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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3일시위

1964년 3월 한일회담이 본격화되었다. 그러나 식민지 지배에 대한 배상으로서의 청구권 문제가 무상 3억 달러, 유상 2억 달러, 민간상업차관 1억 달러의 경제협력자금으로 변질된 소위 김종필 오히라 메모가 세상에 알려지면서 온 국민이 굴욕적인 한일회담에 반대하여 거리로 나왔다. 한일회담반대투쟁은 64년 6월 3일 절정에 달했다. 전국에서 대학생을 비롯한 1만2천여 명의 시민이 거리로 나와 정권퇴진을 요구하였고, 이 시위는 4.19 이후 최대의 시위가 되었다. 이에 박정권은 계엄을 선포하고 군대를 동원하여 시위를 진압하였다. 이른바 ‘6·3사태’ 또는 ‘6·3항쟁’이다.

6월 3일, 서울 18개 대학 1만5천여 명 등 총 3만 명의 학생과 시민이 “박 정권 타도”를 외치며 경찰 저지선을 뚫고 광화문까지 진출, 청와대 외곽의 방위선을 돌파함으로써 한일협정반대운동은 절정에 달했다. 그들은 격렬한 시위를 벌이고 국회의사당을 점령하기까지 했다. 단식 중이던 문리대생들이 거리에 나섰고, 서울대 농대생들은 수원에서부터 상경투쟁을 벌였다. 고려대생 연세대생 홍익대생들이 국회의사강 앞까지 나왔으며, 성균관대 동국대 중앙대 숭실대 학생들도 시내로 진출했고, 흰 가운을 입은 서울대 의대생도 시청앞에서 시위를 벌였다. 오후에 세종로 시민회관(현 세종문화회관) 앞의 경찰저지선에서 대치한 학생 시민들은 1만여 명이나 되었다. 시위대는 제4저지선인 조달청 앞까지 진출해 경찰과 맞서며 격렬히 시위했다. 광주와 대전에서도 학생 시위가 있었다. 밤 9시 50분 박대통령은 미국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으며 서울시 일원에 밤 8시로 소급해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민정이양을 앞두고 계엄을 해제한 지 1년 6개월 만에 다시금 기본적 자유가 제한되었고 계엄사령부는 영장 없이 압수 수색 및 체포 구금할 수 있게 되었다. 이들은 4개 사단 병력을 시내에 투입하여 3개월가량 계속되던 시위를 진압하였다. 박정희 대통령이 비상계엄령이라는 초강경조치를 취한 것은 여러 가지 목적이 있어서였다. 여당인 공화당 내분을 잠재우고 부정부패 정권이라는 비난을 차단하기 위한 점도 있었지만, 학원과 언론에 재갈을 물리기 위해서는 극약처분이 필요하다고 본 것이다. 이날의 비상계엄은 그 후 반대 세력에 대한 탄압에 군대를 동원하는 군사통치 수법의 효시가 되었다.

6월 3일의 시위를 정점으로 한 1964년과 1965년의 한일협정반대운동은 직접적으로는 굴욕적인 한일회담에 반대하는 운동이었지만, 넓게 보면 당시의 정치적·사회경제적 구조 아래 산적해 있던 다양한 국민적 요구가 분출된 공동투쟁이었다. 즉 박정희 정권의 폭정에 대한 항의이자 직접적 생활 문제, 한일회담에 임하는 정부의 굴욕적 태도와 일본의 팽창주의 및 미국의 부당한 개입 등에 반대하는 민족 자주적 운동으로 전개되었다. 그리고 이 운동은 그후 1990년대 초까지 계속되는 학생운동의 기본 패턴을 보여주었다.

주요출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사료관 ,『사료총집 한일협정반대운동 일지 1,2권』,『사료총집 한일협정반대운동 해제색인집』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연구소 편, 『한국민주화운동사연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기획/서중석 저,『한국현대사 60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연구소 편, 『한국민주화운동사 1』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편/ 김기선 저, 『한일회담반대운동』

6월3일시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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