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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선사(삼고사) 유령노조사건

노트· 앨범 제조업체인 인선사의 1천여 노동자들은 하루 13시간의 강도 높은 노동과 저임금 및 안전시설 미비로 혹사당하였다. 이를 개선하기 위해 노동자들은 1977년 4월 21일 노동조합을 결성하고 행정 당국에 신고하러 갔다. 하지만 이미 1975년 3월 유령노조가 출판노조에 가입되어 있었다. 노동자들이 유령노조에 항의하자 출판노조는 오히려 노동자들을 나무랐다. 회사 측은 4월 23일 새로 결성된 노조의 지부장 박문담에게 2개 노조를 인정할 수 없다며 강제 사표를 내게 하고 노조 결성에 참가했던 노동자들을 구타, 폭행, 해고, 전출시켰다. 이에 노동자 10여 명은 4월 29일 인선사노동조합정상화수습대책위원회를 조직하고, 5월 10일 “기업과 결탁한 출판노조, 근로자의 신음소리를 들으라!”는 내용의 호소문을 노동청과 관련 단체 및 언론기관과 교회 등에 발송했다.

문제가 확대되자 회사는 5월 15일 회사 간부 및 반장 등만을 몰래 모아놓고 기존의 유령노조를 재조직하였다. 그리고 이를 눈치 챈 대책위원들이 회의장으로 들어가려하자 폭력을 행사한 후 자재 창고에 가둬버렸다. 그리고는 모임이 끝난 후 풀려난 대책위원 중 우재영이 작업실로 들어가자 반장은 핀잔을 주었고, 그 순간 우재영은 옆에 있던 솔벤트를 몸에 붓고, “정의로운 노동조합을 위해 나는 희생하겠다”고 외치며 분신자살을 기도했으나 동료들의 만류로 실패했다. 회사는 이 사건을 방화미수 혐의로 고발하여 우재영 등 4명이 오히려 조사를 받고 고문을 당하였다. 일이 이렇게 되자 대책위원회는 5월 23일 “회사와 결탁하여 유령노조를 만든 출판노조에 희생당한 노동자들의 억울함을 진정합니다”라는 내용의 진정서를 각계에 보내는 한편, 진짜 노동조합이란 어떤 것인가를 알리는 내용의 팜플렛을 회사 정문에서 동료들에게 배포했다. 사건이 신문에 나고 사회문제화되자 전국출판노조와 회사는 5월 27일 인선사 지부를 사고 지부로 규정하고, 6월 10일까지 지부 대의원대회를 개최하여 조직을 정상화하기로 결의하였다.

5월 29일 출판노조와 회사는 종업원들로부터 강제로 노조 가입원서를 받았다. 그러나 대책위원회는 “사전 공고도 없었고 대의원들은 회사의 일방적 추천에 의해 선정되었으므로 정상적인 노조라 볼 수 없다”고 비판하면서 5월 31일 행정 관청에 불법노조 해산요청서를 내고 투쟁을 거듭 결의하였다. 한국교회사회선교협의회는 1977년 6월 26일 동대문 천주교회에서 ‘노동자와 농민을 위한 기도회’를 개최하고 “유령노동조합에 탄압받는 근로자”라는 주제로 인선사 사건의 문제점을 논의했다. 이 기도회에서 지적된 것은 ① 유령노조가 노동계에 일반화되고 있는 풍토 ② 회사와 경찰이 언제나 한편이 되어 근로자를 탄압하고 있는 현상 ③ 회사가 잘못을 시인하지 않고 오히려 합리화시키려고만 하는 것 ④ 노조 정상화를 위해 분신자살하려 한 노동자를 방화 혐의로 고발한 것 등이었다.

사회선교협의회는 계속하여 두 차례의 기도회를 통해 인선사 문제를 여론화시키고, 회사의 반성과 노조 정상화 및 해고자 복직을 촉구했다. 인선사에 대한 사회여론이 악화되자 공화당의 노동위원을 겸하고 있던 인선사 사장 신덕균은 회사 이미지를 바꾸려고 7월 20일 회사상호를 삼고사로 변경하고 대책위원 등 8명의 노동자를 해고시켰다. 삼고사 노동자들의 투쟁에 대해 기독 청년들이 적극적으로 지원투쟁을 전개했다. 기장 전국 청년연합회 여름대회는 불매운동을 결의하였고, 한국기독청년협의회(EYC)도 회사의 시정을 촉구하면서 회사와 근로자·해고자들의 참여하에 공청회를 열자고 제의했으나 거부당했다. 계속되는 교회의 노력이 모두 좌절당하자 가톨릭노동청년회(JOC)와 개신교 측은 공동모임을 갖고 보다 적극적인 대응책으로 삼고사 상품 불매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리하여 10월 13일 ‘삼고사 부당해고근로자 복직을 위한 삼고사 제품 불매운동본부’가 결성되었고, 11명의 신·구교 운영위원이 선정되었다. 불매운동 본부는 전단에서 “외국의 상품도 아닌 국내 상품에 대하여 이러한 불매운동을 선언하게 됨을 유감스럽게 생각한다”고 전제한 후, 그동안의 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삼고사에서 부당하게 해고되어 인간 최소한의 권리인 정당하게 일하여 먹고 살 권리마저 빼앗긴 근로자들의 복직이 실현될 기미가 없어 부득이 불매운동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택하게 되었다고 불매운동의 이유를 밝혔다.

이어 10월 28일에는 삼고사 노사문제를 위한 기도회를 기독교회관에서 개최하였으며, 참가자들은 결의문을 통해 “이른바 경제개발제일주의, 수출제일주의에서 비롯된 공산주의의 유물사관과 다를 바 없는 물질주의, 황금만능사상 등 인간을 생산의 도구로 전락시키고 물질의 노예로 만드는 풍조가 만연된 사회제도와 지도자에 대하여 우리는 크리스챤 양심에 입각하여 외치지 않을 수 없다”면서 그리스도의 명령에 따라 투쟁할 것을 결의하였다. 기독 청년들은 이어서 해고 노동자 복직을 촉구하는 철야농성을 계획했으나 미리 통고를 받은 회사에서 11월 7일까지 복직시키겠다는 언질을 보내와 일단 연기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회사는 약속한 날짜가 되자 또다시 기만책을 써 기독교 단체와 손을 떼지 않으면 복직이 불가능 할 것이라고 협박했고, 이에 1978년 6월 전원이 복직될 때까지 회사와, 교회와 연대한 해고 노동자들 사이에 협상이 진행되었다. 회사는 처음에는 순차적 복직, 밀린 임금은 지불할 수 없다는 강경한 입장을 고집하다가, 월급은 100% 지급하되 2명만 먼저 복직시키겠다, 해고수당과 퇴직금을 받고나면 신규 채용하겠다는 등의 타협안을 제시했다. 하지만 교회와 노동자들은 ‘무조건 전원 복직’의 원칙을 고수하였다. 기독 청년들의 불매운동도 계속되었다. 1978년 1월 28일 교회는 회사에 최후통첩을 보내고, 확대회의를 열어 위원장에 이우정을 선출하고, 정책위원회·불매운동위원회·법정투쟁위원회·홍보위원회·재정위원회 등으로 분야를 나누어 광범하고 본격적인 투쟁으로 돌입할 태세를 갖추었다. 많은 이들의 끈질긴 투쟁으로 ‘뚝섬의 청와대’라고 불리던 회사는 마침내 굴복하였고, 사건 발생 1년 2개월 만인 1978년 6월에 부당해고된 노동자 전원이 복직되었다.

인선사(삼고사) 유령노조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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