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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우자동차 노조민주화 및 임금인상 투쟁

1983년 말 유화국면이 도래하면서 사회운동이 전반적으로 활성화 되었고 극심하게 침체되었던 노동운동도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1984년 3월 민주노조운동 출신 노동자 활동가들이 학생출신 노동자들과 결합해 한국노동자복지협의회(노협)를 결성하고 무기력한 한국노총을 대신해 노동자들의 투쟁을 지지, 지원하고 노동법개정 청원운동을 대대적으로 벌였다. 또한 학생운동 출신들의 노동현장 투신이 광범위하게 이루어졌으며, 그동안 억눌려있었던 노동자들의 생활상의 권리보장을 요구하는 노동쟁의, 민주노조 건설, 어용노조 민주화투쟁이 급증했다. 이처럼 노동운동이 활발해지자 전두환 정권은 1984년 하반기부터 노동운동을 가혹하게 탄압했다. 그러나 1985년 들어 노동운동은 더욱 고조되어 1985년의 노동쟁의는 모두 265건으로 전년에 비해 120%나 증가했다. 참가자 수와 노동손실일수도 두 배 내지 세 배 이상 늘어났으며 그 양상도 매우 격렬했다. 특히 1985년 4월 대우자동차 파업투쟁은 삼엄한 탄압국면에서 학생출신 노동자들이 현장 노동자들과 결합해 공개적인 투쟁을 이끌고 국내 굴지의 재벌기업을 굴복시킨 엄청난 사건이었다.

대우자동차는 1984년 당시 종업원 7,200여 명 규모의 국내 굴지의 재벌기업으로 145억원이라는 창업 이래 최대의 순이익을 올린 상황이었다. 그러나 열악한 노동조건과 차별대우 때문에 노동자들의 불만이 많았다. 1980년에 비해 노동생산성은 3.6배 올랐지만 실질임금은 1.4배 인상에 그쳤고, 불황을 핑계로 상여금이나 연장노동시간에 대한 임금을 제대로 주지 않았다. 또한 생산직에 대해서는 통근버스를 타지 못하게 했고, 월차휴가도 주지 않는 등 인간적 차별이 공공연하게 이루어졌다. 이러한 상태에서 서울대 송경평 등 학생출신 노동자들은 문제해결을 위해 앞장서서 공개적인 활동을 벌이기 시작했다. 노동자들은 미온적인 노조집행부를 제치고 공청회, 집회 등을 개최하는 등 독자적인 활동을 전개했다.

마침내 송경평 등 학생출신을 비롯한 일부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1984년 12월 24일‘노동조합 정상화 추진위원회’가 발족되었다. 추진위원회는 ??근로자의 함성??이라는 소식지를 제작해 현장에 배포하는 등 일반 조합원들의 지지를 얻어 나갔다. 1985년 임금인상 시기가 다가오자 노동조합정상화추진위원회는 ??근로자의 함성?? 7호를 통해 24.9% 임금 인상안을 제시하면서 노조 집행부를 압박하였다. 회사 측은 계속 임금교섭을 연기하였고 노조집행부는 소극적 태도를 보였다. 우여곡절 끝에 4월 15일 재개된 협상에서 회사가 내세운 임금안은 임금 5.7% 인상 및 제 수당 5% 인상에 불과했다. 노동자들은 4월 16일 파업에 돌입했다. 16일부터 부평공장에서 시작된 파업은 인천공장, 부산공장으로 확산되었다. 노동자들은 4월 19일 기술센터를 장악하고, 공권력 투입에 대비하여 각목 등으로 무장하고 철야농성에 돌입했다. 경찰과 회사 측의 위협이 가중되는 속에서 4월 21일, 22일 교섭이 결렬되었다. 그 다음날인 4월 23일 노동자 대표 홍영표가 김우중 회장과 단독협상을 벌였다. 4월 25일 새벽 3시, 파업 열흘 만에 합의가 이루어졌다. 합의내용은 정부의 임금동결 정책을 돌파하고 기본급 등 16.4% 인상, 복지조건의 개선약속 등 노동자의 요구가 대부분 반영되었다.

