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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계피복노동조합결성투쟁

청계피복 노동조합은 전태일 분신 직후인 1970년 11월 27일 결성되었다. 전태일의 어머니 이소선은 전태일과 삼동회 회원들이 전태일 사망 한 달 전에 평화시장 업주들에게 요구한 근로조건개선, 노조결성 등 8개 요구사항이 관철되지 않으면 장례를 치르지 않겠다고 하자 전태일 분신의 사회적 파장을 우려한 노동청장 이승택은 노조결성 지원을 약속한다. 이소선과 삼동회 회원들은 11월 20일 최종인 준비위원장을 중심으로 ‘전국연합노동조합 청계피복지부’(가칭) 결성준비위원회 구성을 시작으로 평화시장 옥상에 사무실을 마련하고 11월 27일 가입 조합원 560명을 대표하는 56명의 대의원이 ‘전국연합노동조합 청계피복지부’의 결성대회를 개최함으로써 민주노조를 출발시켰다.

노동조합 결성 후 최종인을 중심으로 한 삼동회 회원들은 사용주들로부터 노조활동을 인정받고 조합원을 확보해 노조기반을 안정시키려고 했으나 집행부의 역량부족, 노조에 대한 인식 부족, 사용주들의 방해 등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1972년 2월, 노동교실 운영권을 빼앗으려는 사용주들에 맞서 7시간의 투쟁 끝에 요구조건을 관철시키고 노동청장의 주선으로 ‘청계노조 단체협약’이 정식으로 체결되었다. 청계피복노조는 조합내 교육프로그램으로 ‘노동교실’을 열어 노동자들을 위해 중등교육과정, 교양프로그램, 재단교실, 봉재교실 등을 개설하고 교육, 교양, 기능습득을 향상시키도록 했다. 대부분 의식수준이 낮은 조합원들을 재교육, 의식화시키고 노동자들의 근로조건개선투쟁을 통해서 노동자의 권익보호의식을 가지도록 했으며 이러한 과정에서 대학생, 교회단체 등의 외부세력과 연결되는 통로를 마련하여 노학연대의 틀을 제시했다.

1977년 7월 15일 이소선이 장기표의 공판정에서 소란을 피웠다는 이유로 구속되자 노동교실이 무기한 폐쇄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노조원들이 노동교실을 되찾기 위해 농성을 시작하자 경찰 수백 명이 노동자들을 강제연행하려는 과정에서 노동자들이 3층에서 뛰어내리거나 할복을 시도하는 등의 격렬한 항의로 노동운동 탄압에 맞섰다. 이를 계기로 노동자들과 지식인 간의 연대강화가 다시 한번 제기되었고 함석헌, 지학순 주교 등 등 각계 지도자 20명이 ‘평화시장 인권문제협의회’를 결성하여 ‘한국노동인권헌장’을 채택하여 발표하게 되었다. 청계피복노조는 1981년 노조해산명령에 의해 청계노조가 폐쇄된 후 4차례의 투쟁 끝에 신고필증을 다시 받았고 1998년 서울지역의류제조업노조(서의노)를 창립하였다.

주요출처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기획 『민주화운동관련사건·단체사전 편찬을 위한 기초조사연구(1970년대)보고서Ⅱ』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기획 『1970년대 민중운동연구』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기획 『유신과 반유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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