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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언론탄압

1. 자유언론실천선언

긴급조치 1호·2호와 긴급조치 4호 발동으로 수많은 학생·종교인·지식인들이 투옥되고 고문에 의한 조작으로 사형과 무기징역이 무더기로 선고되는 상황이었지만 긴급조치로 인해 재갈이 물린 언론은 한마디의 방송이나 한 줄의 보도도 할 수 없었다. 1974년 10월 19일 문공부장관은 각 신문사 편집국장과 방송국장을 소집하여 ① 시위·연좌·퇴학 처분·휴강·개강 등 학원 내의 움직임 ② 종교계의 민권운동 ③ 월남에서의 반독재, 반티우 운동 ④ 연탄 기근 문제 등 사회불안을 조성할 우려가 있는 기사를 취급하지 말아 달라는 요청을 하기까지 하였다. 이러한 언론현실 속에서도 동아일보에서는 이계익 기자를 중심으로 자유언론실천운동이 내밀하게 준비되었다. 10월 23일 동아일보에 서울 농대생 데모 기사와 관련하여 송건호 편집국장 등 3명이 연행되자 기자들은 철야농성을 시작했다.

10월 24일 오전 9시 15분 동아일보 기자 180여 명은 편집국에 모여 <자유언론실천선언>을 발표하고 외부의 간섭 배제, 기관원의 출입 거부, 기자의 불법연행 거부 등을 결의했다. 기자들은 선언과 동시에 선언문과 결의사항을 보도하기로 하고,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제작을 거부하기로 했다. 1974년 10월 24일자 동아일보는 10월 25일 오전 1시에 제작되어 나왔다. 그 신문에는 <자유언론실천선언> 기사가 1면 3단으로 보도되어 있었다. 동아일보 기자들의 <자유언론실천선언>은 즉시 각 언론사로 번져갔다. 10월 24일 밤 조선일보사 기자 150여 명은 <언론자유 회복을 위한 선언문>을 채택하였고, 한국일보 기자 130여 명은 사장과 편집국장 연행 사실의 신문보도를 요구하며 제작거부와 철야농성에 이어 25일 새벽 <민주언론 수호를 위한 결의문>과 4개 항의 행동지침을 채택했다. 이외에 관영방송과 정부 기관지 및 여당계 신문과 방송사를 포함한 전국 31개 신문·방송·통신 기자들도 일제히 자유언론의 기치를 들고 일어섰다.

자유언론 실천 운동에 나선 기자들은 박정권과 회사로부터 이중적인 탄압을 받으면서도 통제되어 있던 여러 소식들을 보도했다. 그러나 아직도 금기시되거나 누락되는 기사가 많았다. 특히 민청학련 사건과 인혁당 사건 관련자들의 고문조작 사실, 종교계를 비롯한 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보도는 여전히 지면에 실리지 못했다. 11월 11일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개최하는 인권회복기도회가 전국에서 동시에 열렸다. 동아일보는 이 사건을 사회면 머리기사로 실으려는 기자들과 박정권에 굴복해버린 경영진의 갈등으로 11월 12일자 신문이 휴간되었고, 동아방송도 제작 거부와 함께 11월 12일 낮 12시부터 6시까지 뉴스 방송을 중지하였다. 이 기사는 11월 13일에 사회면 중간 톱으로 사진과 함께 크게 보도되었다. 신문제작은 송건호 편집국장의 ‘언론인의 양심에 따라 정상적인 신문을 만들겠다’는 단호한 공약에 따라 다시 이루어졌다. 이를 시작으로 동아일보는 야당관련 기사를 크게 다루는가 하면, 사설에서 개헌문제를 제기하고, 민주화 세력의 움직임을 크게 보도하였다.

12월 20일 동아일보에 대한 광고탄압이 시작되었다. 박정권은 기자들의 자유언론을 위한 노력을 봉쇄하기 위해 아예 동아일보를 폐간시킬 작정을 하였다. 박정권은 동아일보의 광고주들에게 압력을 가하였고, 20일부터 무더기 해약사태가 벌어졌다. 본격적인 광고 해약은 24일부터였다. 백지 광고를 싣게 된 26일에는 평상시의 절반도 안 되는 광고만이 들어 왔으며, 광고탄압이 시작된 지 한 달이 지난 1월 25일에는 상품광고의 98%가 떨어져 나갔다. 이러한 상황은 동아방송, 󰡔신동아󰡕, 󰡔여성동아󰡕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기자들은 12월 25일 오전 편집국에서 긴급총회를 갖고 광고 계약의 철회 경위 보도, 백지광고 제작 등을 결의했다. 12월 26일 광고해약사태 보도와 함께 백지광고가 게재되었다. 그 즉시 재야 각 단체 등의 항의와 지원성명이 줄이었고 백지광고는 격려광고로 대치되었다. 12월 30일부터 격려광고가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1974년 1월 4일에는 평상시 광고대금의 2배를 넘었다. 재야단체뿐 아니라 국내외 각계각층과 익명의 시민들로부터 격려 광고가 밀려들었다. 신·구교 기독교인, 불교도, 은행원, 대학생, 고등학생, 중학생, 책장사, 예비군, 버스 안내양, 음악인, 연극인, 시인, 노동자 등 다양한 사람들로부터 격려광고와 성금이 줄을 이었다. 격려 광고는 동아일보 기자들의 대량 무더기 해고사태가 일어날 때까지 3개월여 동안 계속되었다.

