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태일 분신
- 청계피복노동조합결성투쟁
- 민주수호국민협의회 민주수호운동
- 광주대단지 사건
-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 결성
- 김대중 납치사건
- 최종길 교수 의문사 사건
- 수도권특수지역선교위원회 긴급조치위반사건
- 민청학련(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사건
- 제2차 인혁당(인민혁명당) 사건
-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발족
- 오글 목사, 시노트 신부 강제추방사건
- 조선일보ㆍ동아일보 기자 해직 사태
- 서울대생김상진할복자살
- 장준하 의문사 사건
- 3ㆍ1민주구국선언 사건(명동 사건)
- 구속자가족협의회(구가협)
- 「민주구국헌장」 사건
- 동일방직사건
- 함평고구마사건
- YH사건
- 민주청년인권협의회
- 「우리의 교육지표」사건
- 크리스챤아카데미 사건
- 안동교구가톨릭농민회사건(오원춘사건)
- YWCA 위장결혼식 사건
- 서울대생내란예비음모사건
- 자유실천문인협의회문학인 101선언
- 인선사(삼고사) 유령노조사건
- 병역문제대책위원회사건
- 청계피복노조 노동교실 탄압사건
- 카터 방한 반대시위
- 1970년대 필화사건
- 1970년대 언론탄압
청계피복노동조합결성투쟁
청계피복 노동조합은 전태일 분신 직후인 1970년 11월 27일 결성되었다. 전태일의 어머니 이소선은 전태일과 삼동회 회원들이 전태일 사망 한 달 전에 평화시장 업주들에게 요구한 근로조건개선, 노조결성 등 8개 요구사항이 관철되지 않으면 장례를 치르지 않겠다고 하자 전태일 분신의 사회적 파장을 우려한 노동청장 이승택은 노조결성 지원을 약속한다. 이소선과 삼동회 회원들은 11월 20일 최종인 준비위원장을 중심으로 ‘전국연합노동조합 청계피복지부’(가칭) 결성준비위원회 구성을 시작으로 평화시장 옥상에 사무실을 마련하고 11월 27일 가입 조합원 560명을 대표하는 56명의 대의원이 ‘전국연합노동조합 청계피복지부’의 결성대회를 개최함으로써 민주노조를 출발시켰다.
노동조합 결성 후 최종인을 중심으로 한 삼동회 회원들은 사용주들로부터 노조활동을 인정받고 조합원을 확보해 노조기반을 안정시키려고 했으나 집행부의 역량부족, 노조에 대한 인식 부족, 사용주들의 방해 등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1972년 2월, 노동교실 운영권을 빼앗으려는 사용주들에 맞서 7시간의 투쟁 끝에 요구조건을 관철시키고 노동청장의 주선으로 ‘청계노조 단체협약’이 정식으로 체결되었다. 청계피복노조는 조합내 교육프로그램으로 ‘노동교실’을 열어 노동자들을 위해 중등교육과정, 교양프로그램, 재단교실, 봉재교실 등을 개설하고 교육, 교양, 기능습득을 향상시키도록 했다. 대부분 의식수준이 낮은 조합원들을 재교육, 의식화시키고 노동자들의 근로조건개선투쟁을 통해서 노동자의 권익보호의식을 가지도록 했으며 이러한 과정에서 대학생, 교회단체 등의 외부세력과 연결되는 통로를 마련하여 노학연대의 틀을 제시했다.
1977년 7월 15일 이소선이 장기표의 공판정에서 소란을 피웠다는 이유로 구속되자 노동교실이 무기한 폐쇄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노조원들이 노동교실을 되찾기 위해 농성을 시작하자 경찰 수백 명이 노동자들을 강제연행하려는 과정에서 노동자들이 3층에서 뛰어내리거나 할복을 시도하는 등의 격렬한 항의로 노동운동 탄압에 맞섰다. 이를 계기로 노동자들과 지식인 간의 연대강화가 다시 한번 제기되었고 함석헌, 지학순 주교 등 등 각계 지도자 20명이 ‘평화시장 인권문제협의회’를 결성하여 ‘한국노동인권헌장’을 채택하여 발표하게 되었다. 청계피복노조는 1981년 노조해산명령에 의해 청계노조가 폐쇄된 후 4차례의 투쟁 끝에 신고필증을 다시 받았고 1998년 서울지역의류제조업노조(서의노)를 창립하였다.
