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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ㆍ8월 노동자 대투쟁

6월 민주항쟁의 결과 6·29선언이 발표되었고, 이를 통해 직선제 개헌은 관철되었다. 대내적으로 여권은 민주당 등 제도정치권을 체제내로 끌어들여 선거를 통해 재집권을 실현시키기 위한 유화책을 쓰는 한편 야권은 대권을 향한 양 김씨의 경쟁과 분열이 본격화되었다. 대외적으로 미국은 안정된 친미정권 수립을 기대하였다. 하지만 그런 가운데 정작 어디에도 노동자, 농민, 도시빈민 등 기층 민중들의 생존권 보장을 위한 요구는 거의 반영되지 않았다.

이에 노동자들 자신의 손으로 ‘민주노조 건설’, ‘임금인상’, ‘근로조건 개선’을 요구하는 움직임이 전국적으로 일어났다. 노동조합 결성 움직임은 노동조합 불모지였던 현대그룹에서 먼저 일어났다. 7월 5일 현대엔진 노동자들이 노조 결성에 성공한 데 이어, 7월 16일에는 ‘현대 미포조선노동조합 결성 신고서류 탈취사건’이 발생하였다. 현대가 전 국민적인 지탄을 받는 가운데 파업투쟁은 독점 대기업의 사업장을 중심으로 본격화되었다. 7월 하순 영남권으로 확산된 투쟁은 (주)통일을 중심으로 마산·창원의 대공장을 휩쓸면서, 8월 17·18일 3만여 명이 참여한 울산 현대그룹노조연합(현노협, 의장 권용목)의 가두시위에서 절정을 이루었다. 이후 부산과 거제 등지로 확산된 파업투쟁은 옥포 대우조선 노동자들의 가두시위 과정에서 8월 22일 이석규가 직격 최루탄에 맞아 사망하는 사건으로 확대하였다. 이를 계기로 투쟁은 “이석규를 살려내라”는 투쟁으로 발전했고, ‘이석규 열사 민주국민장’ 당시 노무현, 이상수, 박용수는 ‘장례식방해혐의’라는 희한한 죄목으로 구속되기도 했다. 파업투쟁은 수도권의 중소기업·비제조업 등으로 확산되어 갔다. 하지만 8월 11일 전국경제인연합회의 ‘폭력·파괴·불법 행동 비난’과 ‘공권력 개입 요청’을 계기로 정부의 폭력적 탄압과 ‘제3자 개입, 위장취업, 좌경 용공 색출’ 등의 이데올로기 공세가 강화되었고, ‘구사대’가 사업장에 투입되어 난동을 부렸다. 기업주들은 휴폐업 조치로 대응했고 제도언론은 노동자들의 정당한 투쟁을 왜곡 보도하며 여론을 호도했다. 그리하여 투쟁의 파고는 9월부터 점차 가라앉기 시작했다. 그러나 제조업 노동자들의 투쟁이 소강상태로 빠져든 8월 말부터 운수·광산·사무·판매·서비스·기술직 등 비제조업 노동자들의 파업투쟁이 9월 이후 계속되었다.

7·8월 노동자 대투쟁을 통해 짧은 기간 동안 많은 노동조합이 새로이 조직되어 1987년 12월 말 현재 노동조합수 4,103개(1986년 2,675개), 조합원수 1,267,457명(1986년 1,035,890명)에 이르렀다. 그리고 1987년의 노동쟁의 3,749건 중 3,341건이 7월과 9월 사이에 전개되었다. 하루평균 발생건수가 44건으로 1986년 0.76건의 58배가 증가하였다. 그리고 노동자대투쟁 기간에 발생한 쟁의 중 76%가 중소기업에서 일어났으며, 비합법투쟁이 94.1%를 차지했다. 1987년 7,8월 노동자대투쟁은 한국사회의 공업화, 자본주의화가 본격적으로 진행된 이래 사회변혁의 주체로 등장한 노동자들의 최초의 대규모적이고 폭발적인 진출이었다. 이러한 노동자들의 광범한 대중투쟁은 6월 민주항쟁의 성과에 힘입은 것이자 그 부분적 성과를 노동자들이 주체가 되어 보완, 발전시킨 민주화 투쟁으로서의 성격을 가지며, 노동자대투쟁을 계기로 노동운동은 질적 변화를 이룬다.

주요출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연구소 편, 『한국민주화운동사연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기획/서중석 저,『한국현대사 60년』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편, 『7-8월 노동자대투쟁』 인천기독교민중교육연구소 편, 『‘87 노동자대투쟁』

7ㆍ8월 노동자 대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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