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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 탄광노동자 성완희 분신사건

구사대가 휘두른 쇠파이프가 유리창을 깼다. 성완희는 휘발유통의 마개를 열고 구사대에게 들어오지 말라고 경고를 했다. 라이터를 꺼내들었다. 잠시 후 펑! 소리와 함께 성완희는 불덩어리로 변했다. 그는 혼신의 힘을 다해 소리를 쳤다. “부당해고 철회하고 어용노조 물러가라! 광산쟁이도 인간이다, 인간답게 살아보자!” 며칠 후 성완희는 마지막 말을 전했다. “나는 먼저 간다, 나는 가더라도 민주노조는 꼭 만들어달라” 강원탄광의 노동자 성완희는 직선제 민주주의를 쟁취했던 1987년의 6.29선언 1주년이 되던 날 부당해고된 동료의 복직을 요구하며 분신했고, 7월 8일 숨을 거두었다. 서울올림픽이 채 석달도 남지 않았던 여름이었다.

1987년 6월 민주항쟁과 노동자 대투쟁은 강원도 태백의 강원탄광에서도 한창이었다. 성완희는 1987년 10월 강원탄광의 대파업에서 노동자 대표로 선출되어 파업을 승리로 이끌었다. 하지만 강원탄광은 그의 활동을 방관하지 않았다. 근무 중 입은 부상을 치료하기 위해 결근을 하자 그를 일방적으로 해고했다. 성완희는 복직투쟁을 했지만 회사는 그의 노동조합 활동을 막기 위해서 그를 광부가 아닌 경비로 복직시켰다. 성완희는 법원에 소송을 제기했고 어렵사리 현장에 돌아올 수 있었다.

성완희는 분신하기 약 한 달 전인 1988년 6월 2일자 『한겨레신문』에 태백지역 탄광노동자들의 비참한 현실을 알렸다. 당시 강원탄광 등 다수의 탄광업체들은 일한 결과에 따라 임금을 지급한다는 얼핏 합리적으로 보이기도 하는 도급제를 악용하고 있었다. 강원탄광만 하더라도 1980년부터 5년간 명목상 40%의 임금이 인상되었으나 실질적인 임금인상은 9%에 불과했다. 정부는 이런 현실을 수수방관했다. 정부가 했던 조치라곤 고작 실질적인 임금인상을 요구하는 노동자들의 요구를 들어주는 척하며 연탄값을 올려서 연탄을 사용하는 서민들에게 부담을 전가한 것뿐이었다. 성완희는 탄광 노동자들의 현실을 알리고 극복하고자 노력했지만 자본과 권력의 강고한 벽 앞에서 한계를 느끼곤 했다. 당시 광산지역 사회선교협의회 노동상담소 국장을 지낸 안재성은 성완희가 평소에 전태일처럼 노동자들을 위해 희생하고 싶다는 말, 분신을 해서라도 노동운동을 승리로 이끌겠다는 말을 자주 했다고 기억했다.

강원탄광은 끊임없이 노동자들을 부당해고하며 노동조합 활동의 봉쇄를 시도했다. 성완희는 1988년 6월 21일 동료 노동자의 복직투쟁을 위해 결근계를 내고 농성을 시작했다. 그의 분신은 그 와중에 일어났다. 그의 나이는 불과 29세였다. “광산쟁이도 인간이다. 인간답게 살아보자” 성완희의 주장은 단순했고, 명료했다. 강원탄광은 1993년 정부의 석탄합리화 정책에 따라 폐광됐다. 1987년 탄광 대파업 이후 불과 6년만의 일이었다. 태백과 정선의 많은 탄광업체가 그렇게 사라졌다. 정부와 강원도는 폐광지역 발전과 국가경쟁력 제고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탄광지역개발 촉진지구 개발계획’이라는 범국가적 사업을 출범시켰다. 현재 태백과 정선은 관광 코스와 대규모 카지노로 종종 뉴스에 오르는 강원랜드로 개발되었다.

주요출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희망세상』, 2006년 2월(통권 41호) 유영갑 저,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편,『성완희』(시대의 불꽃 6호),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연구소 편,『한국민주화운동사 연표』

강원 탄광노동자 성완희 분신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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