주요출처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기획 『민주화운동관련사건·단체사전 편찬을 위한 기초조사연구(1970년대)보고서Ⅱ』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기획 『1970년대 민중운동연구』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기획 『유신과 반유신』
사료소개
청계피복노조와 관련하여 366건이 소장되어 있다. 청계천 일대 평화시장 등에서 저임금에 시달리는 피복업계 노동자들의 임금실태 보고서 <시장상가 피복제품업체 근로자의 임금실태 조사결과> (등록번호 : 512069), 윤보선, 함석헌 등 15인의 사회 각계 인사들이 청계피복노조 탄압에 항의하여 발표한 <국민에게 드리는 글> (등록번호 : 528466), 1981년 서울시의 청계노조 해산명령에 대하여 명령철회를 요구하며 발표한 <성명서> (등록번호 : 333357), 전태일 죽음 이전부터 청계노조 20주년의 역사를 기록한 <청계노조 20년 투쟁사> (등록번호 : 441463), 1984년 청계피복노조를 복구하여 정상화시킬 것임을 주장한 <노동부 장관에게 보내는 공개 서한>(등록번호 : 426076) , 청계노조 강제해산 후 청계노조원상회복추진위원회가 기록한<청계피복노동조합 10년 사건일지>(등록번호 : 425379) 등이 있고, 청계노조의 주요투쟁사, 관련 성명서 등이 포함되어 있다.
- 1960년대
- 1970년대
- 전태일 분신>
- 청계피복노동조합결성투쟁>
- 민주수호국민협의회 민주수호운동>
- 광주대단지 사건>
-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 결성>
- 김대중 납치사건>
- 최종길 교수 의문사 사건>
- 수도권특수지역선교위원회 긴급조치위반사건>
- 민청학련(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사건>
- 제2차 인혁당(인민혁명당) 사건>
-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발족>
- 오글 목사, 시노트 신부 강제추방사건>
- 조선일보ㆍ동아일보 기자 해직 사태>
- 서울대생김상진할복자살>
- 장준하 의문사 사건>
- 3ㆍ1민주구국선언 사건(명동 사건)>
- 구속자가족협의회(구가협)>
- 「민주구국헌장」 사건>
- 동일방직사건>
- 함평고구마사건>
- YH사건>
- 민주청년인권협의회>
- 「우리의 교육지표」사건>
- 크리스챤아카데미 사건>
- 안동교구가톨릭농민회사건(오원춘사건)>
- YWCA 위장결혼식 사건>
- 서울대생내란예비음모사건>
- 자유실천문인협의회문학인 101선언>
- 인선사(삼고사) 유령노조사건 >
- 병역문제대책위원회사건>
- 청계피복노조 노동교실 탄압사건>
- 카터 방한 반대시위>
- 1970년대 필화사건>
- 1970년대 언론탄압>
- 1980년대
- 사북항쟁 (사북광산노동자대투쟁)>
-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
- 원풍모방 노조사수투쟁>
- 전국민주학생연맹·전국민주노동자연맹 사건(학림사건)>
- 콘트롤데이타 노동쟁의>
- 부산미문화원방화사건>
- 오송회 사건>
-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 결성>
- 한국노동자복지협의회 결성>
- 민중민주운동협의회>
- 목동 철거민 투쟁>
-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 결성>
- 대우자동차 노조민주화 및 임금인상 투쟁>
- 구로동맹파업>
- 민정당 중앙정치연수원점거농성사건>
-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민가협)>
- KBS TV 시청료 거부운동>
- 개헌서명운동>
- 박영진 분신 사건>
- 김세진ㆍ이재호 분신 사건>
- 5ㆍ3인천항쟁>
- 서울노동운동연합 사건>
- 부천서 성고문 사건>
- 전국반외세반독재애국학생투쟁연합(애학투련) 결성식 및 건국대 점거농성 사건>
- 7ㆍ8월 노동자 대투쟁>
- 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민교협) 결성>
-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 결성>
- 대우조선 노조결성과 이석규 장례투쟁>
- 민족문학작가회의 창립>
- 부정선거 항의 구로구청 점거농성 사건>
-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민변) 창립>
- 전국노동운동단체협의회 결성>
- 강원 탄광노동자 성완희 분신사건>
-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 결성>
- 나라사랑청년회>
- 전국노점상연합회 결성>
- 전국농민단체협의회 결성>
- 여의도 농민시위>
-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 결성>
- 이철규 의문사 사건>
- 전국빈민연합 결성>
- 해고노동자블랙리스트철폐투쟁>
- 대우어패럴노조탄압사건>
- 민주화추진위원회(깃발사건)>
- 민중교육지사건>
- 삼민투사건 >
- 교육민주화선언 >
- 제헌의회그룹사건>
- 말지(보도지침)사건>
- 서울남부지역노동자동맹(남노련)사건>
- 서총련(서울지역총학생회연합) 결성>
- 서울지역노동조합협의회 결성>
- 공해추방운동연합(공추련) 결성>
- 서울지하철노조파업>
- 경동산업노조탄압과 노동자 집단분신>
- 인천지역노동조합협의회(인노협) 총파업투쟁>
- 1980년대 통일운동>
- 1990년대
관련키워드
청계피복노동조합결성투쟁
청계피복 노동조합은 전태일 분신 직후인 1970년 11월 27일 결성되었다. 전태일의 어머니 이소선은 전태일과 삼동회 회원들이 전태일 사망 한 달 전에 평화시장 업주들에게 요구한 근로조건개선, 노조결성 등 8개 요구사항이 관철되지 않으면 장례를 치르지 않겠다고 하자 전태일 분신의 사회적 파장을 우려한 노동청장 이승택은 노조결성 지원을 약속한다. 이소선과 삼동회 회원들은 11월 20일 최종인 준비위원장을 중심으로 ‘전국연합노동조합 청계피복지부’(가칭) 결성준비위원회 구성을 시작으로 평화시장 옥상에 사무실을 마련하고 11월 27일 가입 조합원 560명을 대표하는 56명의 대의원이 ‘전국연합노동조합 청계피복지부’의 결성대회를 개최함으로써 민주노조를 출발시켰다.
