월 23일 10시 경 시민 5만 여 명이 도청광장에서 집회하였고, 학생수습위가 총기 회수작업을 시작하고 도청과 광장주변에 사망자 명단과 인상착의 벽보를 게시했다. 한편 13시 지원동 주남마을 앞에서 공수부대가 소형버스에 총격하여 17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15시에 제1차 범시민 궐기대회가 개최되었으며, 계엄사의 '경고문' 전단이 시내전역에 살포되었다. 5월 24일 13시 20분 경 공수부대원들이 원제마을 저수지에서 수영하던 소년들에게 사격하였으며, 송암동에서는 공수부대와 전투교육사령부 부대간의 오인 총격전이 발생하기도 했다. 제2차 민주수호 범시민 궐기대회가 개최되었다. 5월 25일 11시 김수환 추기경의 메시지와 광주항쟁 구호대책비 1천만 원이 전달되었고, 15시 제3차 민주수호 범시민 궐기대회가 개최되었다. 한편 재야 민주인사들은 김성용 신부의 4개항 수습안을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5월 26일 새벽 계엄군이 화정동 쪽에서 농촌진흥원 앞까지 진출하자 시민수습대책위원들은 계엄군의 시내진입 저지를 위해 ‘죽음의 행진’을 감행하고, 10시에 제4차 민주수호 범시민 궐기대회를 개최했다. 14시에 학생수습위원회가 광주시장에게 생필품 보급 등 8개항을 요구하고, 15시에는 제5차 민주수호 범시민 궐기대회가 열렸다. 저녁 7시 외국인 207명이 광주에서 철수했다. 19시 10분 시민군은 "계엄군이 오늘밤 침공할 가능성이 크다"고 공식 발표하고 어린 학생과 여성들을 귀가조치 시켰다. 자정을 기해 시내전화가 일제히 두절되었다. 5월 27일 새벽 3시 탱크를 앞세운 계엄군들이 시내로 진입하기 시작했고, "계엄군이 쳐들어옵니다. 시민여러분, 우리를 도와주십시오."라는 여성의 애절한 시내 가두방송이 골목골목을 누볐다. 새벽 4시 도청 주변은 완전히 포위되었으며, 금남로에서 시가전이 전개되었다. 4시 10분 계엄군 특공대가 도청 안에 있던 시민군들에게 사격을 가하면서 1시간 후 계엄군은 도청을 비롯한 시내전역을 장악하고 진압작전을 종료했다. 6시 계엄군은 시민들에게 거리로 나오지 말라고 선무 방송을 하고 7시엔 공수부대가 20사단 병력에 도청을 인계했다. 도청에서의 항쟁 과정에서 윤상원을 비롯한 다수의 시민군이 학살당하고 수백명의 시민들이 부상당했다.

광주민중항쟁을 진압한 전두환 신군부세력은 1980년 7월 4일 김대중씨 등을 광주항쟁의 배후조종자로 몰아 이른바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을 조작하기도 했다. 광주민중항쟁의 성격을 살펴보면, 당시에는 독재 정권에 의해 " 폭동, 난동, 소요, 사태 " 등으로 불릴 것을 강요받다가 80년 이후 계속적으로 '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 '을 요구하는 국민들의 끈질긴 저항에 의해 이제는 '민주화 운동' 이나 '민중 항쟁 ' 등으로 불리고 있다. 광주민중항쟁은 불의와 억압에 대한 국민 저항권의 정당성을, 나아가 저항의 수단으로서 '무장투쟁'의 합법성까지 처음으로 공인 받았다는 성격을 지니고 있다.

광주민중항쟁의 영향과 의의를 살펴보면, 반민주적이었던 박정희 유신 독재 체제를 계승한 전두환 정권의 철권 통치하에서 정권의 정통성과 도덕성을 부정하는 계기로 작용하여 결국 그 체제를 붕괴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광주민중항쟁은 1980년대 전반에 걸쳐서 내내 민주화 운동 세력의 동력 역할을 하였으며, 1980년대 민주화운동의 역사적 근거이기도 했다. 나아가 '제5공화국'을 청산하는 데에 국민적인 합의를 이끌어 내는 근거가 됨으로써 과거의 부도덕한 정권을 청산하는 최초의 선례를 남기게 되었다. 광주민중항쟁은 부당한 국가권력에 대한 시민저항으로 출발, ‘대동세상’으로 상징되는 자치공동체의 형성을 통한 직접민주주의의 실현 및 정의를 위한 자기희생과 반인륜적 학살에 저항하는 민주주의 발전의 훌륭한 모범이자 세계적인 인권운동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한편 광주에서의 학살에 대한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 운동이 꾸준히 전개되었다. 그 결과 1988년 국회에서 5.18광주민주화운동 진상조사특병위원회가 구성되고 그에 따라 광주청문회가 열렸다. 1995년 12월 19일 「5·18특별법과 공소시효 특례법」이 국회에서 통과됨에 따라 1996년 1월 23일 전두환 등 5·18핵심관련자 8명이 기소되었다. 1997년 4월 17일 대법원은 전두환(보안사령관,제11.12대 대통령)·노태우(9사단장,제13대 대통령)를 비롯 12.12쿠데타와 5.18 대학살에 적극 가담한 정호용(특전사령관)·장세동(30경비단장)·박준병(20사단장) 등 16명에 대해, 전두환은 반란 및 내란수괴로 내란목적살인 및 상관살해미수 등으로 1심에서 사형,2심에서 무기징역을 선고하였으며, 노태우는 반란 및 내란중요임무종사와 상관살해미수 등으로 1심에서 징역 22년 6월, 2심에서 징역 17년. 정호용 등 14명은 내란죄로 1심에서 10년-4년, 2심에서 7년-3년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1997년 4월 29일 정부는 5월 18을 국가기념일로 지정하였으며, 2001년 12월 21일 국회는 「광주민주유공자 예우에 관한 법률」을 제정했다.

주요출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연구소 편, 『한국민주화운동사연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기획/서중석 저,『한국현대사 60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기획/김진경 저, 역사 다시 읽기. 셋 『5.18 민중항쟁』 기쁨과 희망 사목연구원,『암흑속의 횃불』제 4권, 5.18기념재단 홈페이지 http://www.518.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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