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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속자가족협의회(구가협)

1973년의 「남산 부활절 연합예배사건」직후로부터 시작되어 1970년대와 1980년대를 통해 민주화운동과 관련하여 고문받고 구속되거나 권리를 침해당한 노동자, 농민들을 포함하여 모든 억압받는 사람들이 의사를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창구로 정기 집회였던 「목요기도회」가 있었다. 그리고 한국 인권상황이 악화되던 1972년 가을에 미국, 캐나다, 호주, 독일 등의 선교사와 한국 주재원들이 중심이 되어 「월요모임」(Monday Night Group)이라는 정기적인 모임을 갖고 한국의 인권상황에 대해 소식지 「팩트 시트」(진실, Fact Sheet)를 만드는 등 인권을 지키려는 대응들이 있었다.

당시엔 민주화운동으로 구속된 이들에 대해 기독교의 지원활동이 활발했다. 한국교회여성연합회(회장 이우정)와 기장여신도회전국연합회(회장 주재숙) 등 기독교 여성단체들이 「남산 부활절 연합예배사건」의 구속자와 가족들을 돕기 시작하면서, 이후 구속자와 그 가족들에 대한 지원활동을 적극적이고 지속적으로 벌이게 되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유신정권의 교회에 대한 탄압은 기독교의 조직적인 대응을 낳았을 뿐 아니라 교회로 하여금 양심수와 그 가족들의 운동을 지원하고 가족운동이 조직화되는 데 구심점이 되는 장소를 제공하고, 물심양면의 적극적 후원자가 되도록 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1974년「민청학련 사건」을 계기로 구속자 가족들이 모여 본격적인 가족운동을 벌이게 된다. 가족운동이란 양심수의 고통이 스스로의 잘못 때문이 아니라 독재정권의 무자비한 탄압에 항거한 때문이라는 사실을 확신하는 그 가족들이 가족의 석방운동을 넘어서 민주화운동가로서 반독재투쟁에 동참하여 민주화운동을 하는 것을 말한다.

이에 따라 1974년 9월 「구속자가족협의회」( 약칭 구가협. 초대회장에는 윤보선 전 대통령의 부인인 공덕귀, 총무는 김한림이 선출되었다. 1980년부터 1985년까지는 문익환 목사의 부인인 박용길 장로가 회장을 역임했다)가 결성되었으며, 1976년 10월 14일 NCC 인권위원회를 중심으로 구속자 가족들과 관계 인사들이 구속자가족협의회를 「양심범가족협의회」로 개칭했다. 구가협과 이후의 양심범가족협의회는 1985년 12월 12일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 (약칭 민가협) 설립의 모태가 되었다.

이들은 주로 양심수에 대한 지원활동, 해외와의 연계를 통한 대외사업, 민주화운동의 큰 틀 안에서 연대사업 등의 활동을 했는데, 1974년 11월 21일에 유신정권의 영구 집권 음모를 고발하는 ‘구속자가족일동’ 명의의 ‘결의문 - 유신헌법의 철폐를 요구한다’ 발표로부터 시작하여 ① 구속자 석방운동 ② 각종 성명서 발표 ③ 양심범 가족 관리 ④ 재판 방청 및 재판 소식 보도 ⑤ 지방에 있는 구속자에 대한 영치물, 영치금 차입, 면회 등 옥바라지 ⑥ 양심수 처우 개선 요구 ⑦ 어려운 구속 가족 돕기 ⑧ 국내외 인권단체와 협력하의 인권운동 등의 활동을 전개했다.