자유언론실천선언은 박정권의 무자비한 언론탄압에 맞서 그 이전 언론자유수호운동의 방어적 자세에서 실천이라는 능동적 자세로 언론자유를 위한 적극적 행동을 분명히 했다. 또한 광고탄압에 맞선 백지광고와 이를 메우는 격려광고는 언론자유를 위한 기자들의 적극적 움직임과 함께 권력의 언론탄압에 맞선 국민들의 애타는 갈망을 표현하였다.

2. 조선일보ㆍ동아일보 기자 해직 사태

1974년 12월 15일을 전후하여 동아일보에 대한 광고탄압이 시작되었다. 이 사건은 역설적으로 기자들과 경영진의 일시적인 단결을 가져왔다. 하지만 광고탄압의 장기화로 회사는 권력에 야합했고 굴복했다. 그 결과 자유언론실천운동에 참여한 기자들을 해고하기 시작했다.

조선일보는 백기범과 신홍범을 편집권 침해를 이유로 해임했다. 기자들은 반발했고 조선일보는 복직을 약속했다. 기자협회 조선일보분회는 총회의 투표로 자유언론 수호 투쟁을 위해 전열을 정비했다. 조선일보의 빈번한 약속 번복과 취소로 조선일보분회는 무기한 농성에 돌입하고, 자유언론 수호를 위한 선언문을 발표했다. 방우영 조선일보 사장은 강경하게 응수했고 징계위원회를 열어 농성주도자 등 5명에 대한 해고를 결정했다. 이에 기자들은 임시 분회 집행부를 선출하고 부당해고 철회와 정론지로의 복귀 등을 요구하며 투쟁을 결의했다. 농성 기자들은 부·차장들의 제작 거부 동참을 호소하고 기자 모집 사고(社告)에 항의하며 「성명서1」과 「성명서2」를 잇따라 발표했다.

또한 “반일·반공·반독재 55년 동안 점철된 조선일보의 지령이 1975년 3월 7일자로 정지되었음을 선언”하고, “부당 해임된 기자7명의 복직”과 “현 편집국장단의 인책 사퇴”등을 결의했다. 회사는 농성 주모자 김명규 등 5명을 해고 처분하고, 11일에 4명을 해고, 37명을 무기정직시켰다. 동아일보는 3월 8일 경영악화를 이유로 심의실, 기획부, 과학부, 출판부를 없애고 직원 18명을 해임했다. 이에 기자협회 동아일보부회는 철회를 요구하며 무기한 농성에 들어갔다. 동아일보는 분회장 해임을 시작으로 17명을 무더기 해임했다. 사원들은 농성을 계속했다. 3월 15일 편집국장 송건호는 사표를 제출했다. 농성의 장기화와 동아일보에 대한 규탄이 거셌지만 권력과 결탁한 동아일보는 농성 기자들을 강제로 축출했다.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의 해직 기자, 프로듀서, 아나운서, 엔지니어들은 각각 ‘조선 자유언론수호 투쟁위원회’와 ‘동아 자유언론수호 투쟁위원회’를 결성했다. 동아일보는 뒤이어 12명을 해임하고 7명을 무기정직 처분하는 한편, 회사에 항의하는 이들을 위협했다. 동아일보에서 해임 또는 무기 정직된 사람의 수는 131명에 달했다.

2008년 10월 29일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위원장 안병욱)는 동아일보사태에 대해 “중앙정보부 등 국가 공권력에 의한 중대한 인권침해사건”으로 진실규명 결정을 내리고, 국가와 동아일보사 쪽에 “당시 해직자들에게 사과하고 적절한 조처를 취할 것”을 권고했다. 진실화해위의 조사결과에 따르면 중앙정보부는 당시 동아일보사와 계약한 대형 광고주들을 서울 남산 중앙정보부로 불러 동아일보는 물론 동아방송, 여성동아, 신동아, 동아연감 등에 대한 광고를 취소하고 광고를 주지 않겠다는 서약서와 각서를 쓰게 했다. 또 동아일보를 격려한 소액광고주들도 중앙정보부로 불러들이거나 연행하고 세무사찰을 하는 등의 방법으로 광고중단 압력을 넣었다. 진실화해위는 강제해직과 관련해 “동아일보사는 자사의 명예와 언론자유를 지키기 위해 헌신해 왔던 기자들을 보호하기는커녕 정권의 요구대로 해임함으로써 유신정권의 부당한 요구에 굴복했다”며 “결과적으로 언론의 자유, 언론인들의 생존권과 명예를 침해한 책임을 면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조선·동아 기자들의 강제해직과 이들의 언론수호투쟁은 박정희 정권하의 엄혹했던 유신치하에서 민주시민의 기본권인 자유언론이야말로 민주사회를 유지하고 자유국가를 발전시키는 기본적인 기능임을 전 세계에 천명했던 언론사에 길이 남을 사건이었다.

