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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노동운동단체협의회 결성

서울노동운동단체협의회·인천노동운동단체협의회·경기남부노동운동단체협의회·성남노동운동단체협의회·인천노동운동단체협의회·대구노동자협의회·경남노동자협의회·현대해고자복직실천협의회·성완희기념사업회 등 노동운동단체들은 1987년 7·8월 노동자대투쟁 이후 가중되는 군사정권과 자본가 측의 폭력적 노동운동 탄압에 공동대응하기 위하여 1988년 6월 7일 한 자리에 모여 전국노동운동단체협의회(이하 전국노운협. 공동의장 문성현, 이영순, 박순희)를 결성하였다. 전국노운협은 ‘민주쟁취 국민운동본부 노동자위원회’와 87년 12월 대통령 선거 시기 수도권지역 중심의 ‘노동자 선거대책위원회’의 활동을 기반으로 결성되었으며, 현대엔진 노조탄압에 대한 지원투쟁이 결성의 직접적 계기가 되었다. 현대엔진 노동자 투쟁이 시작되자 3월 5일 전국노동운동단체 대표자회의가 울산에서 열렸고, 이 회의에서 ‘노조탄압 저지 전국노동자공동대책협의회’를 구성하고, 전국적 차원에서 현대엔진 투쟁을 지원·지지하기로 하였다. 그 이후 공대협은 4월 2, 3일간에 걸친 전국적인 노동자대회를 개최하여 노동계급의 당면한 요구와 전국적 구심을 찾기 위해 노력하였으나, 공대협의 형태로는 그 이후 임투를 비롯한 노동운동의 요구를 하나로 집결시켜 낼 수 없게 되어 추진력이 상실되었다. 그리하여 6월 7일 대전에서 개최된 대표자회의에서 전국공대협을 보다 조직적이고 상설적인 형태로 발전시키기로 결의하여 전국공대협을 해체하고 전국노운협을 결성하였다. 전국노운협은 1988년 8월 전국적 대중신문을 지향하는 󰡔노동자신문󰡕을 창간, 발행하였다. 또한 여러 가지의 공동투쟁을 조직 전개하였다. 노동부의 무노동 무임금 지침 철회 등을 위해 7월 10일 마산에서 ‘노동운동 탄압 분쇄 및 노동악법 개정 촉구, 노동부장관 퇴진 전국노동자대회’를 열었고 7월 17일에는 인천에서 수도권노동자대회를 열었다. 그리고 7월 23일에는 마산에서‘폭력단 추방 및 구속노동자 석방 촉구 범국민대회’를 개최하였다. 하반기에는 전국의 지역, 업종별 노동조합협의회들과 연대 하에 노동법개정투쟁을 준비하고 이끌어갔다. 또한 각계각층과 연대사업을 벌임으로써 통일전선사업을 벌였는데, 1987년 12월 대통령 선거 과정에서 생겨난 민족민주운동의 분열을 극복하기 위하여 민중운동연합 건설을 위한 논의를 적극 전개하였다. 이러한 시기에 전국노운협은 민족민주운동의 상설공동투쟁체 건설을 제안하였다. 그 후 전국노운협은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여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을 창설(1989년 1월 21일)하는 데 기여하였다. 1995년 11월 1일 김영곤(의장), 문성현(전노협 사무총장), 박찬식(전 편집부장)이 연행·구속되었다. 검찰은 전국노운협 결성 부분을 이적단체 구성으로 기소하였으나, 서울지법 형사부는 1996년 4월 27일 노운협의 결성 시기가 1988년이고, 1990년 대의원대회는 단지 단체를 확대 개편한 것에 불과하므로, 이적단체 구성죄 부분은 공소시효가 만료되었다는 이유로 면소 판결을 선고했고, 세 명 모두를 집행유예로 석방했다. 그리고 1997년 2월에 이용석, 1997년 5월 24일에 김윤규와 박성철이 구속되었으며, 1998년 8월에는 박승호가 노운협 관련으로 구속되기도 하였다. 전국노운협은 일관된 방침 하에 투쟁을 이끌어 갈 강령조차 없고, 다양한 성격의 단체들이 모인 느슨한 협의체라는 성격으로 말미암아 처음부터 내적인 한계를 지녔으며 노동조합운동과 민족민주운동의 발전에 따라 보다 강고하고 통일성 있는 조직의 필요성이 끊임없이 제기되었다. 주요출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연구소 편, 『한국민주화운동사연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기획/서중석 저,『한국현대사 60년』 김명시 저, 『전노협건설과 노동조합운동의 현단계』 성완희기념사업회,『전국노동운동단체협의회에 대한 이해를 위하여』
전국노동운동단체협의회 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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