이로써 10일간의 파업투쟁은 마무리되었다. 이 투쟁은 8명 구속, 1명 해고, 1명 자진 사퇴, 4명 3개월 정직의 희생을 치렀다. 막강한 공권력과 재벌 대기업에 맞서 승리를 거둔 대우자동차 파업투쟁은 당시 노동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 대우자동차 투쟁은 1970년대 중소규모 노동집약적 여성사업장의 투쟁과는 달리 대규모 중공업 남성중심 사업장이 가지는 엄청난 파괴력과 영향력을 보여주었다. 또한 대우자동차 투쟁은 다른 사업장의 투쟁을 촉진시켜 정부와 자본의 임금가이드 라인을 무력화시켰고 노동법 개정논의를 촉발시켰다. 그리고 대우자동차의 학생출신 노동자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을 드러내고 현장 노동자들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으며 투쟁을 주도함으로써 당시의 소그룹운동방식에 큰 충격을 주었다.

주요출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연구소 편, 『한국민주화운동사 연표』 이원보, 『한국노동운동사 - 100년의 기록』 김정남, 『진실, 광장에 서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홈페이지 연대별민주화운동사

사료소개

‘대우자동차’ 조건으로 총275건이 검색되었다. <[대우자동차의 근로기준법 위반사항과 부당한 처사에 관한 진정서][진정인:송경평,피진정인:대우자동차주식회사 대표 최명걸]>(사료번호 : 413225)는 학생출신 노동자 송경평이 예비군 훈련 유급인정 항의를 계기로 탄압을 가하는 회사 측에 맞서 노동부에 보낸 진정서다. 이 투쟁으로 송경평은 공개적인 활동을 전개했으며, 군필복직자들이 투쟁에 동참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대우자동차 대표이사 최명걸을 상대로 노동부에 제출한 진정서 관련 서명날인-확인서]>(사료번호 : 413214)을 비롯하여 사료번호 416149, 347532, 347257 등도 볼 수 있다. <우리의 정당한 권리확보를 위해 끝까지 싸우자>(사료번호 : 348005), <우리 대의원은 현 집행부에 대한 불신임안을 결의한다>(사료번호 : 348771), <[대우자동차 노조 집행부에 대한 불신임 통과 관철을 위한 결의문]>(사료번호 : 413255)은 진정서 투쟁이 회사측과 무기력한 노조 집행부에 대한 항의집회와 시위로 이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노동조합 정상화 추진위원회의 발족에 부쳐>(사료번호 : 347342)는 1984년 12월 24일 ‘노동조합 정상화 추진위원회’의 발족을 알리는 사료다. 노동조합정상화추진위원회가 제작, 현장에 배포한 <근로자의 함성>은 노동조합 정상화 추진위원회의 선전매체로서 현장의 신뢰를 획득하는데 많은 역할을 하였다. 특히 임금인상과 관련한 내용이 담긴 <근로자의 함성 제7호>(사료번호 : 347680)는 노동조합정상화추진위원회와 회사 측, 노조 측의 차이를 명확히 보여준다. 10일간의 파업투쟁을 벌이며 3일에 걸쳐 노동자 대표 홍영표가 김우중 회장과 단독협상으로 이룬 결과는 <합의서[대우자동차노동조합과 회사간 합의서 관련자료]>(사료번호 : 351743)와 <쟁취했다! 임금인상 18.2%! - 대우자동차 임금인상투쟁이 성과 패>(사료번호 : 409979)에 나타나 있다. <신변보장에 대한 각서>(사료번호 : 349046)는 협상 완료 후 신변보장을 위해 최대한 노력할 것을 약속하는 김우중 회장 명의의 각서다.