3.동아투쟁위원회의 민주인권일지 사건

정권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국민적 성원 속에 동아일보사를 중심으로 자유언론실천운동이 계속 전개되자 유신정권은 전대미문의 언론탄압을 시작하였다. 광고주들을 위협하여 동아일보에 싣던 광고를 중단시켜 동아일보의 존립자체를 위태롭게 만들었다. 이에 국민들은 ‘격려광고’를 게재하여 언론자유를 위한 용기에 지지를 표현했다. 이러한 국민들의 지지운동은 약 3개월간 계속되었다.

그러나 광고탄압이 장기화 되자 경영진은 권력과 야합하기 시작했고, 마침내 권력에 굴복하였다. 권력에 굴복한 결과는 자유언론실천운동에 참여한 기자들의 해고로 이어지게 된다. 경영진은 1975년 3월 17일 동아일보사에서 농성중인 163명의 기자들을 강제 축출하였다. 사옥에서 강제 축출당하고 펜과 마이크를 빼앗긴 기자, 프로듀서, 아나운서, 엔지니어들은 자유언론실천을 계속적으로 추진하고 효과적으로 복직투쟁을 전개하기 위해 3월 18일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동아투위)를 구성 언론자유를 위한 기약 없는 투쟁을 계속한다.

1978년 10월 24일은 ‘자유언론실천선언’ 4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신문과 방송은 날이 갈수록 권력과 금력에 아첨하고 민중에게 군림하는 타락의 길을 걷고 있었다. 그들은 민중의 소리를 외면하고 권력을 위해 역사와 진실을 왜곡하는 행위마저 서슴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동아투위 위원들은 자유언론실천선언 4주년 기념일에 발행할 동아투위 소식에 그해 6월부터 해오던 대로 제도언론에서 보도하지 않은 민주화운동 관련사건을 싣되, 특집으로 77년 10월부터 78년 10월까지 1년 동안에 일어나 사건들을 종합 정리해 게재키로 했다.

‘10·24 자유언론실천선언 4주년 기념식’은 명동에 있는 음식점 한일관에서 열렸다. 이 기념식에서 배포된 동아투위 소식에는 ‘보도되지 않은 민주 인권사건 일지’ 125건과 함께 자유언론을 압살하는 모든 제도와 법의 철폐를 주장하는 ‘진정한 민주 민족 언론의 좌표’라는 글이 실려 있었다. 이날 밤 10시경 기념식에 참석하고 귀가 중이던 홍종민 총무가 종로경찰서에 연행되었고, 이틀 후에는 안종필 위원장과 안성열·박종만이 다시 종로서로 연행됨으로써 ‘민주인권일지사건’이 발생했다. 동아투위소식지에 실린 내용이 긴급조치 9호 위반이라는 이유에서였다. 동아투위 회원들은 유신정권의 탄압에 맞서 농성, 항의성명서발표 등 언론자유를 위한 투쟁을 계속했다. 이 과정에서 긴급조치 9호 위반 혐의로 1차 민권일지사건 7명, 2차 민권일지사건 3명 등 10명의 동아투위 위원들이 구속되었다.

두 차례에 걸쳐 10명의 위원이 구속된 ‘민주인권일지사건’은 1979년 12월 10일 자정, 긴급조치가 해제됨으로써 심리를 계속할 수 없게 되었다. 결국 1979년 12월 27일 대법원의 면소판결로 법률적으로는 ‘없었던 일’이 되고 말았다. 유신정권이 붕괴되기 1년 전에 터져 국내는 물론 미국 의회에서까지 거론될 정도로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던 사건치고는 너무나 어이없는 결말이었다. 이 사건은 1974년 10월 24일 ‘자유언론실천선언’을 주도한 동아투위 소속 언론인들이 스스로 선언한 자유언론실천의 깃발을 사수하기 위해 투쟁하다 겪게 된 사건으로, 여기엔 언론자유를 향한 동아투위의 이상과 이념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주요출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연구소 편, 『한국민주화운동사 연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기획/ 서중석 저,『한국현대사 60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연구소편, 민주화운동관련 사건· 단체 사전 편찬을 위한 기초조사연구(1970년대)보고서Ⅰ』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 편/『자유언론』 김정남, 『진실, 광장에 서다』 한승헌 외, 『유신체제와 민주화운동』 해담솔 편, 동아자유수호투쟁위원회 『자유언론』

1970년대 언론탄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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