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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 결성

1984년 6월 29일 노동, 농민, 청년, 문화, 종교 등 부문 운동의 통합틀인 민중민주운동협의회(민민협)가 결성되었다. 이와 별도로 같은 해 10월 16일 재야 명망가들을 포괄하는 민주통일국민회의가 구성되었다. 이에 민주화운동권 내부에서는 1984년 말부터 두 단체 통합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통합 과정에서 ① 연대운동의 수준을 협의체로 할 것인지, 연합체로 할 것인지 ② 운동 발전의 성과를 부문운동 강화에 둘 것인지, 아니면 연대운동 조직체에 둘 것인지 ③ 지역운동의 설정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④ 지도력은 집단지도체제로 해야 하는지, 단일 지도력의 강화로 해야 하는지 등에 대해 논쟁을 하였지만 충분한 합의에 도달하지 못하였다. 그러한 상태에서 1985년 2·12 총선을 통해 신민당이 부상하였고, 이에 따라 재야 민주세력도 강력한 통합체의 필요성을 제기하였다. 그리하여 민청련과 개신교단체들이 빠진 가운데 1985년 2월 26일 민민협 중앙위 결의와 2월 27일 국민회의 확대집행위의 결의를 바탕으로 3월 29일 두 단체의 통합대회가 개최되었다. 통합대회는 2·12 총선을 통해 나타난 국민들의 민주화 열망에 부응하여 범 민주세력의 전열을 정비하고 군사독재 종식을 위한 민주·민권·민족통일운동에 총력을 기울일 것을 결의했고, 범민주세력의 대동단결이 지상과제임을 명시하였다. 또한 통합선언문을 통해 민중·민주·통일운동을 총체적으로 선도하는 조직으로 출발할 것을 선언했다.

민통련의 초기 활동(1985.3~1985.9)은 주로 성명서 발표와 농성투쟁의 형태를 취했다. 1985년 4월 15일 ‘전두환 방미’에 대한 성명 발표와 4·19, 7·4, 8·15 등 기념일에 즈음한 성명 발표, 광주항쟁 5주년 투쟁, 9월 초의 양심수석방 요구 농성 등이 주요한 투쟁이었다. 이외에 8월에 ‘학원안정법반대투쟁 전국위원회’ 구성에 적극 참여하여 학원안정법 제정기도 분쇄를 위한 투쟁을 전개하였다. 민통련은 조직 강화를 위해 노력한 결과 1985년 9월 20일 2차 통합대회를 개최하여 민청련, 서노련, 개신교의 몇몇 운동단체 등 11개의 공개 단체를 새롭게 포괄하였다. 강화된 조직력을 바탕으로 1985년 하반기에는 군사 정권의 재집권 음모에 따른 민주세력에 대한 탄압 저지투쟁을 전개했고, 민주헌법쟁취위원회를 구성하여 개헌투쟁을 전개했다. 이외에 국제통화기금(IMF), 세계은행(IBRD)의 서울 총회를 계기로 10월 8일 노동, 농민, 청년, 문화, 종교, 지방 등 각 부문, 지역별 24개 운동단체들과 ‘외채정권 규탄 범국민대회’를 개최하는 등 정권의 대외종속에 대해 계속해서 문제제기를 했다. 1986년 들어 개헌서명운동이 전개되자 지방 조직들 및 해당 지역의 학생운동과 함께 신민당의 개헌현판식을 계기로 표출된 광범한 대중의 개헌 요구를 가두 대중투쟁으로 발전시키는 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 이후 5·3인천항쟁을 경과하면서 군사 정권은 민족민주운동을 탄압하는 한편, 5월 27일 국회 내 헌법특위 설치를 통해 야당을 민족민주운동권과 분리시켜 장내의 개헌 논의로 끌어들였다. 이에 따라 반군사독재전선에 현격한 약화가 일어났다.

5·3인천항쟁 이후 군사정권의 탄압은 민통련에도 가해져 5·3인천항쟁의 배후로 민통련을 지목하여 민통련을 반국가단체로 규정한 뒤, 문익환 의장을 구속하고 주요 간부에 대한 검거령을 내렸다. 이에 민통련은 당면투쟁 목표를 장기집권음모 분쇄투쟁에 두면서 상황 타개를 모색하였다. 그러한 가운데 전두환의 ‘4·13호헌조치’가 발표되었다. 이에 민통련은 4월 14일 호헌 조치 발표에 반박하는 내용의 성명서를 발표하고, 이후 5월투쟁과 ‘호헌철폐 독재타도투쟁’을 결합하여 범민주세력의 반군사독재 투쟁전선을 적극적으로 모색하였다. 이러한 민통련의 적극적 노력은 5월 27일 마침내 야당까지를 포함하는 광범한 반군사독재 투쟁전선인 ‘민주헌법 쟁취 국민운동본부’(국본)를 탄생시켰다. 민통련은 6월항쟁 이후 통일 관련 대중 사업을 벌이고 7~9월 노동자대투쟁 당시 민통련 노동위원회를 통해 성명을 발표하는 등의 활동을 펼쳤다. 이어 대통령 선거와 관련하여 9월 26일 민통련은 ‘범국민 대통령 후보 단일화를 위한 민통련의 입장’을 발표하였다. 중앙위원회를 통해 김대중을 대통령 후보로 추천한 뒤, ‘김대중선생 단일 후보 범국민 추진위원회’를 결성하고 김대중 지지활동을 펼쳤다. 노태우 당선 이후에도 민통련은 선거 무효를 선언하고 부정선거투쟁에 돌입했다. 문익환 의장도 12월 23일부터 무효화투쟁에 전 국민이 참여할 것을 호소하며 단식투쟁에 들어갔다. 민통련은 대선 투쟁의 실패에 대한 책임을 물어 1988년 1월 중앙위원 전원을 인책하고 국민에게 반성의 성명을 발표하였다. 4월 11일의 총선에 대해서는 “① 특정 정당은 지지하지 않으며 ② 민정당 패퇴에 전력하고 ③ 애국적 민주적 인사가 당선될 수 있도록 지원하며 ④ 선거유세장은 민중의 생존권을 확보하는 투쟁이 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5월 17일 이후에는 광주학살의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단을 위한 활동을 벌였다. 한편, 이 무렵 전국민중운동연합 건설에 대한 논의가 전개되었고, 민통련도 여기에 참여하였다. 새로운 민중운동연합 건설 논의는 6월 18일부터 전국민운연준비소위를 별도로 구성하여 진행되었다. 그리하여 1989년 1월 21일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이 창립되었고, 같은 날 민통련은 약 4년간의 활동을 마무리 짓고 발전적 해체를 하였다.

주요출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연구소 편, 『한국민주화운동사연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기획/서중석 저,『한국현대사 60년』 민통련창립20주년기념행사위원회 편, 『민통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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