대우자동차 노조민주화 및 임금인상 투쟁

1983년 말 유화국면이 도래하면서 사회운동이 전반적으로 활성화 되었고 극심하게 침체되었던 노동운동도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1984년 3월 민주노조운동 출신 노동자 활동가들이 학생출신 노동자들과 결합해 한국노동자복지협의회(노협)를 결성하고 무기력한 한국노총을 대신해 노동자들의 투쟁을 지지, 지원하고 노동법개정 청원운동을 대대적으로 벌였다. 또한 학생운동 출신들의 노동현장 투신이 광범위하게 이루어졌으며, 그동안 억눌려있었던 노동자들의 생활상의 권리보장을 요구하는 노동쟁의, 민주노조 건설, 어용노조 민주화투쟁이 급증했다. 이처럼 노동운동이 활발해지자 전두환 정권은 1984년 하반기부터 노동운동을 가혹하게 탄압했다. 그러나 1985년 들어 노동운동은 더욱 고조되어 1985년의 노동쟁의는 모두 265건으로 전년에 비해 120%나 증가했다. 참가자 수와 노동손실일수도 두 배 내지 세 배 이상 늘어났으며 그 양상도 매우 격렬했다. 특히 1985년 4월 대우자동차 파업투쟁은 삼엄한 탄압국면에서 학생출신 노동자들이 현장 노동자들과 결합해 공개적인 투쟁을 이끌고 국내 굴지의 재벌기업을 굴복시킨 엄청난 사건이었다.

대우자동차는 1984년 당시 종업원 7,200여 명 규모의 국내 굴지의 재벌기업으로 145억원이라는 창업 이래 최대의 순이익을 올린 상황이었다. 그러나 열악한 노동조건과 차별대우 때문에 노동자들의 불만이 많았다. 1980년에 비해 노동생산성은 3.6배 올랐지만 실질임금은 1.4배 인상에 그쳤고, 불황을 핑계로 상여금이나 연장노동시간에 대한 임금을 제대로 주지 않았다. 또한 생산직에 대해서는 통근버스를 타지 못하게 했고, 월차휴가도 주지 않는 등 인간적 차별이 공공연하게 이루어졌다. 이러한 상태에서 서울대 송경평 등 학생출신 노동자들은 문제해결을 위해 앞장서서 공개적인 활동을 벌이기 시작했다. 노동자들은 미온적인 노조집행부를 제치고 공청회, 집회 등을 개최하는 등 독자적인 활동을 전개했다.

마침내 송경평 등 학생출신을 비롯한 일부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1984년 12월 24일‘노동조합 정상화 추진위원회’가 발족되었다. 추진위원회는 ??근로자의 함성??이라는 소식지를 제작해 현장에 배포하는 등 일반 조합원들의 지지를 얻어 나갔다. 1985년 임금인상 시기가 다가오자 노동조합정상화추진위원회는 ??근로자의 함성?? 7호를 통해 24.9% 임금 인상안을 제시하면서 노조 집행부를 압박하였다. 회사 측은 계속 임금교섭을 연기하였고 노조집행부는 소극적 태도를 보였다. 우여곡절 끝에 4월 15일 재개된 협상에서 회사가 내세운 임금안은 임금 5.7% 인상 및 제 수당 5% 인상에 불과했다. 노동자들은 4월 16일 파업에 돌입했다. 16일부터 부평공장에서 시작된 파업은 인천공장, 부산공장으로 확산되었다. 노동자들은 4월 19일 기술센터를 장악하고, 공권력 투입에 대비하여 각목 등으로 무장하고 철야농성에 돌입했다. 경찰과 회사 측의 위협이 가중되는 속에서 4월 21일, 22일 교섭이 결렬되었다. 그 다음날인 4월 23일 노동자 대표 홍영표가 김우중 회장과 단독협상을 벌였다. 4월 25일 새벽 3시, 파업 열흘 만에 합의가 이루어졌다. 합의내용은 정부의 임금동결 정책을 돌파하고 기본급 등 16.4% 인상, 복지조건의 개선약속 등 노동자의 요구가 대부분 반영되었다.

