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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년 한일회담반대투쟁

1964년의 한일회담반대투쟁은 5·16 군사쿠데타를 일으켜 4·19혁명 정신을 유린한 박정희 군사정권에 대한 항거였다. 이는 1964년 3월 24일의 학생 시위를 그 시발점으로 하고 6월 3일의 대규모 항쟁에 이르러 정점에 달하였는데, 단계적으로 보면 다음과 같다. 즉 1964년 3월 24일의 고교생을 포함한 대규모 학생 시위로부터 점화되어 4월 17일의 시위를 경과한 초기 투쟁, 5월 20일의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 및 5월 25일의 ‘난국 타개 학생 총궐기대회’와 같이 한일굴욕회담에 대한 반대투쟁이 연합적 성격을 띠면서 본격화되는 시기의 투쟁, 6월 2일과 6월 3일의 격화된 시위와 계엄령 선포로 1964년의 투쟁이 막바지에 이르렀던 결정적 투쟁의 시기로 나눌 수 있다.

미국의 동아시아 지역통합전략에 따라 진행된 당시의 한일회담은 1961년 6월의 케네디·이케다 회담에 이은 11월의 박정희·케네디 회담의 산물로 나타난 것으로서 단순히 한일 간의 현안문제가 아니라 한·미·일 3국간의 관계에서 의제에 오른 문제였다. 그간의 대일 협상 진행 과정을 비밀에 부쳐오던 박정희 정권의 민주공화당은 1964년 2월 22일 당론으로 확정된 한일 교섭안을 발표했다. 이들은 일반 여론의 추세를 무시한 채 3억불의 청구권 보상으로 만족하면서 우리 어민들의 생명선인 평화선을 일본에게 내주기로 작정했다. 1964년 3월 5일 정부와 여당은 연석회의에서 한일회담의 타결·조인·비준을 5월까지 모두 마친다는 방침을 밝혔다.

이에 야당인사 200여 명은 3월 9일 ‘대일굴욕외교반대 범국민투쟁위원회’(의장 윤보선)를 결성하여 구국선언을 채택하고 반대투쟁에 총궐기할 것을 다짐한 후 전국 유세에 들어갔다. 학생들의 반대 시위도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3월 24일 서울대 문리대, 고려대, 연세대 학생들이 5·16 군사쿠데타 이후 최초의 대규모 가두시위(3·24시위)를 벌였다. 특히 서울 문리대의 경우 김중태, 현승일, 김도현 등이 참가한 학내 서클인 민족주의비교연구회(민비연. 상세는 별도 항목 ‘3차 민비연 사건’ 참조)가 모의를 주도했다. 5월 30일 서울대학교 문리대생들이 교정에서 ‘자유쟁취궐기대회’를 열어 한일회담 성토와 박정희 정권 성토식을 한 다음 단식 농성에 들어갔다. 이는 6·3항쟁의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학생회장인 김덕룡은 '오늘의 단식투쟁은 내일의 피의 투쟁이 될 지도 모른다'는 선언문을 낭독하고 단식농성에 들어갔다. 각지의 대학에서는 관을 준비하여 한일협상을 무리하게 추진하려는 박정희, 김종필에 대한 규탄성명과 방정희 정권이 내걸었던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을 열기도 했다(상세는 별항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 및 성토대회’ 참조). 그럼에도 박정희 정권이 한일회담을 계속 추진하자 6월 2일 고려대, 서울대 법대, 서울대 상대생 들이 가두로 진출하여 데모를 주도하고 서울의 각 대학생들이 이에 호응하여 곳곳에서 시위 사태가 벌어졌다.

6월 3일에는 서울 18개 대학 1만5천여 명 등 총 3만 명의 학생과 시민이 “박 정권 타도”를 외치며 경찰 저지선을 뚫고 광화문까지 진출, 청와대 외곽의 방위선을 돌파함으로써 절정에 달했다. 그들은 격렬한 시위를 벌이고 국회의사당을 점령하기까지 했다. 이날 광주 등 지방 대도시에서도 격렬한 시위가 벌어졌으며, 박정희는 같은 날 밤 서울시 전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4개 사단 병력을 시내에 투입하여 3개월가량 계속되던 시위를 진압하였다. (상세는 ‘6·3시위’ 참조) 윤보선, 장택상, 유진오, 장준하 등이 주도한 한일 굴욕외교 반대 투쟁위원회는 학생들의 한일회담 반대투쟁을 지원, 고무, 독려하였는데, 박정희 정부는 인혁당이 한일협정 반대 이슈를 선동하여 배후 조종함으로써 대한민국 정부 전복을 기도한 반란 사건으로 규정했다. 이후 7월 29일 계엄이 해제될 때까지 일체의 옥내외 집회와 시위 금지, 대학의 휴교, 언론·출판·보도의 사전 검열, 영장 없는 압수·수색·체포·구금, 통행금지 시간 연장 등의 조치가 취해져 상당한 인권 침해가 자행되었다. 시위의 주동인물과 배후세력으로 지목된 학생과 정치인, 언론인 등 1,120명이 검거되고 이명박, 이재오, 손학규, 김덕룡, 현승일, 이경우 등 348명은 내란 및 소요죄로 서대문형무소에서 6개월간 복역하게 된다. 서울 시내에 경찰과 계엄군이 투입되어 7월 28일 사태는 진압되었고 이튿날인 29일 계엄령은 해제되었다.

