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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총련(서울지역총학생회연합) 결성

서울지역대학생대표자협의회(약칭 서대협)가 민주주의 원리 등 조직상의 문제점이 노정되면서 새로운 조직에 대한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이에 서대협의 계승과 혁신을 통하여 실질적 전망을 갖는 조직적 기반을 이루는 것이 필요하다는 인식하에 1988년 4월 10일 서대협 해소가 결의된 후, 서울지역총학생회연합(약칭 서총련)준비위원회가 결성되었다. 서총련준비위원회는 1988년 총선 시기 4월 투쟁의 목표를 대통령 선거 이후 침체되어 있는 “구국운동의 활로를 열고 도약할 수 있는 교두보를 마련하는 것”으로 상정하고, ‘서울지역 대학생총연합 건설 추진위원회’와 함께 4월 19일 수유리에서 ‘4·19 28주년 기념식 및 민정당 패퇴와 민주쟁취를 위한 범국민궐기대회’를 가진 후, “낙선 민정당, 처단 노태우”를 외치며 종로 일대에서 치열한 가두시위를 전개하였다. 그러나 서총련준비위는 4월총선 투쟁을 적극 전개하기보다는, 주로 4월 16일의 ‘한반도 평화와 자주적 통일을 위한 국민대토론회’를 비롯하여 4월 28일의 ‘조국의 자주적 통일을 위한 범국민결의대회’를 주도적으로 준비해 나가면서 서총련 산하 ‘조국통일을 위한 특위연합 준비위원회’를 건설하는 등 통일운동 확산에 주력하였다. 1988년 5월 13일에 발족식을 가진 서총련은 6·10 민주항쟁(상세는 별항 ‘6월민주항쟁’ 참고) 1주년을 맞아 6·10 회담 성사 투쟁 및 공동올림픽 쟁취를 위한 투쟁에 주력하였다.

“미제축출·조국통일·공동올림픽 쟁취” 등을 외치며 할복 투신한 서울대생 조성만의 자살 이후 서총련은 각 학교별로 ‘통일선봉대’를 조직하는 한편, ‘북한 바로알기’ 등 각종 홍보활동을 전개했다. 1988년 10월 28일 서총련 소속학생들은 건국대에서 ‘부정비리 주범 전두환·이순자 구속처벌 및 광주학살 5적 처단을 위한 서울지역 학생투쟁연합’을 발족하고 그 산하에 ‘전·이 체포결사대’를 구성하여 조직적으로 투쟁을 전개했다.

한편 학생운동의 다른 한 축이었던 전국반제반파쇼민족민주학생연맹(약칭 민민학련)은 1988년 4월 12일 서울대, 성균관대 등을 중심으로 서울지역 대학생 총연합 건설추진위원회(약칭 서건추)를 결성했지만, 다수파와 소수파로 분리된 채 서총련에 흡수되었으며, 이후 서총련은 전대협과 그 실천적 궤를 같이하다가 1993년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약칭 전대협. 상세는 별항 ‘전대협 결성’ 참고)가 발전적으로 해체되고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약칭 한총련)으로 새롭게 정비되면서 한총련 산하 조직으로 활동하였다.

서총련(서울지역총학생회연합) 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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