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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지하철노조파업

서울지하철공사 노동자들은 24시간 2교대 근무로 주 당 54시간의 장시간 노동과, 1호선의 경우 허용치의 9배, 2호선의 경우 허용치의 3배가 넘는 극심한 대기 오염 속에서, 한여름에는 40도까지 올라가는 현장 상황 등 매우 열악한 조건에서 근무하였다. 게다가 1984년 지하철공사 통폐합 이후 평균 학력이 타 공사와 거의 비슷함에도 불구하고, 현장 근무자를 본사 직원보다 낮게 취급하고 공무원, 한국전력공사, 통신공사보다 30%나 낮은 보수를 받음으로써 관련 노동자들의 불만이 누적되었다. 이같이 불만과 분노가 쌓여 가던 중 1987년 7·8월 노동자대투쟁(상세는 별도 항목 참고)을 거치면서 지하철공사노동조합이 결성되었다.

서울지하철노조와 공사 측은 1988년 10월에 3번째 각서를 교환하였다. 이미 1987년 11월에 새로운 직제를 실시하기로 했던 노사합의가 있었으나 지켜지지 않은 상태에서 다시 근무형태를 8시간 노동제로 변경하고 임금체계를 개선하여 1989년 1월부터 실시하기로 하였으며, 이 중 근무수당을 기본급에 포함시키기로 하였다. 그러나 합의각서는 또다시 이행되지 않았다. 이에 노동조합은 1989년 2월 28일 노동부에 쟁의발생을 신고했다. 서울시 측의 요구로 교섭이 진행되었으나 3월 5일 완전히 결렬되었다. 서울지하철노조는 3월 6일을 기해 무임승차 투쟁을 전개하였다. 그 결과 승객의 90%가 무임승차하는 등 대중적 호응이 높아지자, 서울시 측은 6일부터 다시 교섭을 요청하여 7일에는 모두 타결되는 듯 했다. 그러나 김명년 서울지하철공사 사장이 합의서 서명을 거부하였다. 노동조합은 ‘김명년 퇴진, 배일도 석방’ 등의 요구를 추가하였다. 우여곡절 끝에 합의문이 만들어졌지만 고건 서울시장이 서명을 거부함으로써 교섭은 완전히 결렬되었다. 서울지하철노조는 서울시와의 최종 협상마저 결렬됨에 따라 16일 오전 4시를 기해 전면 파업을 단행하였다.

서울시내 4개 노선의 지하철 정상운행이 마비되었다. 마지막 협상이 결렬된 이후 노조 측은 노조 본부가 있는 군자차량기지를 중심으로 농성 등 전면 파업에 돌입했으며, 정부는 이를 불법행위로 규정하고 강경 대응하는 한편, 공사 측은 관계 규정에 따라 직장복귀 명령을 내리기로 결정하였다. 3월 16일 오전 6시 25분 서울시 성동구 서울지하철 군자차량기지를 7,000여 명의 전경들이 에워쌌다. 이어 경찰 측의 지휘본부가 극동도시가스 빌딩 옥상에 차려졌고, 서울시경 김우현 국장의 지휘로 최루탄을 쏘며 정문과 후문 등 5개소를 통해 전경이 투입되었다. 조합원들은 후생관 옥상에서 화염병을 던지고, 정문에 만들어 놓은 바리케이트에 불을 지르며 저항하였지만, 진압 개시 10분 만에 노조 사무실을 탈취당하고 후생관이 완전히 포위되었다. 이어 조합원들이 연행되기 시작하였다. 연행자는 총 2,344명으로 25분 만에 진압이 완료되었다. 이에 굴하지 않고 조합원 3,000여 명은 임시지도부를 구성하고 제2지도부(임시위원장 서창호)를 중심으로 약 700명이 3월 17일부터 민주당에서 철야농성에 돌입하였다. 비록 현장은 진압이 완료되었지만 지하철은 제대로 운영되지 않았다. 파업 3일째인 18일에는 83%의 조합원들이 직장에 복귀했지만, 그중 2/3이상이 작업을 거부하고, 민주당과 평민당사 농성에 합류하였다. 1호선만 정상적으로 운행되었고 3호선은 운행이 전면 중단되었다. 파업 6일째인 3월 21일에도 76%가 직장에 복귀했지만, 겨우 15%정도의 노동자만 작업에 임했고, 기관사들은 9.6%만이 운행에 참가하였다.

이러한 지하철 노동자들의 농성투쟁에 서노협(서울지역노동조합협의회. 상세는 별도 항목 참고)을 비롯한 각 노동운동 단체들의 적극적인 지원이 뒤따랐으며, 서울지역의 몇몇 대학들은 지지집회를 벌이는 등 정부의 파업노동자들에 대한 흑색선전과 달리 시민들로부터 뜨거운 지지를 받았다. 이후 3월 29일 중앙노동위원회에서 5월 말까지 근무형태와 임금체계 개선안을 노사협의를 통해 작성하고, 6월 1일부터 시행하며, 임금은 새로운 호봉체계로 1월 1일로 소급하여 지급하도록 하는 중재안을 냄으로써 쟁의는 종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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