주요출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연구소 편, 『한국민주화운동사연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기획/서중석 저,『한국현대사 60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연구소 편, 『한국민주화운동사 1』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사료관 , 『사료총집 한일협정반대운동 일지 1,2권』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편/ 김기선 저, 『한일회담반대운동』

사료소개

‘한일회담’ 조건으로 총 471건, ‘6·3’ 조건으로 총 219건, ‘민족적민주주의장례식’ 조건으로 총 19건이 검색되었다. 당시의 주요사료로는 당시 시위 참여자이자 민족주의비교연구회(민비연)의 김도현이 기증한 한일굴욕회담반대학생총연합회 명의의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 檄文> (등록번호 : 578373), <弔 反民族的 非民主的 民族的民主主義 葬禮式> (등록번호 : 578390) 와 생산자 미상의 결의문 <일본 예속으로 직행하는 매국적 한일굴욕회담을 전면 중지하라!> (등록번호 : 578372)가 있으며, 6.3동지회가 생산한 <6.3 포럼 창간호> (등록번호 : 161613) 등으로, 문서사료는 많지 않다. 이에 비해 사진사료는 비교적 풍부하며 주로 경향신문사 생산사료들이다. <한일국교정상화회담을 굴욕회담으로 규정, 전국적 반대 운동의 시발점이 된 6.3 운동 당시 모습> (등록번호 : 723198), <한일회담 결사 반대를 외치며 가두시위에 나선 서울대학교 학생들> (등록번호 : 742493), <서울 시내에서 열린 한일회담 반대시위에 참가한 학생들을 연행해가는 경찰들> (등록번호 :742418), <6.3 출옥 학생과의 간담회 장면> (등록번호 : 723151) 등이 있다.

1964년 한일회담반대투쟁

1964년의 한일회담반대투쟁은 5·16 군사쿠데타를 일으켜 4·19혁명 정신을 유린한 박정희 군사정권에 대한 항거였다. 이는 1964년 3월 24일의 학생 시위를 그 시발점으로 하고 6월 3일의 대규모 항쟁에 이르러 정점에 달하였는데, 단계적으로 보면 다음과 같다. 즉 1964년 3월 24일의 고교생을 포함한 대규모 학생 시위로부터 점화되어 4월 17일의 시위를 경과한 초기 투쟁, 5월 20일의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 및 5월 25일의 ‘난국 타개 학생 총궐기대회’와 같이 한일굴욕회담에 대한 반대투쟁이 연합적 성격을 띠면서 본격화되는 시기의 투쟁, 6월 2일과 6월 3일의 격화된 시위와 계엄령 선포로 1964년의 투쟁이 막바지에 이르렀던 결정적 투쟁의 시기로 나눌 수 있다.

미국의 동아시아 지역통합전략에 따라 진행된 당시의 한일회담은 1961년 6월의 케네디·이케다 회담에 이은 11월의 박정희·케네디 회담의 산물로 나타난 것으로서 단순히 한일 간의 현안문제가 아니라 한·미·일 3국간의 관계에서 의제에 오른 문제였다. 그간의 대일 협상 진행 과정을 비밀에 부쳐오던 박정희 정권의 민주공화당은 1964년 2월 22일 당론으로 확정된 한일 교섭안을 발표했다. 이들은 일반 여론의 추세를 무시한 채 3억불의 청구권 보상으로 만족하면서 우리 어민들의 생명선인 평화선을 일본에게 내주기로 작정했다. 1964년 3월 5일 정부와 여당은 연석회의에서 한일회담의 타결·조인·비준을 5월까지 모두 마친다는 방침을 밝혔다.

