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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ㆍ13호헌조치 철폐투쟁

전두환 대통령은 통일민주당의 발기인대회가 열리는 날인 1987년 4월 13일에 맞춰 특별담화를 발표했다. 그는 “이제 본인은 임기 중 개헌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현행헌법에 따라 내년 2월 25일 본인의 임기만료와 더불어 후임자에게 정부를 이양할 것”이라고 했다. 직선제 개헌을 열망했던 시민들에게 찬물을 끼얹은 것이다. 이대로라면 개헌은 88올림픽 이후에나 가능한 것이 되었다. ‘체육관 대통령’ 전두환으로서는 자신의 퇴임 후 안전판이 호헌이라 생각한 것이다. 4·13호헌조치에 대해 반공, 어용, 경제단체들은 지지를 표명했다. 서울의 주요신문들도 동아일보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직간접적으로 지지를 표명했다. 이에 대해 대다수 시민사회와 단체들은 반대투쟁을 벌였다. 대한변호사협회, KNCC, 전국목회자정의평화실천협의회, 민주언론운동협의회, 민중문화운동협의회 등이 호헌철회와 직선제 쟁취, 장기집권음모 규탄을 주장했다.

4월 19일 서울의 4.19국립묘지 주변에서는 3.3.평화대행진 이후 처음으로 규모가 큰 격렬한 시위가 벌어졌다. 오후 2시부터 시작된 민통련 주최의 4.19기념식은 각 참여단체들이 성명서를 낭독하면서 두 시간 이상 진행되었다. 4시 30분경 3,000여 명의 시위대가 시내로 진출하려 했고, 이에 경찰은 최루탄을 일제히 발사하고 시위대와 충돌했다. 이날 358명 (이중 학생 289명)이 연행되었다. 이후 4월 21일에는 광주대교구 소속사제들의 단식농성을 시작으로 전국에서 천주교 신부들과 개신교 목회자들의 단식농성이 이어졌다. 불교계에서도 정토구현승가회 등 불교단체가 철야농성을 벌였고 함석헌, 송건호, 박형규 등 재야인사들도 단식농성에 합류했다. 그에 이어서 교수들도 50개 대학 1530명이 참여하는 시국성명을 내어 반대투쟁의 열기는 고조되었다. 그 외에도 문화예술인과 민가협, 양심수, 전현직의원 등 각계각층이 망라되어 4·13호헌조치 반대투쟁이 이어졌으며 이들의 투쟁은 결국 그 후의 6월항쟁으로 열매가 맺어졌다.

주요출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연구소 편, 『한국민주화운동사연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연구소 편, 『한국민주화운동사 3』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기획/서중석 저,『한국현대사 60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기획/정해구 김혜진 정상호 저, 『6월항쟁과 한국의 민주주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6월민주항쟁계승사업회 편, 『6월항쟁을 기록하다』

4ㆍ13호헌조치 철폐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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