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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 결성

1986년에 학생운동은 건대사건 (‘전국반외세반독재애국학생투쟁연합 결성식 및 건국대점거농성 사건’ 참조) 등에 대한 정부의 탄압으로 막대한 역량 손실과 함께 침체기를 맞았다. 1987년 들어 학생운동은 투쟁일변도의 오류로 국민과 학생들에게 지지 받지 못한 점을 반성하며, 반합법적인 투쟁위원회 중심에서 탈피하여 총학생회를 중심으로 대중사업을 전개하는 방식으로 활동방식을 전환하였다. 학교간의 연대도 총학생회간의 연대로부터 출발하는 협의체를 구성하는 방향으로 정리되었다. 5월 8일 서울지역대학생대표자협의회(서대협) 발족을 시작으로 호남지역학생회연합(호남학련), 부산지역총학생회협의회(부총협) 등 지역별 학생연대조직(지구대협)이 만들어졌다. 이렇게 만들어진 지구대협은 6월민주항쟁 기간 동안 자기의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7월 8일, 서대협은 이한열 장례식 및 전국 학생연대조직의 건설을 논의하기 위해 각 지역 총학생회장 연석회의를 개최하였다. 이 회의에서 전국 학생연대조직을 건설하기로 결의하였다. 그 후 몇 차례의 연석회의를 거쳐 8월 19일에 ‘구국의 강철대오’라 불리던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이하 전대협)를 결성하기로 하였다.

8월 18일, 충남대에서 전대협 창립총회가 열렸다. 서울·경기·충청·강원·영남·호남 등 전국 6개 지역 19개 지구별 대표들은 투표를 통해 이인영(고려대 총학생회장, 서대협 의장)을 전대협 의장으로 선출하였다. 8월 19일, 전국 95개 대학생 5,000여 명은 충남대에 모여 전대협 결성대회를 개최하였다. 전대협은 발족선언문에서 외세 배격, 독재 종식, 민주정부 수립, 조국의 평화통일, 민중 연대, 학문과 사상의 자유 쟁취 투쟁 등을 전개할 것임을 선언하였다. 87년 대통령선거를 맞아 전대협은 군부독재의 장기집권을 저지하고 민주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대선 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대통령 후보 문제를 둘러싼 입장의 차이는 전대협을 분열시켰고, 대선에서 광주민중항쟁의 책임자 중 하나인 노태우 후보가 당선됨으로써 좌절을 겪게 된다. 그러나 공정선거감시단 활동을 통한 선거 감시운동을 펼쳐 공정선거 감시 운동이라는 새 장을 열게 된다.

1988년 전대협 2기(의장 오영식, 고려대 총학생회장)는 내부 분열과 대선 패배의 오류를 반성하고 ‘조국통일투쟁’을 활기차게 전개하였다. 전대협은 북의 청년학생들에게 8월 15일 ‘남북학생회담’ 개최를 제안하였다. 6월 10일, 연세대에서 4.19 때 외쳤던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만나자! 판문점에서’를 외치며 남북청년학생실무회담 성사를 위해 판문점으로 가려 하였으나 정부 당국에 의해 무산되었다. 8월 15일, 제2차 회담을 성사시키기 위해 회담장소인 판문점으로 향한 학생들은 경찰이 물리력으로 막자 홍제동 거리에서 모두 누워 이른바 ‘연와(連臥)투쟁’을 벌였다. 전대협은 비록 회담의 성사에는 실패하였지만 통일운동을 진작시키는 데는 성공하였다. 1988년 하반기 전대협은 ‘광주학살 원흉, 부정비리 주범 전두환· 이순자 구속투쟁’을 전개하였다. 이렇듯 ‘남북청년학생회담 성사 투쟁’과 ‘전두환, 이순자 구속투쟁’은 2기 전대협의 주된 투쟁 방향이었다.

1989년 한 해는 공안정국이었다. 문익환 목사의 방북과 서경원 의원의 방북 등 굵직한 시국사건들이 계속되었다. 5월 11일 충남대에서 결성된 전대협 3기(의장 임종석, 한양대 총학생회장)는 명동성당에서 조선대생 이철규의 사인을 규명하기 위한 단식 투쟁을 벌여 공안합수부를 해체시키는 성과를 내왔다. 제 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이 평양에서 열리게 되자 전대협은 임수경을 평양에 파견하여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1990년 전대협 4기(의장 송갑석, 전남대 총학생회장)는 ‘자주 민주 통일투쟁의 총체적 전개, 민주대연합, 운동의 대중화’ 등으로 요약되는 노선에 따라 5월 9일 민자당 창당일에 맞춘 반민자당 궐기투쟁을 비롯, 부산지역 대학생들의 동맹휴업 등 운동의 대중화를 위해 노력했으며 8월엔 ‘조국의 평화와 자주적 통일을 위한 학생추진위원회’ 발족식과 8월 15일 판문점 범민족대회 출정식 등 통일운동을 벌였다. 1991년 전대협 5기(의장 김종식, 한양대 총학생회장)가 주도한 ‘91년 5월투쟁’은 명지대학생 강경대가 경찰의 쇠파이프에 의해 사망한 사건으로 촉발되어 민자당 창당기념일을 맞아 전국 145개 대학의 동맹휴업과 전국에 걸친 30만 명의 가두시위로 절정을 이뤘다. 1992년 전대협 6기(의장 태재준, 서울대 총학생회장)는 ‘조국통일범민족청년학생연합(범청학련)’ 남측본부 결성과 범민족대회를 주도했다. 하지만 12월 18일의 대선을 앞두고 민중후보 추대와 범민주단일후보로 입장이 갈리기도 했다. 이후 전대협은 1993년 조직을 해소하고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한총련)으로 확대·재편되었다.

주요출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연구소 편, 『한국민주화운동사연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연구소 편, 『민주화운동관련 사건·단체 사전편찬을 위한 기초조사연구(1980년대)보고서』 한용 외, 청년사, 『80년대 한국사회와 학생운동』 강신철 외, 형성사, 『80년대 학생운동사』 전대협동우회, 두리, 『불패의 신화-전대협 이야기 6년사』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 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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