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태일 분신
- 청계피복노동조합결성투쟁
- 민주수호국민협의회 민주수호운동
- 광주대단지 사건
-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 결성
- 김대중 납치사건
- 최종길 교수 의문사 사건
- 수도권특수지역선교위원회 긴급조치위반사건
- 민청학련(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사건
- 제2차 인혁당(인민혁명당) 사건
-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발족
- 오글 목사, 시노트 신부 강제추방사건
- 조선일보ㆍ동아일보 기자 해직 사태
- 서울대생김상진할복자살
- 장준하 의문사 사건
- 3ㆍ1민주구국선언 사건(명동 사건)
- 구속자가족협의회(구가협)
- 「민주구국헌장」 사건
- 동일방직사건
- 함평고구마사건
- YH사건
- 민주청년인권협의회
- 「우리의 교육지표」사건
- 크리스챤아카데미 사건
- 안동교구가톨릭농민회사건(오원춘사건)
- YWCA 위장결혼식 사건
- 서울대생내란예비음모사건
- 자유실천문인협의회문학인 101선언
- 인선사(삼고사) 유령노조사건
- 병역문제대책위원회사건
- 청계피복노조 노동교실 탄압사건
- 카터 방한 반대시위
- 1970년대 필화사건
- 1970년대 언론탄압
수도권특수지역선교위원회 긴급조치위반사건
1973년 4월의 남산 부활절연합예배 사건으로 활동을 중단 당하는 등 탄압을 겪은 수도권도시선교위원회는 1973년 12월 명칭을 수도권특수지역선교위원회로 바꾸고 선교 활동지역을 서울의 빈민지대에 집중하기로 하였다. 그러한 가운데 1974년 1월 8일 긴급조치 1호가 선포되자 권호경 목사를 비롯한 김동완, 이해학, 허병섭, 이규상, 박창빈 등은 구체적 선교활동을 전개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으로 인식했다. 1월 9일 이들은 수도권특수지역선교위원회의 사무실이 있는 서울제일교회에서 모임을 갖고 긴급조치에 저항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들은 다음과 같은 전략을 수립하고 활동을 개시하였다. 제1단계는 이해학 전도사의 책임 아래 동위원회 실무자 및 소장 목사들이 NCC 총무실에서 긴급조치 선포에 반대하는 성명을 발표하고, 이를 언론기관에 알려 보도를 시도한다. 이로 인하여 구속자들이 발생하게 되면, 제2단계로 김동완 전도사가 구속된 교역자가 속한 교회의 교인들을 중심으로 반대 분위기를 조성한다. 이를 통해 다소의 분위기가 조성되면 제3단계로 권호경 목사가 교단을 움직여 긴급조치 선포의 저의와 그 부당성에 도전하게 한다.
1월 17일 이해학 전도사 등 개신교 성직자 5명은 기독교회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총무실에서 긴급조치 철회 및 개헌서명운동을 위한 시국기도회를 개최하였다. 이들은 기도회가 끝난 후 기독교회관 안에 있는 여러 기관 사무실들을 방문하여 개헌청원서명운동을 벌이다 그 자리에서 체포되어 군법회의에 회부되었다. 그리고 이날 참석하지는 않았으나 개헌 청원에 서명했던 김성일 전도사 등이 연행되었고 그중 인명진 목사가 구속되었다. 비상보통군법회의(재판장 박희동 준장)는 2월 8일 전도사 김동완(32) 등 8명의 긴급조치 위반 사건 피고인들에게 징역 15년 자격정지 15년에서 최하 징역 10년 자격정지 10년까지를 선고하였다. 2월 24일에는 이 사건의 경위와 성명서를 담은 우편물을 전국 교회에 우송했던 권호경 목사 등 개신교 신자 7명이 구속되었다.
수도권특수지역선교위원회의 1.17 긴급조치위반사건은 ‘긴급조치1호’라는 상식을 벗어나는 제도적 폭력 앞에 정면으로 항거한 사건이다. 뜻밖의 엄청난 강압조치에 학계, 언론계, 종교계 등은 입을 열지 못하였고, 10월 유신 이후 가장 먼저 유신철폐의 깃발을 높이 올렸던 대학생들 쪽에서도 이렇다할 움직임이 없었다. 다만, 수도권특수지역선교위원회의 성직자들을 포함한 개신교 신자 몇 명과 대학생 몇 명만이 큰 희생을 감수하며 유신철폐와 긴급조치 철회를 주장했던 것이다.