구속자 가족들은 "우리들은 있지도 않은 소위 인혁당 및 민청학련의 가족으로서 외부적 강압에 의해 이제서야 서로의 인연이 맺어졌으나 우리들의 남편, 아들, 딸의 진정한 뜻을 명확히 알게 된 지금, 우리 가족들은 스스로 단결하여 동지적 입장에서 이 땅에 민주주의가 세워지고 정의와 평화가 가득한 사회를 이룩할 때까지 한 걸음도 투쟁의 대열을 늦추지 않을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바이다"라고 결의하며 투쟁의지를 다졌다. 구가협 회원들은 주로 종로5가의 한국기독교인권위 사무실에서 만나거나 예배당도 없는 갈릴리교회에 참석하면서 각종 활동을 하는 한편, 보랏빛의 유명한 ‘빅토리 숄’을 짜서 월요모임을 통해 해외에 까지 한국의 인권상황을 알리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월요모임은 1980년대에도 계속된 한국의 파쇼탄압 아래 고난 받는 자들과 함께 했다. 경찰의 협박과 강제추방의 위협 속에서도 갈릴리교회나 각종 인권집회에 참석하면서 감옥에 갇혀 있는 사람들을 위해 책을 모으고, 내의를 차입하면서 한국의 민주화운동에 큰 도움을 주었다. 이들과 함께 한 오글 목사는 구속자가족들을 도와 용기를 북돋아주고, 죄도 없고 증거도 없이 극형을 선고받은 소위 인혁당 관련 피고인들의 무고함을 밝혀 알리고, 민주회복과 정의실현을 향한 그리스도인의 자세를 설교하며 유신헌법철폐를 주장하다 강제추방되었다. 시노트 신부도 한국의 인권 문제에 관심을 갖고 구속자가족협의회후원회 회장직을 맡는 등 헌신적으로 사제활동을 했다.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도 그들의 든든한 둥지가 되어 암흑속의 횃불이 되었다.

주요출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연구소 편, 『한국민주화운동사 연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기획/ 서중석 저,『한국현대사 60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연구소 기획/ 김설이·이경은 공저, 『잿빛 시대 보랏빛 고운 꿈』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사료관 각종 구술물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연구소 편, 『시대를 지킨 양심』

사료소개

사료관에는 기증자인 박용길 장로가 구가협 활동을 하며 사용했던 각종 박물류가 소장되어있는데, ‘빅토리 숄’인 <어깨숄>(등록번호 : 057144)을 비롯해 3·1민주구국사건 때 사건 관련 구속자가족들이 시위용으로 제작해 법원까지 들고 간 “민주인사 석방하라” 등이 써있는 부채(등록번호 : 033704)와 남편 문익환 목사의 수형번호가 적힌 시위용 <보라색 원피스>(등록번호 : 33709)와 한복(등록번호 : 033711) 등 희귀자료들이 특기할 만하다. 이외에도 구가협이 제작 배포했던 각종 성명서(등록번호 : 480358외), 호소문(등록번호 : 479704외), 항의서(등록번호 : 479709) 등이 50여건 소장되어 있다. 양심범가족협의회 명의의 각종 성명서(등록번호 : 75395외) 등도 34건이 소장되어 있다.

구속자가족협의회(구가협)

1973년의 「남산 부활절 연합예배사건」직후로부터 시작되어 1970년대와 1980년대를 통해 민주화운동과 관련하여 고문받고 구속되거나 권리를 침해당한 노동자, 농민들을 포함하여 모든 억압받는 사람들이 의사를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창구로 정기 집회였던 「목요기도회」가 있었다. 그리고 한국 인권상황이 악화되던 1972년 가을에 미국, 캐나다, 호주, 독일 등의 선교사와 한국 주재원들이 중심이 되어 「월요모임」(Monday Night Group)이라는 정기적인 모임을 갖고 한국의 인권상황에 대해 소식지 「팩트 시트」(진실, Fact Sheet)를 만드는 등 인권을 지키려는 대응들이 있었다.

당시엔 민주화운동으로 구속된 이들에 대해 기독교의 지원활동이 활발했다. 한국교회여성연합회(회장 이우정)와 기장여신도회전국연합회(회장 주재숙) 등 기독교 여성단체들이 「남산 부활절 연합예배사건」의 구속자와 가족들을 돕기 시작하면서, 이후 구속자와 그 가족들에 대한 지원활동을 적극적이고 지속적으로 벌이게 되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유신정권의 교회에 대한 탄압은 기독교의 조직적인 대응을 낳았을 뿐 아니라 교회로 하여금 양심수와 그 가족들의 운동을 지원하고 가족운동이 조직화되는 데 구심점이 되는 장소를 제공하고, 물심양면의 적극적 후원자가 되도록 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1974년「민청학련 사건」을 계기로 구속자 가족들이 모여 본격적인 가족운동을 벌이게 된다. 가족운동이란 양심수의 고통이 스스로의 잘못 때문이 아니라 독재정권의 무자비한 탄압에 항거한 때문이라는 사실을 확신하는 그 가족들이 가족의 석방운동을 넘어서 민주화운동가로서 반독재투쟁에 동참하여 민주화운동을 하는 것을 말한다.

