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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송회 사건

12·12 쿠데타와 광주학살로 그 출발부터 정통성을 상실한 전두환 정권이 의지할 것은 폭력밖에 없었다. 전두환 정권은 국민들의 저항에 대해 국가보안법을 적용하여 탄압하였다. 반공 이데올로기는 효과적인 정권유지 수단이 되었다. ‘빨갱이 만들기’는 입체적으로 전개되었다. 치안본부 대공분실이 최고지휘부가 되었고, 경찰 대공분실은 경쟁적으로 빨갱이 사건을 조작했다. 사건을 만드는 사람에게는 일계급 특진 등의 특전이 주어졌고, 검찰과 법원은 이를 방조하거나 확인해주었다. 고문이 비일비재하게 자행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공산주의자로 조작되었다. 학림사건, 부림사건, 금강회 사건 등 학생들의 저항은 국가보안법으로 처벌받았다. 뿐만 아니라 성서모임, 돌잔치 모임, 교사들의 4.19 추모식이 빨갱이 사건으로 조작되어 각각 ‘한울회 사건’, ‘아람회 사건’, ‘오송회 사건’으로 만들어졌다. 오송회 사건의 발단은 월북시인 오장환의 『병든 서울』이라는 한 권의 시집이었다. 이 시집이 군산시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발견되자 경찰에 신고되어 수사가 시작되었다. 군산제일고등학교 교사 이광웅은 자신이 가지고 있던 이 시집의 필사본을 몇몇 교사들과 복사하여 나누어보았다. 그것을 빌려간 한 대학생이 버스에 놓고 내린 것이다. 당시만 해도 오장환은 월북작가이기에 그의 책은 읽어서는 안 될 금서였다. 1982년 11월 2일 경찰은 군산제일고교 이광웅 교사 등 9명을 불법 연행했다. 23일 동안 대공분실에서 가혹한 고문, 공갈, 협박으로 '오송회'를 조직하여 반국가 단체를 구성했다고 조작하여 11월 25일 구속하였다. 오송회는 이들이 근무하는 학교 뒷산에 소나무 다섯 그루가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깨어있는 교사이기를 원했던 이들은 어느 때부터인가 4.19 기념일이 사라진 것을 안타까워하며 4.19 위령제라도 지내자고 학교 뒷산에 올라간 적이 있었다. 이들이 소나무 아래서 4.19와 5.18 희생자에 대한 추모의식을 마치고 지식인의 양심과 고뇌, 시국에 대해 토로한 것이 오송회 사건으로 둔갑한 것이다. 이 사건은 이미 공판과정에서 경찰이 공을 세우기 위해 조작한 사건으로 밝혀졌지만 관례를 깨고 1심보다 2심 형량이 더 높게 나왔다. 이 사건 관련자들은 결국 모두 실형을 받았고, 1988년 전원 사면복권되었다. 2002년 민주화운동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위위원회는 오송회 사건 관련자들을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했다. 2007년 6월 12일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이 사건을 5공 시절 현실비판적인 문제의식을 갖고 있던 교사들에 대하여 불법적인 장기구금과 고문으로 허위 자백을 받은 전형적인 조작사건으로 규정하였다. 2008년 11월, 이 사건 관련자들은 사건 발생 후 26년 만에 열린 광주고법 재심에서 정식으로 '무죄'를 입증 받았다. 주요출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민주화운동관련 사건·단체사전편찬을 위한 기초 조사연구보고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홈페이지 연대별민주화운동사 김정남, 『진실, 광장에 서다』 오마이뉴스, 5공 시절 ‘오송회 사건’ 재심결정 내려져 (2007. 6.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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