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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발족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탄생은 지학순 주교의 강제연행 및 구속사건과 연관이 깊다. 1974년 7월 6일 지학순 주교가 유럽 순방 후 귀국하다가 공항에서 납치되다시피 연행되어 중앙정보부 조사를 받은 후 명동 성모병원에 감금되었다. 지학순 주교의 혐의 내용은 민청학련에 자금 제공과 내란선동, 정부 전복 등이었다. 7월 23일 지학순 주교는 병실에서 빠져나와 병원 마당에서 열리고 있는 원주교구 사제, 수도자, 평신도 500여 명의 지학순 주교를 위한 기도회 자리에서 양심선언을 발표하였다. 양심선언 발표 사실에 당황한 중앙정보부는 신부와 수녀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지학순 주교를 연행하여 구속하였다.

지학순 주교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 교회는 박정희 정권의 폭압에 침묵하고 있었던 것이 현실이었다. 그러나 지학순 주교의 구속사건을 겪고 기도회를 거듭하면서 사제들은 사회 현실에 눈을 뜨게 되었다. 지학순 주교뿐만 아니라 학생, 지식인, 종교인이 투옥되고 있는 현실과 박 정권의 폭압에 교회가 적극적으로 발언해야 한다는 데 전국 사제들의 의견이 일치되었다. 8월 10일 지학순 주교에게 15년 구형이 떨어진 가운데 서울대교구 제3년령 사제 각반 대표회의가 열려 이 문제를 논의하였다. 이 작은 모임이 사제단을 탄생시키는 모체가 되었다.

8월 12일 지학순 주교가 15년 선고를 받은 이후, 기도회는 전국으로 번져갔다. 항상 성당 안과 마당을 가득 채운 기도회 자리는 긴급조치라는 살인적 탄압과 통제 속에서 유신헌법과 긴급조치의 불법성을 알리고 민청학련의 진상과 근황, 가족의 호소 등을 알리는 유일한 언로였다. 또한 그 곳은 전국에 흩어져 있었던 사제들이 만나고 의견을 교환하며 결집하는 장소가 되었다.

9월 23일 원주에서 개최된 성직자 세미나에 모인 사제 300여 명은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라는 명칭에 합의하고 집중적으로 인권회복과 민주화를 위한 기도회를 계속하기로 결정하였다. 이 세미나가 끝난 24일 사제단 결성에 합의한 세미나 참석 신부들은 원주 원동성당에서 사제, 수도자, 평신도 1,500여 명이 모인 가운데 첫 기도회를 가졌다. 이틀 뒤인 9월 26일,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은 명동성당에서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집전으로 순교찬미기도회를 열고 <제1 시국선언>을 발표하면서 공식적으로 발족했다. 미사가 끝난 후 사제단은 십자가를 앞세우고 수도자 200여 명, 평신도 1,000여 명과 함께 가두시위를 전개하였다. 이 날의 시위는 사제들에 의한 최초의 가두시위였다. 또한 수녀들이 시위에 참가한 것도, 촛불 가두시위가 이루어진 것도 이 나라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의 출발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은 출범 당시 <제1 시국선언>에서 “인간의 존엄성과 기본권이 침해당할 때면 언제 어디서나 그의 편에 서서 그의 권리를 회복시켜주기 위하여 저항하고 투쟁할 권리와 의무”가 있다고 선언하였다.

이후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의 활동은 민주화와 인권회복을 위한 현장에서 중요 고비마다 계속되었다. 특히 아무도 쉽게 나설 수 없었던 김지하 구명운동, 인혁당사건 진상조사와 구명운동, 서울대 법대 최종길 교수의 고문치사 사건 폭로, 김재규 사건, 5·18광주민중항쟁,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 박종철 고문살인 사건, 임수경 방북사건 등에서 정의구현사제단은 거침없는 발언과 행동으로 민주화운동에 큰 기여를 하였다.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의 활동으로 교회는 인권운동의 중심이 되었으며 양심의 보루라 불려졌다.

