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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열 최루탄 피격사건

광주에서 중고등학교를 다니면서 광주민중항쟁을 간접적으로 체험했던 이한열은 연세대 경영학과에 입학하여 학교 집회에 참석하면서 사회적 관심이 높아지고, 우리 사회의 제반 모순과 문제에 직면했다. 그는 1986년 2학기부터 실천적인 인간이 되기 위해 현실의 중심부에 뛰어들었고, ‘민족주의연구회’에서 시작하여 ‘만화사랑’이라는 동아리활동을 하며 선도적 정치투쟁과 온건한 대중노선을 버무리며 자신의 인식과 실천을 벼리고 있었다.

1987년 5월 9일 연세대 교수 40명은 ‘헌법개정과 정부가 할 일에 대한 우리의 제언’이라는 성명서를 발표하였고, 이어 5월 12일 대학원생 879명이 교수들의 시국선언을 지지하며 즉각적인 호헌철폐를 주장했다. 한편 5월 9일부터 호헌철폐를 요구하며 단식농성 중이던 학생대표들이 전경들에 의해 무자비하게 연행되자 5월 15일 4천여 명의 학생들이 모인 가운데 비상학생총회가 열렸다. 총학생회장 우상호가 ‘총학생회가 준비한 실천방안’을 내놓고 ‘호헌철폐와 민주화실천을 위한 특별위원회’를 발족시키면서 학생들의 투쟁열기는 고조되었다.

1987년 6월 9일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가 개최하기로 한 ‘박종철군 고문살인 은폐조작 규탄 및 민주헌법 쟁취 국민대회’를 하루 앞두고 ‘6·10 대회 출정을 위한 연세인 결의대회’가 개최되었다. 전국에 갑호비상령이 떨어진 가운데 이한열도 이 대회에 참가하였다. 교문을 사이에 두고 ‘백골단’과 시위대가 공방을 나누는 가운데 충돌이 발생했다. 그 과정에서 이한열은 연세대 정문 앞에서 경찰이 쏜 SY-44 직격 최루탄에 뒷머리를 피격당하여 쓰러졌다.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은 “내일 시청에 가야하는데..”였다. 언젠가 그가 노트에 메모한 대로 “피로 얼룩진 땅, 차라리 내가 제물이 되어 최루탄 가스로 얼룩진 저 하늘 위로 날아오르고 싶다”던 그는 사경을 헤매다 7월 5일 결국 사망하였다. ‘이한열 최루탄 피격 사건’이 전국에 알려지면서 학생과 시민들의 광범위한 분노를 불러 일으켰다. 6월 12일 ‘살인적 최루탄 난사에 대한 범연세인 규탄대회’를 최루탄과 다발탄 페퍼포그가 난사됨에도 불구하고 비폭력 평화시위로 치뤘으며, 6월 18일 ‘최루탄 추방 국민대행진’에 이어 7월 9일 이한열 열사의 장례가 전국민이 지켜보고 애도하는 가운데 민주국민장으로 거행되었다. 이한열 최루탄 피격 및 치사 사건은 이렇듯 6월항쟁을 임계점으로 끈 주요한 동인이 되었다. 2005년 6월 9일 신촌에 이한열 기념관이 개관되었다.

주요출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연구소 편, 『한국민주화운동사연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기획/서중석 저,『한국현대사 60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6월민주항쟁계승사업회 편, 『6월항쟁을 기록하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기획/ 서성란 저, 시대의 불꽃 시리즈 『이한열』

이한열 최루탄 피격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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