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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로동맹파업

1980년대 중반 구로지역은 대부분의 업체가 수출을 위한 경공업제품을 생산하던 곳으로 대다수의 공장들이 저임금, 장시간 노동, 관리직과의 차별 대우 등이 극심하였다. 구로지역 사업장들의 임금수준은 1인당 국민소득이 1,988달러, 즉 5인 가족 기준 1가구 평균이 70만원이었던 그 당시에 월 10만원에 훨씬 못 미치는 것이었다. 이러한 저임금은 자연히 장시간 노동을 강제하는 것이었다. 대우어패럴의 경우 노동자들은 정상근무 10시간에 항상 1일 2∼8시간의 잔업, 철야를 통해 월 평균 80여 시간, 심지어 110시간의 초과근무를 해야 했다.

1983년 말 유화국면 이후 노동운동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비제도권 단체들이 결성됐고 신규조직이 급증했으며 노동쟁의가 활발하게 전개됐다. 또한 대학생들을 비롯한 지식인들이 대거 노동현장에 투신하여 소그룹활동이 광범하게 확산되었다. 전국적으로 전개된 어용노조 민주화투쟁은 200여 개의 신규 노조를 탄생시켰고, 구로공단지역에서도 민주노조 인정투쟁이 활발히 일어났다. 특히 대우어패럴노조, 대한마이크로노조, 가리봉전자노조, 선일섬유노조, 효성물산노조 등은 사용자 측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치밀한 준비를 거쳐 민주노조 결성에 성공한 대표적인 사례였다. 이 노조들은 대부분 조합원 교육과 소모임 활동을 통해 의식을 높이고 핵심활동가들을 양성했으며, 노조 상호간 소모임 교류 및 합동 교육활동 등을 통해 연대의식을 강화했다.

일주일간 구로공단을 뒤흔든 구로동맹파업의 결정적 계기는 대우어패럴노조 간부들에 대한 경찰의 구속 조처였다. 1985년 6월 22일 경찰은 4월 말의 임금 인상 교섭 때 두 차례 철야농성을 벌였다는 이유로 위원장 김준용 등 3명을 구속했고, 이에 항의하며 24일부터 대우어패럴 노동자들의 항의파업이 시작되었다. 대우어패럴노조의 파업농성에 이어 가리봉전자, 효성물산, 선일섬유 노조도 동맹파업에 돌입했다. 이러한 연대투쟁은 6월 25일 인근에 있는 남성전기·세진전자·롬코리아로 확산되었고, 27일 삼성제약의 중식 거부, 28일 부흥사의 파업이 줄을 이었다. 6월 26일에는 22개 민주화운동 단체들이, 27일에는 각 종교단체들이 지지농성에 들어갔다. 학생들은 대우어패럴 건너편 굴뚝에 올라가“민주노조 탄압말라”는 등의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고, 문익환 민통련 의장은 음식물이 차단당한 농성 현장에 음식물을 반입하려다 제지당했으며, 창원 통일산업노조의 문성현 위원장과 박철수 사무국장은 연대투쟁 논의 중 경찰에 구속당하기도 했다. 경찰들의 공포 분위기 조성과 음식물 차단으로 인한 조합원들의 탈진과 실신 그리고 병원후송이 계속되는 상황에서 대우어패럴 농성시위대는 100여명으로 줄어들고 효성물산, 가리봉전자, 선일섬유는 보복조치를 하지 않는다는 약속을 받고 농성을 자진해산했다. 부흥사는 쇠파이프와 몽둥이로 무장한 관리자와 남성사원들에 의해 강제해산을 당했다. 먼저 농성을 푼 가리봉전자, 선일섬유 등에서 주동자들에 대한 보복조처가 이루어지는 가운데 6월 28일에는 대학생 18명이 빵, 우유, 구급의약품 등을 짊어지고 공장 지붕을 타 넘고 농성장에 합류하는 등 농성에 대한 지원이 거듭되었다. 마침내 6월 29일, 대우어패럴 회사 측은 폭력배와 사복경찰을 동원해 노동자들의 농성을 강제해산시켰다. 6일간의 구로지역 연대파업에 10개 노조 2천5백여 명이 참여하였으며, 이 투쟁 과정에서 구속 43명, 불구속 입건 38명, 구류 47명, 그리고 7백여 명이 해고 및 강제사직을 당했다.

1950년 한국전쟁 이후 최초의 동맹파업인 구로동맹파업은 경제적 요구를 넘어 국가권력을 상대로 정치적 요구를 제기했다는 점에서 정치투쟁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구로동맹파업은 노동운동을 탄압하는 군사정권과의 투쟁은 정치투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노동자들에게 각인시켰고, 노학연대의 강력한 틀을 구축했다. 그러나 구로연대투쟁에 참여한 활동가들은 모두 구속됐고 수백 명의 노동자들이 해고되었으며 노동조합이 모두 와해되는 결과를 낳았다. 구로동맹파업은 이후 사회변혁을 지향하는 정치투쟁 조직이 출범하는 근거가 되었다.