이에 따라 1974년 9월 「구속자가족협의회」( 약칭 구가협. 초대회장에는 윤보선 전 대통령의 부인인 공덕귀, 총무는 김한림이 선출되었다. 1980년부터 1985년까지는 문익환 목사의 부인인 박용길 장로가 회장을 역임했다)가 결성되었으며, 1976년 10월 14일 NCC 인권위원회를 중심으로 구속자 가족들과 관계 인사들이 구속자가족협의회를 「양심범가족협의회」로 개칭했다. 구가협과 이후의 양심범가족협의회는 1985년 12월 12일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 (약칭 민가협) 설립의 모태가 되었다.

이들은 주로 양심수에 대한 지원활동, 해외와의 연계를 통한 대외사업, 민주화운동의 큰 틀 안에서 연대사업 등의 활동을 했는데, 1974년 11월 21일에 유신정권의 영구 집권 음모를 고발하는 ‘구속자가족일동’ 명의의 ‘결의문 - 유신헌법의 철폐를 요구한다’ 발표로부터 시작하여 ① 구속자 석방운동 ② 각종 성명서 발표 ③ 양심범 가족 관리 ④ 재판 방청 및 재판 소식 보도 ⑤ 지방에 있는 구속자에 대한 영치물, 영치금 차입, 면회 등 옥바라지 ⑥ 양심수 처우 개선 요구 ⑦ 어려운 구속 가족 돕기 ⑧ 국내외 인권단체와 협력하의 인권운동 등의 활동을 전개했다.

구속자 가족들은 "우리들은 있지도 않은 소위 인혁당 및 민청학련의 가족으로서 외부적 강압에 의해 이제서야 서로의 인연이 맺어졌으나 우리들의 남편, 아들, 딸의 진정한 뜻을 명확히 알게 된 지금, 우리 가족들은 스스로 단결하여 동지적 입장에서 이 땅에 민주주의가 세워지고 정의와 평화가 가득한 사회를 이룩할 때까지 한 걸음도 투쟁의 대열을 늦추지 않을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바이다"라고 결의하며 투쟁의지를 다졌다. 구가협 회원들은 주로 종로5가의 한국기독교인권위 사무실에서 만나거나 예배당도 없는 갈릴리교회에 참석하면서 각종 활동을 하는 한편, 보랏빛의 유명한 ‘빅토리 숄’을 짜서 월요모임을 통해 해외에 까지 한국의 인권상황을 알리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월요모임은 1980년대에도 계속된 한국의 파쇼탄압 아래 고난 받는 자들과 함께 했다. 경찰의 협박과 강제추방의 위협 속에서도 갈릴리교회나 각종 인권집회에 참석하면서 감옥에 갇혀 있는 사람들을 위해 책을 모으고, 내의를 차입하면서 한국의 민주화운동에 큰 도움을 주었다. 이들과 함께 한 오글 목사는 구속자가족들을 도와 용기를 북돋아주고, 죄도 없고 증거도 없이 극형을 선고받은 소위 인혁당 관련 피고인들의 무고함을 밝혀 알리고, 민주회복과 정의실현을 향한 그리스도인의 자세를 설교하며 유신헌법철폐를 주장하다 강제추방되었다. 시노트 신부도 한국의 인권 문제에 관심을 갖고 구속자가족협의회후원회 회장직을 맡는 등 헌신적으로 사제활동을 했다.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도 그들의 든든한 둥지가 되어 암흑속의 횃불이 되었다.

주요출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연구소 편, 『한국민주화운동사 연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기획/ 서중석 저,『한국현대사 60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연구소 기획/ 김설이·이경은 공저, 『잿빛 시대 보랏빛 고운 꿈』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사료관 각종 구술물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연구소 편, 『시대를 지킨 양심』

사료소개

사료관에는 기증자인 박용길 장로가 구가협 활동을 하며 사용했던 각종 박물류가 소장되어있는데, ‘빅토리 숄’인 <어깨숄>(등록번호 : 057144)을 비롯해 3·1민주구국사건 때 사건 관련 구속자가족들이 시위용으로 제작해 법원까지 들고 간 “민주인사 석방하라” 등이 써있는 부채(등록번호 : 033704)와 남편 문익환 목사의 수형번호가 적힌 시위용 <보라색 원피스>(등록번호 : 33709)와 한복(등록번호 : 033711) 등 희귀자료들이 특기할 만하다. 이외에도 구가협이 제작 배포했던 각종 성명서(등록번호 : 480358외), 호소문(등록번호 : 479704외), 항의서(등록번호 : 479709) 등이 50여건 소장되어 있다. 양심범가족협의회 명의의 각종 성명서(등록번호 : 75395외) 등도 34건이 소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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