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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ㆍ25 대학교수단 시위

1) 1948년의 정부수립 이래로 이승만 정부는 민족의 화해와 통일보다는 친미와 반공을 앞세우면서 반민족 친일행위에 대한 단죄를 목적으로 1948년 10월에 발족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의 활동을 방해하였고, 미국의 원조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부패특권 세력에 부를 편중시킨 반민주주의 독재 정권으로, 1952년의 ‘부산정치파동’과 ‘발췌개헌’, 종신집권을 꾀한 ‘사사오입개헌’을 자행하고 정적제거를 위해 ‘진보당사건’을 조작하여 조봉암 처형 및 언론자유를 정면에서 말살한 경향신문 폐간 등 끝없는 반민주주의적 폭거를 자행하였다. 이러한 정치적 배경을 갖고 1960년에 일어난 4월혁명은 이승만 정권이 자행한 부정선거에 대한 반대와 규탄에서 시작하여 반독재민주화투쟁으로 발전한다. 4·19혁명은 혁명의 직접적인 도화선이 되었던 1960년 2월 28일 대구학생시위에서부터 시작하여 3월 15일 정·부통령선거일 당일의 3·15마산 시위, 그리고 4·18 고려대생 시위에 이어 절정에 이른 4월 19일의 대규모시위와 4·25 대학교수단 시위로 전개되었다.

2) 1960년 4월 19일 이후 숨가쁘게 움직이던 정국은 이승만의 자유당 총재직 사퇴와 이기붕의 공직 사퇴, 계엄사령부의 민심수습 노력 등으로 인해 그런 대로 어떤 해결점에 접근하는 듯 보였다. 자유당 정권은 이기붕을 퇴진시키는 선에서 사태를 수습함으로써 이승만을 정점으로 하는 통치체제만은 그대로 유지하고자 하였다. 격앙되었던 분위기도 표면적으로는 제법 가라앉아 가는 듯싶었다. 하지만 4월 25일 대학교수들이 시위에 나서면서 정국이 급변하였다. 고려대 이종남, 서울대 이희승, 연세대 정석해, 성균관대 조윤제 등 주동교수들이 비밀리에 모였다. 이들은 각 대학 교수들에게 통고하여 4월 25일 오후 5시 50분, 258명의 교수들이 시국선언문에 서명을 하고, 동국대 김영달 교수의 긴급동의에 따라“학생들의 피에 보답하라”는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거리로 나섰다. 교수들은 시국선언문에서 학생데모를 불의에 항거한 민족정기의 발로로 규정하였고, 대통령・국회의원・대법관 사퇴를 촉구했으며, 정부통령 선거 재실시, 부정선거 원흉 처단을 요구했다. 도서관과 연구실에 있던 학생들이 하나 둘 달려나와 스승들의 행렬 뒤를 말없이 따랐다. 질서정연한 시위 행렬이 종로 4가를 지날 무렵, 뒤따르는 학생과 시민들은 7,000~8,000명을 넘어섰고 종로 화신백화점 앞에 이르렀을 때는 1만 명을 헤아렸으나 계엄군이나 경찰의 제지는 없었다. 이날 계엄군은 강력한 투쟁 동력 앞에서 무기력했다. 시위 대열이 기세를 올리며 이기붕의 집으로 쳐들어가려 하자 집안으로부터 총격이 가해져 몇 명이 다시 희생되었다. 다른 대열은 임화수의 집과 임화수 소유의 평화극장, 이정재의 집 등을 파괴하였다. 밤 9시 구속학생 전원이 석방되었다.

이튿날인 26일 통금이 해제된 새벽 5시부터 다시 시위가 시작되었고, 26일 오후 2시부터 열린 국회 본회의에서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결의안을 채택하였다. ① 이 대통령은 즉시 하야한다 ② 3·15 정부통령선거는 이를 무효로 하고 재선거를 실시한다 ③ 과도내각하에 완전 내각책임제 개헌을 단행한다 ④ 개헌 통과 후 민의원을 해산하고 총선거를 실시한다. 이에 따라 27일 이승만이 퇴진하는 것으로 제1공화국은 11년 8개월 12일 만에 막을 내렸다.

주요출처: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연구소 편, 『한국민주화운동사 연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기획/ 서중석 저,『한국현대사 60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기획/ 김정남 저, 『4·19혁명』

4ㆍ25 대학교수단 시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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