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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 결성

1980년 초 전두환 정권의 강경탄압으로 극심한 피해를 입은 민주화운동권은 패배의 수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다만 학생들만이 정면으로 외로운 투쟁을 전개하고 있었다. 학생들의 처절한 투쟁은 많은 사람들에게 힘과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무엇보다 먼저 1970년대 말 민주청년인권협의회(민청협) 활동가들을 비롯하여 과거 학생운동에 투신했다가 1980년 5.17조치로 학원에서 쫓겨났거나 혹은 졸업한 학생운동 선배들이 새롭게 운동의 전열을 다듬기 시작했다. 이들은 1982년 여름부터 논의를 거듭하였고, 1983년 상반기에 들어서면서 새로운 공개적인 청년단체가 필요하다는 데 대체적으로 합의하였다. 1983년 9월 30일,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이 선명한 정치투쟁의 기치를 들고 결성되었다.

민청련은 조직의 상징물로 두꺼비를 내세웠다. 이는 뱀에게 잡아먹힘으로써 마침내 뱀을 죽이고 그 속에서 살아남는 두꺼비를 통해 처절한 투쟁의지를 표현한 것이었다. 또한 민청련은 전두환 정권의 탄압에서 조직을 지켜내기 위해 반공개 조직형태의 각 대학별·학번별 모임으로 구성되었다. 85년 전두환 정권의 대대적인 탄압에도 민청련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조직 구조 덕분이었다. 민청련이 출범하면서 5.17 이후 거의 와해되다시피 했던 민주화운동권은 다시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5·17 이후 침묵하던 재야 원로들도 다시 민주화운동에 속속 복귀했다. 조용히 숨죽이고 있던 각 부문운동 단체들도 내부전열을 가다듬고 활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1984년 6월 말 민청련은 이를 기반으로 각 부문운동을 아우르는 광범한 민주화운동 전선체인 민중민주운동협의회를 추동해냈다. 민주화운동 전선의 재정비는 1984년 3월 민중민주운동협의회와 민주통일국민회의가 통합된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이 결성됨으로써 일단 마무리되었다. 민청련은 이 과정에서 실천과 이론 양 면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민청련은 출범과 함께 투쟁성 회복, 청년 내부 역량 체계화, 다른 민주화운동 세력과의 굳건한 연대, 대중운동에의 참여와 지원, 운동방향 모색과 방법 개발을 위한 조사 및 연구 활동을 과제로 설정했다. 1984년 5월 19일에는 광주항쟁 희생자 추도식을 공개적으로 거행했고, 1984년 3월부터는 기관지 󰡔민주화의 길󰡕(1~19호), 󰡔민중신문󰡕 등의 간행물을 발행하며, 민중운동의 방향 제시, 정세 분석, 관제 언론에 대한 대항 선전 폭로 등의 활동을 했다. 민청련은 반독재투쟁에 앞장섰으며 노동현장의 노동자 지원투쟁, 각종 정치적 사안에 대한 대국민 선전활동, 구속을 각오한 가두시위를 벌였다. 전두환 정권은 1985년 2·12 총선에서 실패하자 학생운동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과 함께, 학생운동과 다른 민주 세력의 연결고리로 민청련을 지목하여 집중적인 탄압을 가했다. 민청련에 대한 탄압은 서울대 학생조직 민주화추진위원회(민추위) 사건(소위 깃발 사건) 관련자들에게 고문을 가하여 민청련을 그 배후로 조작해내면서 본격화되었다. 전두환 정권은 1985년 9월 김근태·이을호 등 민청련 간부들을 대대적으로 검거하고 민청련 의장 김근태를 공산주의자로 조작하기 위해 살인적인 고문을 가했다. 그러나 김근태에게 가한 살인적인 고문의 진상이 알려지면서 정권의 의도는 수포로 돌아갔다.

6월항쟁을 거치면서 민청련은 조직적으로 크게 발전하였다. 1987년 10월 동서울과 북서울 민청련이 결성되었고, 1988년 3월에는 안양, 1990년에는 수원, 중서울 민청련이 결성되었다. 민청련 회원이 대중적으로 확산되면서 민청련의 성격도 초기의 선진적 활동가 위주의 조직에서 청년 대중조직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한편 6월항쟁 이후 대중운동이 발전하면서 전국적으로 대중적인 청년단체들이 자생적으로 생겨나기 시작했다. 1988년 9월 나라사랑청년회를 필두로 부산, 광주, 대전 등에서 청년단체들이 결성됨에 따라 전국적인 청년단체들의 연대가 모색되었다. 그 결과 1989년 1월 19일 민청련이 중심이 되어 전국청년단체대표자협의회(전청대협)가 창립되었다. 1992년 2월 23일 전청대협이 한국민주청년단체협의회로 개편되었고, 민청련은 발전적 해체를 하였다.