주요출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연구소 편, 『한국민주화운동사 연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기획/ 서중석 저,『한국현대사 60년』
사료소개
이 사건과 관련하여 선언문, 구속자 관련자료, 기소장(등록번호 : 59774), 해외로 보내는 호소문 등과 긴급조치1호 관련 선언문 등 약 20건의 사료가 소장되어 있다. 주요사료로는 한국기독교성직자일동 명의로 된 1.17사건 당일의 <선언문>(등록번호 : 165558)이 있다. <선언문>은 “오늘의 조국이 처한 현실에 대하여 순교자적 각오로 다음과 같이 우리의 신앙을 고백한다”고 비장한 각오를 보이며 긴급조치 철회, 개헌논의의 자유로운 전개, 유신폐지와 민주질서 회복을 촉구하고 있다. 이외에 해외로 보내는 각종 호소문(등록번호 : 59768외)과 경위서 등을 통해 사건 경위 및 수도권특수지역선교위원회의 활동 등을 알 수 있다. 또한 이 사건 관련 구속자 부인들의 기도가 일역된 <獄中の夫のための祈り[수도권특수지역 선교위원회 사건 관련자(김진홍, 인명진, 김경락, 이해학) 부인들의 기도>(등록번호 : 444393)도 눈여겨볼 만 하다.
- 1960년대
- 1970년대
- 전태일 분신>
- 청계피복노동조합결성투쟁>
- 민주수호국민협의회 민주수호운동>
- 광주대단지 사건>
-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 결성>
- 김대중 납치사건>
- 최종길 교수 의문사 사건>
- 수도권특수지역선교위원회 긴급조치위반사건>
- 민청학련(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사건>
- 제2차 인혁당(인민혁명당) 사건>
-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발족>
- 오글 목사, 시노트 신부 강제추방사건>
- 조선일보ㆍ동아일보 기자 해직 사태>
- 서울대생김상진할복자살>
- 장준하 의문사 사건>
- 3ㆍ1민주구국선언 사건(명동 사건)>
- 구속자가족협의회(구가협)>
- 「민주구국헌장」 사건>
- 동일방직사건>
- 함평고구마사건>
- YH사건>
- 민주청년인권협의회>
- 「우리의 교육지표」사건>
- 크리스챤아카데미 사건>
- 안동교구가톨릭농민회사건(오원춘사건)>
- YWCA 위장결혼식 사건>
- 서울대생내란예비음모사건>
- 자유실천문인협의회문학인 101선언>
- 인선사(삼고사) 유령노조사건 >
- 병역문제대책위원회사건>
- 청계피복노조 노동교실 탄압사건>
- 카터 방한 반대시위>
- 1970년대 필화사건>
- 1970년대 언론탄압>
- 1980년대
- 사북항쟁 (사북광산노동자대투쟁)>
-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
- 원풍모방 노조사수투쟁>
- 전국민주학생연맹·전국민주노동자연맹 사건(학림사건)>
- 콘트롤데이타 노동쟁의>
- 부산미문화원방화사건>
- 오송회 사건>
-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 결성>
- 한국노동자복지협의회 결성>
- 민중민주운동협의회>
- 목동 철거민 투쟁>
-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 결성>
- 대우자동차 노조민주화 및 임금인상 투쟁>
- 구로동맹파업>
- 민정당 중앙정치연수원점거농성사건>
-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민가협)>
- KBS TV 시청료 거부운동>
- 개헌서명운동>
- 박영진 분신 사건>
- 김세진ㆍ이재호 분신 사건>
- 5ㆍ3인천항쟁>
- 서울노동운동연합 사건>
- 부천서 성고문 사건>
- 전국반외세반독재애국학생투쟁연합(애학투련) 결성식 및 건국대 점거농성 사건>
- 7ㆍ8월 노동자 대투쟁>
- 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민교협) 결성>
-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 결성>
- 대우조선 노조결성과 이석규 장례투쟁>
- 민족문학작가회의 창립>
- 부정선거 항의 구로구청 점거농성 사건>
-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민변) 창립>
- 전국노동운동단체협의회 결성>
- 강원 탄광노동자 성완희 분신사건>
-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 결성>
- 나라사랑청년회>
- 전국노점상연합회 결성>
- 전국농민단체협의회 결성>
- 여의도 농민시위>
-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 결성>
