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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정당 중앙정치연수원점거농성사건

1985년 하반기 들어 11월 4일 전국학생총연합(전학련)에 의해 미상공회의소 점거농성이 감행되는 등 전국적이고 다발적인 점거농성 투쟁이 전개되었다. 그러한 가운데 1985년 11월 18일 전학련 ‘민중민주정부 수립과 민족자주통일을 위한 투쟁위’ 산하 파쇼헌법철폐투쟁위원회 소속 서울지역 14개 대학생 191명(이중 여학생 56명)이 민정당 중앙정치연수원 본관 건물을 점거하고 6시간 30분 동안 농성을 벌였다. 이들은 “독재 타도”, “미국은 물러가라”등의 구호를 외치며, 내외신 기자회견과 국민 대토론회 개최를 요구하였다. 이들은 "군사독재정권퇴진", "외채도입 중지", "노동운동탄압 중지", "실업자구제책보장"등 20개 요구사항이 담긴 ‘시국선언문’ ‘미국에 보내는 경고장’ ‘신민당에 보내는 공개서한’ ‘군부독재처단 결사투쟁 선언서’ 등의 성명서를 발표하고, 이어 ‘군부독재 타도하자!’ ‘파쇼헌법철폐하라!’ 등 7개의 현수막과 태극기 두장을 건물 벽에 붙였다. 이들은 ‘시국선언문’에서 “현하의 참혹한 조국의 현실은 수천의 민중을 학살하고 등장한 군사독재정권의 폭력과 무능 그리고 부패에 기인한 것이라는 것을 역사 속에서 검증하는 바, 이러한 현실을 극복하기 위한 실험으로써 오늘 군부독재정권 타도의 횃불을 드높인다”라고 천명하고, 이어서 “한민족의 자결권과 민중의 생존권을 담보물로 하여 반민주적 매판군부정권을 지원하는 미행정부의 비도덕적, 이기주의적 작태에 대해서도 항의하는 함성을 드높이는 바이다”라고 하여 군부독재를 지원하는 미국에 대해서도 경고했다. 선언문은 또 제5공화국 헌법을 “유신의 종말로 이어지는 민주화의 전민중적 열기를 군사력으로 짓밟고, 군사계엄의 삼엄한 분위기 속에서 날치기로 통과된 반민주적 헌법”으로 규정하며 그 철폐를 위한 투쟁에 나설 것임을 분명히 했다.

이들은 경찰이 들어오면 석유와 프로판가스 등으로 분신·자폭하겠다고 위협했다. 경찰은 정사복 경찰 12개 중대 2,100여 명과 소방차 8대를 동원하여 옥상에 물을 뿌리며 3차례나 진입을 시도한 끝에 진압에 성공했다. 경찰의 폭력적인 진압 및 연행은 학생들의 완강한 저항을 낳았다. 학생들은 옥상에서 화염병과 각목으로 경찰의 진압에 맞섰고, 결국 경찰의 물리력을 감당하지 못하여 부상자가 발생했으며, 홍익대 김영중은 옥상에서 뛰어내려 허리를 다치기도 했다. 전두환 정권은 이들을 폭력방화사범으로 몰아 전원 구속했다.

군부는 5공화국 헌법제정과 집권, 정치적 경쟁자들에 대한 숙정으로 체제를 정비한 이후 1983년 이후 학원자율화 조치 등 유화국면을 조성하였다. 그럼에도 군사독재정권에 항의하는 시위는 대학가를 중심으로 격렬하게 진행되었는데 그 이유는 광주항쟁에 대한 무력진압으로 집권한 군사독재정권이 정당성을 갖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이후 이러한 정당성을 노동·학원 등에 대한 탄압으로 상쇄시키려 했기 때문이었다.

이 사건은 당시 학생들의 요구사항에서 드러나듯이 전두환 군사독재정권의 퇴진을 요구하는 성격을 갖는다. 이들은 전두환 정권의 대외의존적 경제정책과 노동억압 정책을 비판하였다. 이 사건은 군사독재 정권에 대한 항거일 뿐만 아니라 군사정권에 형식적 정당성을 부여하고 있는 민정당에 대한 항거였으며, 군부독재체제를 뒷받침 하는 정당구조에 대한 항거였다. 학생들은 이 투쟁을 통해 '군부독재를 타도하기 위해서는 그 제도적 안전장치인 파쇼헌법을 철폐하는데 총역량을 결집해야 한다'는 대안을 제시하여 후일 야당과의 연대투쟁을 통한 개헌운동으로 발전했다.

주요출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연구소 편, 『한국민주화운동사연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기획/서중석 저,『한국현대사 60년』 김정남 저,『진실, 광장에 서다』 강신철 외,『80년대 학생운동사 -사상이론과 조직노선을 중심으로 (80-87)』 성공회대 NGO자료실

민정당 중앙정치연수원점거농성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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