주요출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연구소 편, 『한국민주화운동사 연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민주화운동관련 사건·단체사전편찬을 위한 기초조사 연구보고서』 이원보, 『한국노동운동사 - 100년의 기록』 김정남, 『진실, 광장에 서다』 강준만, 『한국 현대사 산책 2권 - 광주학살과 서울올림픽』

사료소개

‘구로동맹파업’ 조건으로 총 12 건, ‘가리봉전자’ 조건으로 3 건, ‘대우어패럴’ 조건으로 총 69건이 검색되었다. <우리의 결의[대우어패럴 노동조합의 노동운동관련]>(사료번호 : 359251)는 6월 22일 대우어패럴 “간부에 대한 구속조치가 단지 노조간부 3명에 대한 구속일 뿐만 아니라 굶어죽지 않으려는 노예같은 상태를 벗어나려는 모든 노동자에 대한 구속”이며 “노동자를 억누르고 짖밟고 탄압하는 기업주와 노동악법. 그리고 반노동자적인 정책을 노골화 시키는 정부를 향해 우리의 요구가 관철될 때까지 목숨을 걸고 싸울 것을 결의”하고 있다. 이와 함께 대우어패럴 노동자 3명의 구속을 민주노조 파괴의 첫 신호로 보고 끝까지 싸울 것을 다짐하는 <노동자 연대 투쟁선언-노동 운동 말살 정책을 말살하자>(사료번호 : 359519)는 구로동맹파업의 시작을 알리고 있으며, <노동자 연대 투쟁선언-노동 운동 말살 정책을 말살하자>(사료번호 : 359519)를 통해 연대투쟁의 결의를 다시 확인할 수 있다. 구로동맹파업은 민주화운동 단체들과 종교단체, 학생운동의 엄청난 관심과 지원투쟁으로 이어졌다. 이와 관련한 자료로 101405, 395393, 303923, 211492, 313332, 216662 등을 볼 수 있다. 구로지역 노동자들의 삶과 구로동맹파업의 전체 흐름과 종합적인 이해를 위해서는 <부모님 전상서[대우어패럴 노동운동 관련]>(사료번호 : 359263), <대우어패럴 노동조합탄압에 항쟁하는 노동자 연대투쟁 종합소식>(사료번호 : 91086)가 있다.

구로동맹파업

1980년대 중반 구로지역은 대부분의 업체가 수출을 위한 경공업제품을 생산하던 곳으로 대다수의 공장들이 저임금, 장시간 노동, 관리직과의 차별 대우 등이 극심하였다. 구로지역 사업장들의 임금수준은 1인당 국민소득이 1,988달러, 즉 5인 가족 기준 1가구 평균이 70만원이었던 그 당시에 월 10만원에 훨씬 못 미치는 것이었다. 이러한 저임금은 자연히 장시간 노동을 강제하는 것이었다. 대우어패럴의 경우 노동자들은 정상근무 10시간에 항상 1일 2∼8시간의 잔업, 철야를 통해 월 평균 80여 시간, 심지어 110시간의 초과근무를 해야 했다.

1983년 말 유화국면 이후 노동운동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비제도권 단체들이 결성됐고 신규조직이 급증했으며 노동쟁의가 활발하게 전개됐다. 또한 대학생들을 비롯한 지식인들이 대거 노동현장에 투신하여 소그룹활동이 광범하게 확산되었다. 전국적으로 전개된 어용노조 민주화투쟁은 200여 개의 신규 노조를 탄생시켰고, 구로공단지역에서도 민주노조 인정투쟁이 활발히 일어났다. 특히 대우어패럴노조, 대한마이크로노조, 가리봉전자노조, 선일섬유노조, 효성물산노조 등은 사용자 측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치밀한 준비를 거쳐 민주노조 결성에 성공한 대표적인 사례였다. 이 노조들은 대부분 조합원 교육과 소모임 활동을 통해 의식을 높이고 핵심활동가들을 양성했으며, 노조 상호간 소모임 교류 및 합동 교육활동 등을 통해 연대의식을 강화했다.