주요출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연구소 편, 『한국민주화운동사 연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민주화운동관련 사건·단체사전편찬을 위한 기초조사 연구보고서』 김정남, 『진실, 광장에 서다』 유시춘 외, 『70·80 실록 민주화운동Ⅰ- 우리 강물이 되어』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홈페이지 연대별민주화운동사

사료소개

‘민청련’ 조건으로 143건, ‘민주화운동청년연합’ 조건으로 949 건이 검색되었다. 민청련은 <발기문[우리는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지 않은가]>(사료번호 : 122096)를 통해 “민족의 존립 자체가 위협받고 있는 오늘의 현실 상황은, 뿔뿔이 흩어진 민주 청년들이 다시 한데 모여 민중운동의 흐름 속에서 양심적인 지식인·종교인·정치인·노동자·농민들과의 연대를 강화하면서,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새로운 사회 건설에 온몸으로 매진할 것을 강력하게 요구하고 있다”고 선언하였다. 민주화운동 현장의 최전선에서 적극적으로 투쟁한 민청련이 생산한 자료들은 어느 하나 뺄 것 없이 당시 민주화운동의 중요 사건, 중요 투쟁현장과 긴밀하게 관계된 중요한 사료들로, 이 사료들을 생산연도별로 살펴보면 당시의 살인적인 탄압과 민주화운동사의 흐름을 일별할 수 있을 정도다. 또한 민청련 기관지 『민주화의 길』과 『민중신문』은 활동가들에게는 운동의 이론과 지침을 전달해 주었고 대중에게는 민주화운동에 대한 각종 소식과 전두환 정권의 잔혹한 탄압상을 알려주었다. 민청련에 대한 탄압과 관련해서는 <성명서[민주화운동청년연합 결성인들 불법연행 관련]>(사료번호 : 94451) 등을 비롯하여 다수가 있으며, 김근태 민청련 의장에 대한 살인적 고문을 고발하는 <민청련 탄압사건 백서-무릎꿇고 살기보다 서서 싸우길 원한다>(등록번호 : 311511) 등이 있다.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 결성

1980년 초 전두환 정권의 강경탄압으로 극심한 피해를 입은 민주화운동권은 패배의 수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다만 학생들만이 정면으로 외로운 투쟁을 전개하고 있었다. 학생들의 처절한 투쟁은 많은 사람들에게 힘과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무엇보다 먼저 1970년대 말 민주청년인권협의회(민청협) 활동가들을 비롯하여 과거 학생운동에 투신했다가 1980년 5.17조치로 학원에서 쫓겨났거나 혹은 졸업한 학생운동 선배들이 새롭게 운동의 전열을 다듬기 시작했다. 이들은 1982년 여름부터 논의를 거듭하였고, 1983년 상반기에 들어서면서 새로운 공개적인 청년단체가 필요하다는 데 대체적으로 합의하였다. 1983년 9월 30일,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이 선명한 정치투쟁의 기치를 들고 결성되었다.