주요출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연구소 편, 『한국민주화운동사 연표』 지학순, 『정의가 강물처럼』 함세웅, 『고난의 땅 거룩한 땅』

사료소개

약 1천여 건의 사료가 소장되어 있다.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출범 전후 기도회 때마다 배포되었던 <행복하여라! 옳은 일을 하다가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니>(등록번호 : 442439)에는 지학순 주교의 양심선언과 함께 민청학련의 진상과 관련자들의 근황이 함께 실려있다. 이후 양심선언은 “양심선언 운동”으로 전개되었다. 양심선언은 사전 또는 사후에 자신의 입장과 사상을 밝힘으로써 당시의 영장 없는 연행, 체포, 구속, 가혹한 고문과 협박에 의해 조작 사건의 희생자가 되어야 했던 민주인사들의 진실을 밝히고 수사기관의 고문에 의한 허위 자백을 무효화시키는 방법이 되었다. <천주교 정의구현 전국 사제단 제2차 시국선언-인권회복을 위한 기도회에 즈음하여>(등록번호 : 448507)와 <사회정의 실천 선언>(등록번호 : 113734)은 “사회 구조의 모순과 체제의 탄압에 억눌린 자유와 해방과 진실을” 알리고 정치 권력의 비대와 남용을 통제하고 이를 방지하려는 민중의 편에 서서 그들을 대변하여 인간의 기본권과 생존권에 관한 복음의 가르침을 재천명하고 집권자와 국민의 상호 의무와 권리를 다시 한 번 각성시키는 것이 우리의 사명임을 확신한다”고 선언하며 민중지향성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와 함께 <民主 民生을 위한 福音運動을 宣布한다>(등록번호 : 108143)는 민중신학에 영향을 주었다. <추도사_최종길 교수와 떠난 모든 형제들을 위해>(등록번호 : 114862), <인혁당 사건 진상을 조사 발표하면서>(등록번호 : 108139), <정부 당국에 묻는다[부산미문화원 방화사건 관련]>(등록번호 : 207832), <성명서-광주,전주 교구 사제들의 직선제 개헌을 위한 단식기도에 동참하면서>(사료번호 : 392986), <박군 고문사망 사건에 대한 천주교 정의구현 전국사제단의 성명서>(등록번호 : 44259), <문규현 신부 방북 관련 자료>(등록번호 : 206835), <고 김기설씨 유서공방사건의 공정한 공개수사를 촉구하며>(등록번호 : 479995) 등은 민주화운동사에 결정적 의미를 부여하는 사건들과 연관되어 있으며,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조차도 신변의 위협을 심각히 느껴야 했던 중요한 사료들이다.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발족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탄생은 지학순 주교의 강제연행 및 구속사건과 연관이 깊다. 1974년 7월 6일 지학순 주교가 유럽 순방 후 귀국하다가 공항에서 납치되다시피 연행되어 중앙정보부 조사를 받은 후 명동 성모병원에 감금되었다. 지학순 주교의 혐의 내용은 민청학련에 자금 제공과 내란선동, 정부 전복 등이었다. 7월 23일 지학순 주교는 병실에서 빠져나와 병원 마당에서 열리고 있는 원주교구 사제, 수도자, 평신도 500여 명의 지학순 주교를 위한 기도회 자리에서 양심선언을 발표하였다. 양심선언 발표 사실에 당황한 중앙정보부는 신부와 수녀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지학순 주교를 연행하여 구속하였다.

지학순 주교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 교회는 박정희 정권의 폭압에 침묵하고 있었던 것이 현실이었다. 그러나 지학순 주교의 구속사건을 겪고 기도회를 거듭하면서 사제들은 사회 현실에 눈을 뜨게 되었다. 지학순 주교뿐만 아니라 학생, 지식인, 종교인이 투옥되고 있는 현실과 박 정권의 폭압에 교회가 적극적으로 발언해야 한다는 데 전국 사제들의 의견이 일치되었다. 8월 10일 지학순 주교에게 15년 구형이 떨어진 가운데 서울대교구 제3년령 사제 각반 대표회의가 열려 이 문제를 논의하였다. 이 작은 모임이 사제단을 탄생시키는 모체가 되었다.

8월 12일 지학순 주교가 15년 선고를 받은 이후, 기도회는 전국으로 번져갔다. 항상 성당 안과 마당을 가득 채운 기도회 자리는 긴급조치라는 살인적 탄압과 통제 속에서 유신헌법과 긴급조치의 불법성을 알리고 민청학련의 진상과 근황, 가족의 호소 등을 알리는 유일한 언로였다. 또한 그 곳은 전국에 흩어져 있었던 사제들이 만나고 의견을 교환하며 결집하는 장소가 되었다.

