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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마산시위

1960년 3월 15일의 제1차 마산 시위 (3·15 마산시위. 상세는 별도 항목 참조) 때 행방불명되었던 김주열 학생의 시체가 4월 11일 오전 11시 경 실종 27일 만에 발견되었다. 3·15 마산시위 당시 경찰이 발사한 최루탄이 오른쪽 눈에서 뒤통수까지 관통당한 채 마산 신포동 중앙부두 바다 위로 시신이 떠오른 것이다. 김주열의 눈에 박힌 최루탄은 직경 5센티미터, 길이 20센티미터 크기로 꼬리 부분에 프로펠러가 달려 있어 건물 벽을 뚫고 들어가 폭발하는 무장폭도 진압용 무기로 마산경찰서 경비주임 박종표에 의해 지급된 것이었다. 참혹한 모습으로 죽어간 김주열에 대한 소문이 삽시간에 마산 시민들에게 전해졌고, 시민들은 격노하였다. 김주열의 시체가 시청 쓰레기 청소차에 실려 옮겨진 도립마산병원에 몰려든 시민들은 참혹한 주검을 확인하고 즉각 시위 대열을 형성하였다.

시위대는 플래카드와 구호를 통해 고문과 살인을 자행한 경찰을 규탄하고, 정·부통령 재선거를 요구했다. 그날 오후 6시경 시위대는 3만여 명으로 불어나 자유당과 관련이 있는 건물이나 인사의 집을 마구 부숴 나갔다. 남성동파출소에 이어 마산시청, 마산경찰서, 자유당 허윤수 의원의 집, 북마산·오동동·중앙동·신마산 파출소를 휩쓴 성난 군중은 다시 창원군청, 허윤수가 경영하는 동양주정, 무학 주조공장을 부수고 재차 마산경찰서 앞으로 밀려갔다. 애국가, 전우가, 해방가, 3·1절 노래 등을 부르며 다시 마산경찰서 앞에 모인 시위대는 경찰서 마당에 세워 놓은 서장 지프차를 불지른 후 경찰서 무기고를 부수고 수류탄 13개를 들고 나와 그중 한 개를 경찰서 건물에 던졌다. 밤 9시 30분경 경찰들에게 카빈 소총이 지급되었고 이때부터 경찰과 시위대의 공방이 계속되었다. 이로 인해 마산경찰서 앞에서 1명의 사망자와 5-6명의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쫓기던 시위대는 자유당 사무실, 서울신문, 국민회, 마산경찰서장 관서, 마산소방서, 마산시장 박영수의 집 등을 부수고 12시경 해산했다. 이날 시위로 시위대 2명이 죽었다. 시위는 12일에도 이어졌다. 마산공고생 500명, 창신고생 300명, 마산여고생 400명, 마산고생 500명, 마산상고생 1,000명이 오전 10시경 다시 시위에 나서자 수천 명의 시민들이 합세하였다. 이들은 도립병원 영안실로 행진해 가서 김주열의 시신에 경건히 경례하고 자진 해산했다. 그러나 경찰이 전날 시위의 주동자를 색출한다는 명목으로 학생·시민들을 연행하자 다시 시위가 벌어졌다. 1만여 명의 시위대가 경찰서에 돌을 던졌고, 밤 9시경부터는 경찰들이 발포하기 시작하여 밤 11시경 시위대가 해산될 때까지 총성이 계속되었다. 4월 13일, 비가 내리는 속에 10시부터 성지여고생, 마산여고생, 제일여고생 1,000여 명이 시위에 나서자 경찰이 소방호스로 붉은 물감을 탄 진화용 물을 퍼부었다.

경찰에 연행된 자가 1,000명이 넘었으며 이들의 죄목은 오후 7시 통금위반 혐의였다. 이 중 구속 입건이 32명, 불구속 입건이 35명으로 도합 67명이 소요죄 혐의를 받았다. 정부의 조인구 치안국장은 이 사건을 폭도에 의한 파괴행위로 소요죄로 규정하였고, 홍진기 내무장관과 신언한 법무차관은 “적색마수가 배후에 개제된 혐의가 있다”며 공산주의자들의 책동에 의한 것으로 몰고 가려 하였다. 4월 15일 이승만 대통령은 특별담화문을 발표하고, 마산시위가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고무되고 조종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4월 17일 한옥신 부장검사가 “공산당 개입은 속단할 수 없다”고 발표함으로써 마산시위에 대한 이 정권의 색깔씌우기 계획은 좌절되었다. 항쟁의 성격을 띤 제2차 마산시위는 4월혁명이 전국적 차원으로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다.

주요출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4월혁명사료총집발간위원회 편,『4월혁명 사료총집』 1책 일지편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연구소편,『한국민주화운동사연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기획/서중석 저,『한국현대사60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기획/ 김정남 저, 『4·19혁명』 3·15의거기념사업회 편,『3·15의거사』

제2차 마산시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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