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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단지 사건

1960년대 저곡가에 기초한 급속한 경제개발이 진행되면서 농촌 경제는 피폐 상태에 빠졌다. 수많은 농민이 정든 고향을 떠나 무작정 서울로 상경하였다. 1960년대에만 400여만 명, 특히 1966년에서 1970년 사이에는 연평균 60만 명의 농민이 농촌을 떠났다. 이들 이농민들이 도시 변두리에 판자촌을 형성하고, 공장 노동, 일용노동 또는 실업 내지 반실업 상태로 비참한 생활을 영위하면서, 도시 빈민 문제가 심각한 사회적 문제로 대두하기 시작했다.

서울시는 1967년 23만 3천동의 무허가 주택, 127만여 명의 주민을 특별시 밖으로 보낼 계획을 세우고 1968년 광주군 중부면에 인구 50만 명의 위성도시 광주대단지를 건설한다고 발표했다. 이 계획은 소요 예산도 세우지 않은 채, 1971년의 대통령, 국회의원 선거를 의식해 급조한 계획이었다. 용두동, 마장동, 청계천변, 봉천동, 숭인동, 창신동, 역촌동, 상왕십리동, 하왕십리동 등의 판자촌 주민들을 1969년 5월 2일부터 중부면 탄리, 단대리에 실어 날랐다.

철거민들은 상하수도, 전기시설은 물론, 택지도 조성되지 않은 대단지 예정지의 논, 밭, 산비탈에 세워진 천막들에 수용되었다. 막노동으로 하루 생계를 유지하는 철거민들은 생계수단을 잃고 천막에서 굶주려야 했다. 한편, 1971년 4월과 5월에 실시된 선거의 화려한 공약세례로 광주대단지 인구는 3년 사이 20만 명에 달하였다. 인구 급증, 주택건설로 토지 브로커들이 설쳤고 철거민의 택지분양증(딱지)을 사서 일반 전입자에게 고가로 전매함으로서 폭리를 취했다. 그리하여 철거입주자보다 일반입주자가 더 많은 기이한 현상이 나타났다.

국회의원 선거가 끝난 다음날인 5월 26일 서울시는 더 이상의 전매행위를 막겠다는 명분 아래 "전매 입주자는 6월 10일까지 전매입한 땅에 집을 짓지 않으면 땅의 불하를 취소한다"는 통고를 한 데 이어 7월 14일에는 전매입주자에게 분양토지 20평을 평당 8,000-16,000원씩에 불하하며 대금은 일시불로 하되 7월말까지 상환하라는 통고를 하였다. 원래 이 토지는 서울시가 평당 150-400원에 구입한 땅이었다. 통지서 끝에는 "만약 기한 내 납부치 않으면 해약은 물론 법에 의해 6월 이하의 징역이나 30만 원 이하의 벌금을 과하겠다”는 위협적인 단서까지 붙어 있었다. 또한 경기도 당국은 당국대로 토지 취득세 부과통지서를 주민들에게 발부하였다.

1971년 7월 17일 주민들은 ‘광주대단지 토지불하가격 시정대책위원회’(대표 박진하)를 조직하고, ①대지가격을 평단 1,500원 이하로 인하해 줄 것 ②불하가격을 10년간 연부상환토록 해줄 것 ③향후 5년간 각종 세금을 면제해줄 것 ④영세민에게 취로장을 알선하여 구호대책을 세워줄 것 등의 진정서를 내무장관, 서울시장, 경기도지사 등에게 수차 진정을 하였으며 때로는 산발적인 시위로 자신들의 주장을 표명하였다. 당국으로부터 반응이 없자 주민들은 대표 217명을 선출한 뒤 ‘대책위원회’를 ‘투쟁위원회’로 개칭한 다음 8월 10일을 ‘최후 결단의 날’로 택했다. 주민들의 강경한 자세에 서울시는 양 시장과의 직접 면담을 제의했다가 자신들의 제의를 스스로 묵살하였다. 이에 8월 10일 11시, 분노한 5만여 명의 군중들이 성남출장소 앞에 모여 항의했다. 이들은 오후 2시 서울시경 경찰에 맞서 투석전을 전개했으며, 관용차와 경찰차를 불태우고 파출소를 파괴하는 등 6시간 동안 사실상 광주대단지를 장악하였다. 일부 시위대는 박정희 대통령 면담을 요구하며 송파대로까지 진출하였다.

이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양 시장은 오후 5시 주민들에게 ① 전매 입주자의 토지불하 가격은 원 철거이주자와 똑같은 조건으로 평당 최고 2천 원 선으로 낮춰주겠으며, 주민들의 복지를 위해 구호양곡을 방출하고 ② 주민들이 요구한 토지취득세 면세는 경기도 당국과 협의해서 부과를 보류하고 면세의 혜택을 적극 추진하겠으며 ③ 공장을 빨리 가동시켜 실업자를 구제하도록 하겠다는 약속을 하였다. 그리고 주민들은 “시장의 약속이 지켜질 것인지 당분간 관망하겠다”는 뜻을 밝히고 해산함으로써 6시간 동안의 소요는 진정되었다.

이 시위로 주민과 경찰 100여 명이 부상당했고, 22명의 주민이 구속되었다. 1970년대 초 당시의 노동상황을 단적으로 드러내준 세 가지 유형의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하였는데, '노동자 인간선언'과 함께 분신한 전태일 사건이 첫 번째 사건이었고, 노동조합 결성을 저지하려는 기업측에 의해 청부살인을 당한 김진수 사건이 두 번째 사건이었다면, 그 세 번째는 열악한 노동조건으로 하여 한계생존도 어렵게 되거나 혹은 그러한 열악한 노동시장에서도 자신의 노동력을 상품화하지 못한 채 노동예비군을 이루고 있던 대규모 도시빈민들의 삶의 절규라고 할 수 있는 1971년 8월 10일의 광주대단지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광주대단지 사건으로 판자촌 빈민들의 비참한 삶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많은 사람들이 빈민문제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1971년 9월에는 도시선교위원회가 예수교장로회, 기독교장로회, 기독교감리교 등 중요 교단의 성직자들을 중심으로 초교파적 선교기구 수도권도시선교위원회로 확대 개편되었다. 한편, 이 사건은 도시 빈민지역에 대한 당국의 경계심을 자극하였고, 결국 1960년대 말부터 이들 도시 빈민층에 관심을 갖고 빈민지역에서 선교활동을 해오던 성직자들에 대한 당국의 탄압 강화를 초래하는 요인이 되었다.

주요출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연구소 편, 『한국민주화운동사 연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민주화운동관련 사건·단체사전편찬을 위한 기초조사연구보고서』 유시춘 외, 『70·80 실록 민주화운동Ⅰ- 우리 강물이 되어』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홈페이지 연대별민주화운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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