9월 23일 원주에서 개최된 성직자 세미나에 모인 사제 300여 명은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라는 명칭에 합의하고 집중적으로 인권회복과 민주화를 위한 기도회를 계속하기로 결정하였다. 이 세미나가 끝난 24일 사제단 결성에 합의한 세미나 참석 신부들은 원주 원동성당에서 사제, 수도자, 평신도 1,500여 명이 모인 가운데 첫 기도회를 가졌다. 이틀 뒤인 9월 26일,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은 명동성당에서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집전으로 순교찬미기도회를 열고 <제1 시국선언>을 발표하면서 공식적으로 발족했다. 미사가 끝난 후 사제단은 십자가를 앞세우고 수도자 200여 명, 평신도 1,000여 명과 함께 가두시위를 전개하였다. 이 날의 시위는 사제들에 의한 최초의 가두시위였다. 또한 수녀들이 시위에 참가한 것도, 촛불 가두시위가 이루어진 것도 이 나라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의 출발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은 출범 당시 <제1 시국선언>에서 “인간의 존엄성과 기본권이 침해당할 때면 언제 어디서나 그의 편에 서서 그의 권리를 회복시켜주기 위하여 저항하고 투쟁할 권리와 의무”가 있다고 선언하였다.

이후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의 활동은 민주화와 인권회복을 위한 현장에서 중요 고비마다 계속되었다. 특히 아무도 쉽게 나설 수 없었던 김지하 구명운동, 인혁당사건 진상조사와 구명운동, 서울대 법대 최종길 교수의 고문치사 사건 폭로, 김재규 사건, 5·18광주민중항쟁,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 박종철 고문살인 사건, 임수경 방북사건 등에서 정의구현사제단은 거침없는 발언과 행동으로 민주화운동에 큰 기여를 하였다.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의 활동으로 교회는 인권운동의 중심이 되었으며 양심의 보루라 불려졌다.

주요출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연구소 편, 『한국민주화운동사 연표』 지학순, 『정의가 강물처럼』 함세웅, 『고난의 땅 거룩한 땅』

사료소개

약 1천여 건의 사료가 소장되어 있다.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출범 전후 기도회 때마다 배포되었던 <행복하여라! 옳은 일을 하다가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니>(등록번호 : 442439)에는 지학순 주교의 양심선언과 함께 민청학련의 진상과 관련자들의 근황이 함께 실려있다. 이후 양심선언은 “양심선언 운동”으로 전개되었다. 양심선언은 사전 또는 사후에 자신의 입장과 사상을 밝힘으로써 당시의 영장 없는 연행, 체포, 구속, 가혹한 고문과 협박에 의해 조작 사건의 희생자가 되어야 했던 민주인사들의 진실을 밝히고 수사기관의 고문에 의한 허위 자백을 무효화시키는 방법이 되었다. <천주교 정의구현 전국 사제단 제2차 시국선언-인권회복을 위한 기도회에 즈음하여>(등록번호 : 448507)와 <사회정의 실천 선언>(등록번호 : 113734)은 “사회 구조의 모순과 체제의 탄압에 억눌린 자유와 해방과 진실을” 알리고 정치 권력의 비대와 남용을 통제하고 이를 방지하려는 민중의 편에 서서 그들을 대변하여 인간의 기본권과 생존권에 관한 복음의 가르침을 재천명하고 집권자와 국민의 상호 의무와 권리를 다시 한 번 각성시키는 것이 우리의 사명임을 확신한다”고 선언하며 민중지향성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와 함께 <民主 民生을 위한 福音運動을 宣布한다>(등록번호 : 108143)는 민중신학에 영향을 주었다. <추도사_최종길 교수와 떠난 모든 형제들을 위해>(등록번호 : 114862), <인혁당 사건 진상을 조사 발표하면서>(등록번호 : 108139), <정부 당국에 묻는다[부산미문화원 방화사건 관련]>(등록번호 : 207832), <성명서-광주,전주 교구 사제들의 직선제 개헌을 위한 단식기도에 동참하면서>(사료번호 : 392986), <박군 고문사망 사건에 대한 천주교 정의구현 전국사제단의 성명서>(등록번호 : 44259), <문규현 신부 방북 관련 자료>(등록번호 : 206835), <고 김기설씨 유서공방사건의 공정한 공개수사를 촉구하며>(등록번호 : 479995) 등은 민주화운동사에 결정적 의미를 부여하는 사건들과 연관되어 있으며,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조차도 신변의 위협을 심각히 느껴야 했던 중요한 사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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