노동조합 결성 후 최종인을 중심으로 한 삼동회 회원들은 사용주들로부터 노조활동을 인정받고 조합원을 확보해 노조기반을 안정시키려고 했으나 집행부의 역량부족, 노조에 대한 인식 부족, 사용주들의 방해 등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1972년 2월, 노동교실 운영권을 빼앗으려는 사용주들에 맞서 7시간의 투쟁 끝에 요구조건을 관철시키고 노동청장의 주선으로 ‘청계노조 단체협약’이 정식으로 체결되었다. 청계피복노조는 조합내 교육프로그램으로 ‘노동교실’을 열어 노동자들을 위해 중등교육과정, 교양프로그램, 재단교실, 봉재교실 등을 개설하고 교육, 교양, 기능습득을 향상시키도록 했다. 대부분 의식수준이 낮은 조합원들을 재교육, 의식화시키고 노동자들의 근로조건개선투쟁을 통해서 노동자의 권익보호의식을 가지도록 했으며 이러한 과정에서 대학생, 교회단체 등의 외부세력과 연결되는 통로를 마련하여 노학연대의 틀을 제시했다.
1977년 7월 15일 이소선이 장기표의 공판정에서 소란을 피웠다는 이유로 구속되자 노동교실이 무기한 폐쇄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노조원들이 노동교실을 되찾기 위해 농성을 시작하자 경찰 수백 명이 노동자들을 강제연행하려는 과정에서 노동자들이 3층에서 뛰어내리거나 할복을 시도하는 등의 격렬한 항의로 노동운동 탄압에 맞섰다. 이를 계기로 노동자들과 지식인 간의 연대강화가 다시 한번 제기되었고 함석헌, 지학순 주교 등 등 각계 지도자 20명이 ‘평화시장 인권문제협의회’를 결성하여 ‘한국노동인권헌장’을 채택하여 발표하게 되었다. 청계피복노조는 1981년 노조해산명령에 의해 청계노조가 폐쇄된 후 4차례의 투쟁 끝에 신고필증을 다시 받았고 1998년 서울지역의류제조업노조(서의노)를 창립하였다.
주요출처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기획 『민주화운동관련사건·단체사전 편찬을 위한 기초조사연구(1970년대)보고서Ⅱ』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기획 『1970년대 민중운동연구』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기획 『유신과 반유신』
사료소개
청계피복노조와 관련하여 366건이 소장되어 있다. 청계천 일대 평화시장 등에서 저임금에 시달리는 피복업계 노동자들의 임금실태 보고서 <시장상가 피복제품업체 근로자의 임금실태 조사결과> (등록번호 : 512069), 윤보선, 함석헌 등 15인의 사회 각계 인사들이 청계피복노조 탄압에 항의하여 발표한 <국민에게 드리는 글> (등록번호 : 528466), 1981년 서울시의 청계노조 해산명령에 대하여 명령철회를 요구하며 발표한 <성명서> (등록번호 : 333357), 전태일 죽음 이전부터 청계노조 20주년의 역사를 기록한 <청계노조 20년 투쟁사> (등록번호 : 441463), 1984년 청계피복노조를 복구하여 정상화시킬 것임을 주장한 <노동부 장관에게 보내는 공개 서한>(등록번호 : 426076) , 청계노조 강제해산 후 청계노조원상회복추진위원회가 기록한<청계피복노동조합 10년 사건일지>(등록번호 : 425379) 등이 있고, 청계노조의 주요투쟁사, 관련 성명서 등이 포함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