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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계피복노조 노동교실 탄압사건

1970년 11월 13일 전태일의 분신 (상세는 별항 전태일 분신 사건 참조)을 계기로 같은 해 11월 17일 결성된 전국연합노조 청계피복지부는 최초의 민주노조로 노동시간 단축, 임금 인상, 작업환경 개선 등 노동조건 개선 투쟁을 벌이는 한편, 인간다운 삶을 요구하는 노동자들의 투쟁에 적극적으로 공동투쟁하는 민주노조의 상징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러나 전태일의 어머니 이소선이 청계피복노조와 지속적인 관계를 맺고 활동하다 구속되었던 장기표의 공판정에서 항의를 했다는 이유로 1977년 7월 19일 구속되었다. 그리고 평화시장의 노동자들을 교육시키고 피복 노동자들의 권익 옹호를 위한 활동을 해왔던 청계 노동교실을 강제로 폐쇄하였다. 이에 강력히 항의하기 위해 7월 29일 ‘평화시장사건 대책위원회’가 결성되었다. ‘평화시장사건 대책위원회’는 「결의문」을 발표하여 이소선 석방과 노동교실 폐쇄 중지, 노조 탄압 중지 등을 요구하였다. 9월 3일 검찰은 이소선에게 징역 3년을 구형하고, 건물주를 통해 노동교실 사무실 해약을 통고했다. 이에 노동자들은 9월 8일 「결사선언」이라는 격문을 발표하고 어머니 즉각 석방, 폭력 경찰 처단, 노동 탄압 중지와 노동3권 반환 등을 요구하면서 격렬히 투쟁했다. 9월 9일 노동자 200여 명은 노동교실 부근에 모여서 경찰의 제지를 뚫고 노동교실을 점거하고 농성에 돌입했다.

노동자들은 농성을 벌이는 과정에서 기동 경찰과 혈투를 벌였다. 경찰이 교실 입구까지 쳐들어오자 이에 대항하다 민종덕이 3층에서 뛰어내려 척추가 부러지는 중상을 입었고, 신승철은 유리칼로 두 번이나 배를 그어 할복을 기도하였으며, 박해창도 유리조각으로 팔의 동맥을 끊어 방안에는 피가 낭자하였다. 전태일의 여동생 전순옥과 임미경도 투신을 기도했다. 노동자들은 교실을 사수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웠다. ‘9·9결사투쟁’으로 불리는 이 사태로 이소선 석방과 이날의 사태에 대한 어떤 법적 제재도 하지 않겠다는 경찰의 약속을 받고 농성을 풀었으나, 그 즉시 53명 모두 연행되어 5명은 구속, 9명은 구류 15일을 받았다.

청계노조의 목숨을 건 결사 항쟁은 교회에 큰 충격을 주었고, 9월 20일 신구교의 목사와 신부 등 15명의 지도급 인사들은 “9월 9일의 청계천 사건은 현 정권이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존재하며, 어떻게 지탱해나가는가를 백일하에 노정한 사건”이라면서, 정부의 반민중적 노선에 반대하는 범국민적 결의를 단호히 표명하자고 선언했다. 이어 9월 22일에는 기장청년회서울연합회가 주최하는 청계천 근로자를 위한 기도회가 서울제일교회에서 열린 후 철야농성하려는 학생·청년들과 이를 강제해산시키려는 경찰 사이에 충돌이 있었다. 이날 발표된 선언문에서 기독 청년들은 노동자들과 민주화를 위해 투쟁하는 지식인 세력 간의 연대 강화가 절실히 요구된다고 강조하였다. 특히 기구적 배경과 사회적 명망, 재정 능력이 있는 한국 교회는 눌린 자들의 투쟁에 동참하자고 요구하였다.

10월 25일 평화시장노동자인권문제협의회가 결성되었다. 대표위원에 함석헌·윤보선·천관우·지학순·박형규 등 5인을 선출하고, 각계각층의 20명으로 실행위원회를 구성하였다. 11월 1일 성명서를 통하여 ① 이소선 즉각 석방 ② 구속된 5명의 평화시장 노동자 석방 ③ 구타·폭행과 고문 및 위협 중지 ④ 국가보안법 폐지 등을 주장하였다. 또한 고 전태일의 7주기 추도식을 기해 “이제 근로자들은 더 이상 침묵으로만 굴욕을 삼킬 수는 없다. 경제성장의 미명 아래 온갖 비인간적인 수모를 감내해온 근로자들은 더 이상 특권층만을 위한 정치에 인종하지 않을 것이다” 라고 선언하면서, 날로 심해져가는 정부 당국의 노동 탄압은 결과적으로 수많은 지식인·학생·민주인사들로 하여금 노동자들의 아픔에 참여하게 했음을 상기시키고 단결할 것을 천명했다. 이어서 12월 23일 평화시장 노동자를 위한 기도회를 기독교회관 강당에서 개최하고, 600만 노동자는 단결하여 노동자의 인간다운 삶을 가로막는 억압 정치 및 특권 경제 폐지를 위한 투쟁에 궐기할 것을 호소하는 내용의 「한국노동인권헌장」을 채택·발표했다. 하지만 ‘9·9결사투쟁’을 전후한 이소선 구속과 노조지도부의 검거 및 도피로 청계피복노조의 조직력은 약화되었다.

주요출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연구소 편, 『한국민주화운동사연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기획/서중석 저,『한국현대사 60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연구소 편, 『한국민주화운동사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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