이로써 10일간의 파업투쟁은 마무리되었다. 이 투쟁은 8명 구속, 1명 해고, 1명 자진 사퇴, 4명 3개월 정직의 희생을 치렀다. 막강한 공권력과 재벌 대기업에 맞서 승리를 거둔 대우자동차 파업투쟁은 당시 노동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 대우자동차 투쟁은 1970년대 중소규모 노동집약적 여성사업장의 투쟁과는 달리 대규모 중공업 남성중심 사업장이 가지는 엄청난 파괴력과 영향력을 보여주었다. 또한 대우자동차 투쟁은 다른 사업장의 투쟁을 촉진시켜 정부와 자본의 임금가이드 라인을 무력화시켰고 노동법 개정논의를 촉발시켰다. 그리고 대우자동차의 학생출신 노동자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을 드러내고 현장 노동자들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으며 투쟁을 주도함으로써 당시의 소그룹운동방식에 큰 충격을 주었다.

주요출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연구소 편, 『한국민주화운동사 연표』 이원보, 『한국노동운동사 - 100년의 기록』 김정남, 『진실, 광장에 서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홈페이지 연대별민주화운동사

사료소개

‘대우자동차’ 조건으로 총275건이 검색되었다. <[대우자동차의 근로기준법 위반사항과 부당한 처사에 관한 진정서][진정인:송경평,피진정인:대우자동차주식회사 대표 최명걸]>(사료번호 : 413225)는 학생출신 노동자 송경평이 예비군 훈련 유급인정 항의를 계기로 탄압을 가하는 회사 측에 맞서 노동부에 보낸 진정서다. 이 투쟁으로 송경평은 공개적인 활동을 전개했으며, 군필복직자들이 투쟁에 동참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대우자동차 대표이사 최명걸을 상대로 노동부에 제출한 진정서 관련 서명날인-확인서]>(사료번호 : 413214)을 비롯하여 사료번호 416149, 347532, 347257 등도 볼 수 있다. <우리의 정당한 권리확보를 위해 끝까지 싸우자>(사료번호 : 348005), <우리 대의원은 현 집행부에 대한 불신임안을 결의한다>(사료번호 : 348771), <[대우자동차 노조 집행부에 대한 불신임 통과 관철을 위한 결의문]>(사료번호 : 413255)은 진정서 투쟁이 회사측과 무기력한 노조 집행부에 대한 항의집회와 시위로 이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노동조합 정상화 추진위원회의 발족에 부쳐>(사료번호 : 347342)는 1984년 12월 24일 ‘노동조합 정상화 추진위원회’의 발족을 알리는 사료다. 노동조합정상화추진위원회가 제작, 현장에 배포한 <근로자의 함성>은 노동조합 정상화 추진위원회의 선전매체로서 현장의 신뢰를 획득하는데 많은 역할을 하였다. 특히 임금인상과 관련한 내용이 담긴 <근로자의 함성 제7호>(사료번호 : 347680)는 노동조합정상화추진위원회와 회사 측, 노조 측의 차이를 명확히 보여준다. 10일간의 파업투쟁을 벌이며 3일에 걸쳐 노동자 대표 홍영표가 김우중 회장과 단독협상으로 이룬 결과는 <합의서[대우자동차노동조합과 회사간 합의서 관련자료]>(사료번호 : 351743)와 <쟁취했다! 임금인상 18.2%! - 대우자동차 임금인상투쟁이 성과 패>(사료번호 : 409979)에 나타나 있다. <신변보장에 대한 각서>(사료번호 : 349046)는 협상 완료 후 신변보장을 위해 최대한 노력할 것을 약속하는 김우중 회장 명의의 각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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