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바로가기주메뉴 바로가기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로고

경동산업노조탄압과 노동자 집단분신

국내 굴지의 주방용품 생산업체인 인천의 경동산업은 작업 공정이 대부분 프레스와 연마로 되어있어서 산업재해가 끊이질 않았다. 경동산업 노동자들은 열악한 노동조건을 극복하기 위해 1984년과 1985년에 노조결성을 시도했지만 사측의 방해로 좌절되었다. 1987년 노동자대투쟁 당시 이들은 ‘어용노조 해산’, ‘민주노조 건설’, ‘임금인상’, ‘해고자 전원 복직’을 요구하며 2주에 걸친 파업투쟁을 통해 대부분의 요구를 관철했으나, 민주노조 임시집행부 선거 하루 전에 8명이 구속됨으로써 노조가 어용화 되는 결과를 낳았다.

1989년 임금인상 투쟁 시기 경동산업의 노동자들은 회사와 야합하려는 어용노조에 맞서 임금인상대책위원회를 결성하였다. 그러나 김치원 어용노조 집행부는 임금인상대책위를 해산시키고, 파업을 요구한 조합원들의 뜻과 상관없는 중재안을 멋대로 타결해 버렸다. 이에 임금인상대책위원 출신을 중심으로 1989년 5월 14일 ‘디딤돌’ 이라는 친목단체를 조직하였다. 그러나 디딤돌은 노조에 적극적인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회사와 어용노조의 감시와 탄압 속에 놓이게 되었다. 특히 6월 6일 지역 노동자 축구대회, 8월 3일 인노협(인천지역노동조합협의회. 상세는 ‘인노협 총파업투쟁’ 항목 참고) 수련회 참석 등으로 서서히 영향력을 높여 가자 회사의 탄압은 노골화되었다. 디딤돌은 8월 ‘경동가족 한마당’ 이라는 일일찻집을 개최하려고 8월 11일부터 티켓 판매를 하였다. 그러나 이 일로 한 회원이 티켓을 빼앗기고 무릎이 꿇리는 등의 모욕을 당하였다. 이에 디딤돌 회원들이 강력히 항의하였다.

이 같은 상황에서도 8월 27일 ‘경동가족 한마당’ 은 진행되었다. 회사 측은 디딤돌 회장 강현중, 부회장 유원식, 총무 안중준에게 사유도 게재치 않은 징계위원회 출석 요구서를 발송하는 등 탄압을 노골화하였다. 이에 디딤돌 회원 전원은 “조합원이 당당하게 대접받는 풍토를 만들기 위해 전 회원의 해고를 걸고 싸울 것” 을 결의하고 모두가 혈서를 쓰고 투쟁을 다짐하였다. 8월 31일 「디딤돌이 조합원에게 드리는 글」이라는 유인물을 배포하였다. 저녁 10시경 200여 명의 구사대가 무력으로 난입을 시도했으나 목숨을 걸고 물리쳤으며, 이 과정에서 다시금 모두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자는 결의를 하였다. 9월 1일 야간조 식사 시간을 이용하여 조합원들에게 농성의 의미와 끝까지 투쟁할 것을 전달하였다. 그러자 회사는 야간조를 새벽 5시 30분에 퇴근시켜 버렸다. 경찰 투입 소식이 전해지자 회원들은 옥상으로 자리를 옮겼다. 9월 2일 아침 디딤돌을 악선전하는 노조 측의 유인물이 배포되자 회원 대책회의를 열었다. 오후 사측과 협상에 들어갔으나 결렬되자 만장일치로 전면투쟁을 선언했다.

9월 3일 몇 차례의 협상이 있었으나 역시 결렬되었고, 계속 구사대와의 힘겨운 싸움이 벌어졌다. 9월 4일 강현중 등 5명이 온 몸에 신나를 뿌린 채 강의신 이사에게 자신들에 대한 징계 방침 철회를 요구하였으나 거절당하였다. 이에 이들은 몸에 불을 붙였고, 이들 5명과 강 이사 등 6명이 온몸에 중상을 입고 병원으로 옮겨졌다. 강현중 등이 분신하는 것을 보고 흥분한 최운규 등 2명이 노조 사무실 앞 운동장에서 과도로 할복하였다. 이 사건으로 노동자 강현중과 김종하가 사망하였고 경찰은 이건탁 등 18명을 자살방조, 폭력 등 위반으로 구속하였으며 사측은 40여 명을 강제 사직시켰다. 이 사건은 기업주가 업무 이외의 시간에 행한 해고자 돕기 행사를 문제 삼아 평소 민주노조운동에 관심이 있던 노동자들을 징계하였고 이에 맞선 노동자들의 저항을 구사대 폭력으로 진압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것으로, 경찰이 폭력의 주체인 사측의 편에 서서 피해자인 노동자들을 처벌하여 사회적 문제가 되기도 했다.

경동산업노조탄압과 노동자 집단분신

to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