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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ㆍ10항쟁

6월 10일은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약칭 국본. 상세는 별도 항목 참조)의 호소에 호응한 각지의 국민대회와 ‘민정당 제4차 전당대회 및 대통령 후보 지명대회’가 같이 개최되던 날이었다. 잠실체육관에서는 전두환과 노태우가 손을 맞잡고 호헌을 외치고 있었고, 반면 전국 각지에서는 이에 반대하는 국민들의 열기가 분출되었다.

국민대회는 시민들의 적극적인 동참 아래 전국 22개 지역에서 24만여 명이 참여한 가운데 전개되었다. 이 과정에서 시위를 진압하던 경찰력의 한계가 노출되는 양상까지 나타났다. 노태우가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던 시각, 김영삼 민주당 총재는 민주당과 민추협이 주최한 영구집권음모규탄대회에서 “민정당은 4천만 국민의 뜻을 무시한 채 역사 속의 치욕스럽고 부끄러운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너고 있다”고 주장했다. 160개 중대 2만 2,000여 명의 경찰이 배치된 가운데 오후 1시경부터 서울시내 여러 곳에서 가두시위가 벌어졌다. 오후 4시 45분경 을지로 2가 로터리에서 서울대, 성균관대, 총신대 학생 500여 명이 “우리의 소원은 민주”라는 노래를 부르며, “호헌철폐, 독재타도” 등의 구호를 외치자 군중들이 태극기를 흔들며 호응했다. 이태영 이우정 등 여성단체 회원들과 민가협 회원 200여 명은 5시경부터 삼성본관 빌딩 앞에서 구호를 외치며 저항했고, 경희대 외국어대 학생 500여 명은 5시 6분경 전동열차를 가로막아 세우고 “호헌철폐” 구호를 외치며 경찰과 싸웠다. 오후 5시경 한승헌, 홍성우, 황인철, 강신옥, 고영구, 하경철, 조영래, 이상수 등 국본 참여 변호사 27명은 변호사회관에서 성명서를 읽은 뒤 성공회대성당으로 향했다. 지하철 1호선의 시청역, 종각역과 2호선의 을지로입구역 등 11개역이 페쇄된 가운데, 오후 6시 국기하강식에 맞춰 성공회대성당에서는 오충일 국본 상임집행위원장의 사회로 국민대회가 진행되었다. 확성기를 통해 애국가가 울려 퍼졌고, 이어서 해방 후 42년간의 독재에 종식을 고하고 새로운 민주정치를 열기 위한 종소리가 분단 42년을 맞아 42번 울렸다. 세종로 태평로 거리는 시민들로 가득 메워졌다. 차량들이 경적을 울리자 시민들은 박수를 치며 “독재타도” “호헌철폐” 등의 구호를 외쳤다. 신세계백화점과 회현동, 퇴계로, 남대문 시장 등 일대에서 시가전을 방불케하는 시위가 벌어졌고 거리가 점거되기도 했다. 부근 점포의 상인들은 학생들을 숨겨주고 셔터를 내린 뒤 음료수를 제공하기도 했다. 지방에서도 시위가 격화되었다. 오후 3시 30분 부산대 등 주요 대학 학생들이 교내에서의 출정식을 시작으로 밤 11시까지 부산시내 곳곳에서 시위를 벌였고, 마산과 대구, 포항과 울산, 안동, 경주, 광주, 전주, 대전, 청주와 천안, 춘천과 목포, 군산, 인천 등 22개 도시가 같은 시간대에 동일한 행동방침으로 동시다발적으로 시위가 진행되었다. 6월 10일의 국민대회와 전국적 시위는 6월민주항쟁으로 발전해 갔다.

주요출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연구소 편, 『한국민주화운동사연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연구소 편, 『한국민주화운동사 3』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기획/서중석 저,『한국현대사 60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기획/정해구 김혜진 정상호 저, 『6월항쟁과 한국의 민주주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6월민주항쟁계승사업회 편, 『6월항쟁을 기록하다』

6ㆍ10항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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