이에 야당인사 200여 명은 3월 9일 ‘대일굴욕외교반대 범국민투쟁위원회’(의장 윤보선)를 결성하여 구국선언을 채택하고 반대투쟁에 총궐기할 것을 다짐한 후 전국 유세에 들어갔다. 학생들의 반대 시위도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3월 24일 서울대 문리대, 고려대, 연세대 학생들이 5·16 군사쿠데타 이후 최초의 대규모 가두시위(3·24시위)를 벌였다. 특히 서울 문리대의 경우 김중태, 현승일, 김도현 등이 참가한 학내 서클인 민족주의비교연구회(민비연. 상세는 별도 항목 ‘3차 민비연 사건’ 참조)가 모의를 주도했다. 5월 30일 서울대학교 문리대생들이 교정에서 ‘자유쟁취궐기대회’를 열어 한일회담 성토와 박정희 정권 성토식을 한 다음 단식 농성에 들어갔다. 이는 6·3항쟁의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학생회장인 김덕룡은 '오늘의 단식투쟁은 내일의 피의 투쟁이 될 지도 모른다'는 선언문을 낭독하고 단식농성에 들어갔다. 각지의 대학에서는 관을 준비하여 한일협상을 무리하게 추진하려는 박정희, 김종필에 대한 규탄성명과 방정희 정권이 내걸었던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을 열기도 했다(상세는 별항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 및 성토대회’ 참조). 그럼에도 박정희 정권이 한일회담을 계속 추진하자 6월 2일 고려대, 서울대 법대, 서울대 상대생 들이 가두로 진출하여 데모를 주도하고 서울의 각 대학생들이 이에 호응하여 곳곳에서 시위 사태가 벌어졌다.

6월 3일에는 서울 18개 대학 1만5천여 명 등 총 3만 명의 학생과 시민이 “박 정권 타도”를 외치며 경찰 저지선을 뚫고 광화문까지 진출, 청와대 외곽의 방위선을 돌파함으로써 절정에 달했다. 그들은 격렬한 시위를 벌이고 국회의사당을 점령하기까지 했다. 이날 광주 등 지방 대도시에서도 격렬한 시위가 벌어졌으며, 박정희는 같은 날 밤 서울시 전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4개 사단 병력을 시내에 투입하여 3개월가량 계속되던 시위를 진압하였다. (상세는 ‘6·3시위’ 참조) 윤보선, 장택상, 유진오, 장준하 등이 주도한 한일 굴욕외교 반대 투쟁위원회는 학생들의 한일회담 반대투쟁을 지원, 고무, 독려하였는데, 박정희 정부는 인혁당이 한일협정 반대 이슈를 선동하여 배후 조종함으로써 대한민국 정부 전복을 기도한 반란 사건으로 규정했다. 이후 7월 29일 계엄이 해제될 때까지 일체의 옥내외 집회와 시위 금지, 대학의 휴교, 언론·출판·보도의 사전 검열, 영장 없는 압수·수색·체포·구금, 통행금지 시간 연장 등의 조치가 취해져 상당한 인권 침해가 자행되었다. 시위의 주동인물과 배후세력으로 지목된 학생과 정치인, 언론인 등 1,120명이 검거되고 이명박, 이재오, 손학규, 김덕룡, 현승일, 이경우 등 348명은 내란 및 소요죄로 서대문형무소에서 6개월간 복역하게 된다. 서울 시내에 경찰과 계엄군이 투입되어 7월 28일 사태는 진압되었고 이튿날인 29일 계엄령은 해제되었다.

주요출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연구소 편, 『한국민주화운동사연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기획/서중석 저,『한국현대사 60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연구소 편, 『한국민주화운동사 1』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사료관 , 『사료총집 한일협정반대운동 일지 1,2권』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편/ 김기선 저, 『한일회담반대운동』

사료소개

‘한일회담’ 조건으로 총 471건, ‘6·3’ 조건으로 총 219건, ‘민족적민주주의장례식’ 조건으로 총 19건이 검색되었다. 당시의 주요사료로는 당시 시위 참여자이자 민족주의비교연구회(민비연)의 김도현이 기증한 한일굴욕회담반대학생총연합회 명의의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 檄文> (등록번호 : 578373), <弔 反民族的 非民主的 民族的民主主義 葬禮式> (등록번호 : 578390) 와 생산자 미상의 결의문 <일본 예속으로 직행하는 매국적 한일굴욕회담을 전면 중지하라!> (등록번호 : 578372)가 있으며, 6.3동지회가 생산한 <6.3 포럼 창간호> (등록번호 : 161613) 등으로, 문서사료는 많지 않다. 이에 비해 사진사료는 비교적 풍부하며 주로 경향신문사 생산사료들이다. <한일국교정상화회담을 굴욕회담으로 규정, 전국적 반대 운동의 시발점이 된 6.3 운동 당시 모습> (등록번호 : 723198), <한일회담 결사 반대를 외치며 가두시위에 나선 서울대학교 학생들> (등록번호 : 742493), <서울 시내에서 열린 한일회담 반대시위에 참가한 학생들을 연행해가는 경찰들> (등록번호 :742418), <6.3 출옥 학생과의 간담회 장면> (등록번호 : 723151)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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