민청련은 조직의 상징물로 두꺼비를 내세웠다. 이는 뱀에게 잡아먹힘으로써 마침내 뱀을 죽이고 그 속에서 살아남는 두꺼비를 통해 처절한 투쟁의지를 표현한 것이었다. 또한 민청련은 전두환 정권의 탄압에서 조직을 지켜내기 위해 반공개 조직형태의 각 대학별·학번별 모임으로 구성되었다. 85년 전두환 정권의 대대적인 탄압에도 민청련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조직 구조 덕분이었다. 민청련이 출범하면서 5.17 이후 거의 와해되다시피 했던 민주화운동권은 다시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5·17 이후 침묵하던 재야 원로들도 다시 민주화운동에 속속 복귀했다. 조용히 숨죽이고 있던 각 부문운동 단체들도 내부전열을 가다듬고 활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1984년 6월 말 민청련은 이를 기반으로 각 부문운동을 아우르는 광범한 민주화운동 전선체인 민중민주운동협의회를 추동해냈다. 민주화운동 전선의 재정비는 1984년 3월 민중민주운동협의회와 민주통일국민회의가 통합된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이 결성됨으로써 일단 마무리되었다. 민청련은 이 과정에서 실천과 이론 양 면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민청련은 출범과 함께 투쟁성 회복, 청년 내부 역량 체계화, 다른 민주화운동 세력과의 굳건한 연대, 대중운동에의 참여와 지원, 운동방향 모색과 방법 개발을 위한 조사 및 연구 활동을 과제로 설정했다. 1984년 5월 19일에는 광주항쟁 희생자 추도식을 공개적으로 거행했고, 1984년 3월부터는 기관지 󰡔민주화의 길󰡕(1~19호), 󰡔민중신문󰡕 등의 간행물을 발행하며, 민중운동의 방향 제시, 정세 분석, 관제 언론에 대한 대항 선전 폭로 등의 활동을 했다. 민청련은 반독재투쟁에 앞장섰으며 노동현장의 노동자 지원투쟁, 각종 정치적 사안에 대한 대국민 선전활동, 구속을 각오한 가두시위를 벌였다. 전두환 정권은 1985년 2·12 총선에서 실패하자 학생운동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과 함께, 학생운동과 다른 민주 세력의 연결고리로 민청련을 지목하여 집중적인 탄압을 가했다. 민청련에 대한 탄압은 서울대 학생조직 민주화추진위원회(민추위) 사건(소위 깃발 사건) 관련자들에게 고문을 가하여 민청련을 그 배후로 조작해내면서 본격화되었다. 전두환 정권은 1985년 9월 김근태·이을호 등 민청련 간부들을 대대적으로 검거하고 민청련 의장 김근태를 공산주의자로 조작하기 위해 살인적인 고문을 가했다. 그러나 김근태에게 가한 살인적인 고문의 진상이 알려지면서 정권의 의도는 수포로 돌아갔다.

6월항쟁을 거치면서 민청련은 조직적으로 크게 발전하였다. 1987년 10월 동서울과 북서울 민청련이 결성되었고, 1988년 3월에는 안양, 1990년에는 수원, 중서울 민청련이 결성되었다. 민청련 회원이 대중적으로 확산되면서 민청련의 성격도 초기의 선진적 활동가 위주의 조직에서 청년 대중조직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한편 6월항쟁 이후 대중운동이 발전하면서 전국적으로 대중적인 청년단체들이 자생적으로 생겨나기 시작했다. 1988년 9월 나라사랑청년회를 필두로 부산, 광주, 대전 등에서 청년단체들이 결성됨에 따라 전국적인 청년단체들의 연대가 모색되었다. 그 결과 1989년 1월 19일 민청련이 중심이 되어 전국청년단체대표자협의회(전청대협)가 창립되었다. 1992년 2월 23일 전청대협이 한국민주청년단체협의회로 개편되었고, 민청련은 발전적 해체를 하였다.

주요출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연구소 편, 『한국민주화운동사 연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민주화운동관련 사건·단체사전편찬을 위한 기초조사 연구보고서』 김정남, 『진실, 광장에 서다』 유시춘 외, 『70·80 실록 민주화운동Ⅰ- 우리 강물이 되어』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홈페이지 연대별민주화운동사

사료소개

‘민청련’ 조건으로 143건, ‘민주화운동청년연합’ 조건으로 949 건이 검색되었다. 민청련은 <발기문[우리는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지 않은가]>(사료번호 : 122096)를 통해 “민족의 존립 자체가 위협받고 있는 오늘의 현실 상황은, 뿔뿔이 흩어진 민주 청년들이 다시 한데 모여 민중운동의 흐름 속에서 양심적인 지식인·종교인·정치인·노동자·농민들과의 연대를 강화하면서,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새로운 사회 건설에 온몸으로 매진할 것을 강력하게 요구하고 있다”고 선언하였다. 민주화운동 현장의 최전선에서 적극적으로 투쟁한 민청련이 생산한 자료들은 어느 하나 뺄 것 없이 당시 민주화운동의 중요 사건, 중요 투쟁현장과 긴밀하게 관계된 중요한 사료들로, 이 사료들을 생산연도별로 살펴보면 당시의 살인적인 탄압과 민주화운동사의 흐름을 일별할 수 있을 정도다. 또한 민청련 기관지 『민주화의 길』과 『민중신문』은 활동가들에게는 운동의 이론과 지침을 전달해 주었고 대중에게는 민주화운동에 대한 각종 소식과 전두환 정권의 잔혹한 탄압상을 알려주었다. 민청련에 대한 탄압과 관련해서는 <성명서[민주화운동청년연합 결성인들 불법연행 관련]>(사료번호 : 94451) 등을 비롯하여 다수가 있으며, 김근태 민청련 의장에 대한 살인적 고문을 고발하는 <민청련 탄압사건 백서-무릎꿇고 살기보다 서서 싸우길 원한다>(등록번호 : 311511)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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