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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실천문인협의회문학인 101선언

1974년 11월 15일 고은·신경림·백낙청·염무웅·조태일·이문구·박태순·황석영 등이 모임을 갖고, 11월 18일에 광화문 네거리 종각 앞에서 시위를 하면서 선언문을 발표할 것을 결정했다. 선언문은 염무웅이 작성하였고 이틀 만에 무려 101명의 서명을 받아냈다. 문인들의 조직적이고 대표적인 유신반대 민주화투쟁이었다. 1972년 10월유신 다음해인 1973년 12월 24일 백범사상연구소가 개최한 ‘민족문학의 밤’에서 ‘개헌청원100만인서명운동’이 시작되었으며, 1974년 1월 7일에는 ‘문인 61인 개헌지지성명’이 발표되었다. 그런데 개헌지지성명을 발표한 61인이 전원 연행되어 조사를 받으며 이른바 문인간첩단사건이 조작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문인들은 한국 문단과 사회에 새로운 풍토를 조성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문학단체의 결성이 필요하다고 보고 선언문의 주체로 자유실천문인협의회(자실)를 결성했다. 대표간사에 시인 고은이, 상임간사로 신경림·염무웅·박태순·황석영·조해일이 임명됐다. 모임을 마친 뒤 “우리는 중단하지 않는다”, “시인 석방하라”는 플래카드를 제작했다. 11월 18일 오전 10시 무렵에 자유실천문인협의회 인사 30여 명이 광화문 문인협회 사무실 앞에서 ‘문학인 101인 선언’을 낭독했다.

이들은 선언문에서 “오늘날 우리 현실은 민족사적으로 일대 위기를 맞이하고 있다. 사회 도처에서 불신과 부정부패가 만연하여 정직하고 근면한 사람은 살기 어렵고, 거짓과 아첨에 능한 사람은 살기 편하게 되어 있으며, 왜곡된 근대화 정책의 무리한 강행으로 인하여 권력과 금력에서 소외된 대다수 민중들은 기초적인 생존마저 안심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이러한 모순과 부조리는 반드시 극복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몇몇 정치가의 독단적인 결정에 맡겨질 일이 아니라 전국민적인 지혜와 용기에 의해서만 가능한 일이라 믿고, 이에 우리 뜻있는 문학인 일동은 우리의 순수한 문학적 양심과 떳떳한 인간적 이성에 입각하여 다음과 같은 주장을 결의, 선언하는 바이며, 이러한 우리의 주장이 실현되는 것만이 국민총화와 민족 안보에 이르는 길”이라고 선언하였다. 결의문의 내용은 ① 김지하를 비롯한 긴급조치 구속 인사 석방 ②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 보장 ③ 서민 대중의 생존권 보장을 위한 획기적인 조치 및 현행 노동관계법 개정 ④ 자유민주주의 정신과 절차에 따른 새로운 헌법 마련 ⑤ 우리의 주장은 문학자적 순수성의 발로이며 어떠한 탄압 속에서도 계속될 진실한 외침이라는 것 등 5개 항이었다.

종로경찰서는 주모자급 7명을 연행한 후 시위를 해산시켰다. 이에 한남철·황석영 등은 문인협회 사무실을 점거하고 “연행 문인 석방하라”며 농성에 들어갔다. 자유실천문인협의회는 이후로 1970년대 내내 김지하, 양성우 등 구속 문인 석방 투쟁과 YH 사건(별도 항목 참조) 등 시국 현안에 대한 성명을 통해 실천적인 문학운동의 중심축으로 나섰으며, 1987년 6월항쟁(별도 항목 참조)이 일어난 뒤 독재 타도뿐 아니라 내실 있는 문예운동을 하자는 내부의 요구에 따라 민족문학작가회의(별도 항목 참조. 현재의 한국작가회의 전신)로 확대·개편되었다.

자유실천문인협의회문학인  101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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