- 이철규 의문사 사건>
- 전국빈민연합 결성>
- 해고노동자블랙리스트철폐투쟁>
- 대우어패럴노조탄압사건>
- 민주화추진위원회(깃발사건)>
- 민중교육지사건>
- 삼민투사건 >
- 교육민주화선언 >
- 제헌의회그룹사건>
- 말지(보도지침)사건>
- 서울남부지역노동자동맹(남노련)사건>
- 서총련(서울지역총학생회연합) 결성>
- 서울지역노동조합협의회 결성>
- 공해추방운동연합(공추련) 결성>
- 서울지하철노조파업>
- 경동산업노조탄압과 노동자 집단분신>
- 인천지역노동조합협의회(인노협) 총파업투쟁>
- 1980년대 통일운동>
- 1990년대
관련키워드
수도권특수지역선교위원회 긴급조치위반사건
1973년 4월의 남산 부활절연합예배 사건으로 활동을 중단 당하는 등 탄압을 겪은 수도권도시선교위원회는 1973년 12월 명칭을 수도권특수지역선교위원회로 바꾸고 선교 활동지역을 서울의 빈민지대에 집중하기로 하였다. 그러한 가운데 1974년 1월 8일 긴급조치 1호가 선포되자 권호경 목사를 비롯한 김동완, 이해학, 허병섭, 이규상, 박창빈 등은 구체적 선교활동을 전개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으로 인식했다. 1월 9일 이들은 수도권특수지역선교위원회의 사무실이 있는 서울제일교회에서 모임을 갖고 긴급조치에 저항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들은 다음과 같은 전략을 수립하고 활동을 개시하였다. 제1단계는 이해학 전도사의 책임 아래 동위원회 실무자 및 소장 목사들이 NCC 총무실에서 긴급조치 선포에 반대하는 성명을 발표하고, 이를 언론기관에 알려 보도를 시도한다. 이로 인하여 구속자들이 발생하게 되면, 제2단계로 김동완 전도사가 구속된 교역자가 속한 교회의 교인들을 중심으로 반대 분위기를 조성한다. 이를 통해 다소의 분위기가 조성되면 제3단계로 권호경 목사가 교단을 움직여 긴급조치 선포의 저의와 그 부당성에 도전하게 한다.
1월 17일 이해학 전도사 등 개신교 성직자 5명은 기독교회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총무실에서 긴급조치 철회 및 개헌서명운동을 위한 시국기도회를 개최하였다. 이들은 기도회가 끝난 후 기독교회관 안에 있는 여러 기관 사무실들을 방문하여 개헌청원서명운동을 벌이다 그 자리에서 체포되어 군법회의에 회부되었다. 그리고 이날 참석하지는 않았으나 개헌 청원에 서명했던 김성일 전도사 등이 연행되었고 그중 인명진 목사가 구속되었다. 비상보통군법회의(재판장 박희동 준장)는 2월 8일 전도사 김동완(32) 등 8명의 긴급조치 위반 사건 피고인들에게 징역 15년 자격정지 15년에서 최하 징역 10년 자격정지 10년까지를 선고하였다. 2월 24일에는 이 사건의 경위와 성명서를 담은 우편물을 전국 교회에 우송했던 권호경 목사 등 개신교 신자 7명이 구속되었다.
수도권특수지역선교위원회의 1.17 긴급조치위반사건은 ‘긴급조치1호’라는 상식을 벗어나는 제도적 폭력 앞에 정면으로 항거한 사건이다. 뜻밖의 엄청난 강압조치에 학계, 언론계, 종교계 등은 입을 열지 못하였고, 10월 유신 이후 가장 먼저 유신철폐의 깃발을 높이 올렸던 대학생들 쪽에서도 이렇다할 움직임이 없었다. 다만, 수도권특수지역선교위원회의 성직자들을 포함한 개신교 신자 몇 명과 대학생 몇 명만이 큰 희생을 감수하며 유신철폐와 긴급조치 철회를 주장했던 것이다.
주요출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연구소 편, 『한국민주화운동사 연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기획/ 서중석 저,『한국현대사 60년』
사료소개
이 사건과 관련하여 선언문, 구속자 관련자료, 기소장(등록번호 : 59774), 해외로 보내는 호소문 등과 긴급조치1호 관련 선언문 등 약 20건의 사료가 소장되어 있다. 주요사료로는 한국기독교성직자일동 명의로 된 1.17사건 당일의 <선언문>(등록번호 : 165558)이 있다. <선언문>은 “오늘의 조국이 처한 현실에 대하여 순교자적 각오로 다음과 같이 우리의 신앙을 고백한다”고 비장한 각오를 보이며 긴급조치 철회, 개헌논의의 자유로운 전개, 유신폐지와 민주질서 회복을 촉구하고 있다. 이외에 해외로 보내는 각종 호소문(등록번호 : 59768외)과 경위서 등을 통해 사건 경위 및 수도권특수지역선교위원회의 활동 등을 알 수 있다. 또한 이 사건 관련 구속자 부인들의 기도가 일역된 <獄中の夫のための祈り[수도권특수지역 선교위원회 사건 관련자(김진홍, 인명진, 김경락, 이해학) 부인들의 기도>(등록번호 : 444393)도 눈여겨볼 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