일주일간 구로공단을 뒤흔든 구로동맹파업의 결정적 계기는 대우어패럴노조 간부들에 대한 경찰의 구속 조처였다. 1985년 6월 22일 경찰은 4월 말의 임금 인상 교섭 때 두 차례 철야농성을 벌였다는 이유로 위원장 김준용 등 3명을 구속했고, 이에 항의하며 24일부터 대우어패럴 노동자들의 항의파업이 시작되었다. 대우어패럴노조의 파업농성에 이어 가리봉전자, 효성물산, 선일섬유 노조도 동맹파업에 돌입했다. 이러한 연대투쟁은 6월 25일 인근에 있는 남성전기·세진전자·롬코리아로 확산되었고, 27일 삼성제약의 중식 거부, 28일 부흥사의 파업이 줄을 이었다. 6월 26일에는 22개 민주화운동 단체들이, 27일에는 각 종교단체들이 지지농성에 들어갔다. 학생들은 대우어패럴 건너편 굴뚝에 올라가“민주노조 탄압말라”는 등의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고, 문익환 민통련 의장은 음식물이 차단당한 농성 현장에 음식물을 반입하려다 제지당했으며, 창원 통일산업노조의 문성현 위원장과 박철수 사무국장은 연대투쟁 논의 중 경찰에 구속당하기도 했다. 경찰들의 공포 분위기 조성과 음식물 차단으로 인한 조합원들의 탈진과 실신 그리고 병원후송이 계속되는 상황에서 대우어패럴 농성시위대는 100여명으로 줄어들고 효성물산, 가리봉전자, 선일섬유는 보복조치를 하지 않는다는 약속을 받고 농성을 자진해산했다. 부흥사는 쇠파이프와 몽둥이로 무장한 관리자와 남성사원들에 의해 강제해산을 당했다. 먼저 농성을 푼 가리봉전자, 선일섬유 등에서 주동자들에 대한 보복조처가 이루어지는 가운데 6월 28일에는 대학생 18명이 빵, 우유, 구급의약품 등을 짊어지고 공장 지붕을 타 넘고 농성장에 합류하는 등 농성에 대한 지원이 거듭되었다. 마침내 6월 29일, 대우어패럴 회사 측은 폭력배와 사복경찰을 동원해 노동자들의 농성을 강제해산시켰다. 6일간의 구로지역 연대파업에 10개 노조 2천5백여 명이 참여하였으며, 이 투쟁 과정에서 구속 43명, 불구속 입건 38명, 구류 47명, 그리고 7백여 명이 해고 및 강제사직을 당했다.

1950년 한국전쟁 이후 최초의 동맹파업인 구로동맹파업은 경제적 요구를 넘어 국가권력을 상대로 정치적 요구를 제기했다는 점에서 정치투쟁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구로동맹파업은 노동운동을 탄압하는 군사정권과의 투쟁은 정치투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노동자들에게 각인시켰고, 노학연대의 강력한 틀을 구축했다. 그러나 구로연대투쟁에 참여한 활동가들은 모두 구속됐고 수백 명의 노동자들이 해고되었으며 노동조합이 모두 와해되는 결과를 낳았다. 구로동맹파업은 이후 사회변혁을 지향하는 정치투쟁 조직이 출범하는 근거가 되었다.

주요출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연구소 편, 『한국민주화운동사 연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민주화운동관련 사건·단체사전편찬을 위한 기초조사 연구보고서』 이원보, 『한국노동운동사 - 100년의 기록』 김정남, 『진실, 광장에 서다』 강준만, 『한국 현대사 산책 2권 - 광주학살과 서울올림픽』

사료소개

‘구로동맹파업’ 조건으로 총 12 건, ‘가리봉전자’ 조건으로 3 건, ‘대우어패럴’ 조건으로 총 69건이 검색되었다. <우리의 결의[대우어패럴 노동조합의 노동운동관련]>(사료번호 : 359251)는 6월 22일 대우어패럴 “간부에 대한 구속조치가 단지 노조간부 3명에 대한 구속일 뿐만 아니라 굶어죽지 않으려는 노예같은 상태를 벗어나려는 모든 노동자에 대한 구속”이며 “노동자를 억누르고 짖밟고 탄압하는 기업주와 노동악법. 그리고 반노동자적인 정책을 노골화 시키는 정부를 향해 우리의 요구가 관철될 때까지 목숨을 걸고 싸울 것을 결의”하고 있다. 이와 함께 대우어패럴 노동자 3명의 구속을 민주노조 파괴의 첫 신호로 보고 끝까지 싸울 것을 다짐하는 <노동자 연대 투쟁선언-노동 운동 말살 정책을 말살하자>(사료번호 : 359519)는 구로동맹파업의 시작을 알리고 있으며, <노동자 연대 투쟁선언-노동 운동 말살 정책을 말살하자>(사료번호 : 359519)를 통해 연대투쟁의 결의를 다시 확인할 수 있다. 구로동맹파업은 민주화운동 단체들과 종교단체, 학생운동의 엄청난 관심과 지원투쟁으로 이어졌다. 이와 관련한 자료로 101405, 395393, 303923, 211492, 313332, 216662 등을 볼 수 있다. 구로지역 노동자들의 삶과 구로동맹파업의 전체 흐름과 종합적인 이해를 위해서는 <부모님 전상서[대우어패럴 노동운동 관련]>(사료번호 : 359263), <대우어패럴 노동조합탄압에 항쟁하는 노동자 연대투쟁 종합소식>(사료번호 : 91086)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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