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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적민주주의’ 장례식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은 박정희 군사정권에 대한 학생들의 정면도전이었다. 그들이 박정희의 이른바 ‘민족적 민주주의’를 비판의 대상으로 삼은 이유는 박 정권이 그들에게 부족한 민주적 정통성을 민족주의로 합리화시키려 했기 때문이었다. 박정권이 표방한 ‘주체적 혁명’, ‘근대화 혁명’, ‘재건 혁명’의 기치와, ‘국가를 바로 세우고 세대교체를 이룩한다’, ‘자립경제를 달성한다’는 모든 정책목표가 사이비 민족주의이자 사이비 민주주의인 ‘민족적 민주주의’로 집약되었기 때문이었다. 인도네시아 수카르노의 ‘교조적 민주주의’를 본 따 군부에 진상된 ‘민족적 민주주의’에 대한 비판은 군사정권과 박정희가 표방한 모든 화려한 구호의 허구성을 총체적으로 비판할 수 있는 중심 고리였다. 또한 ‘민족’을 표방하면서도 실제로는 한일협정에서 드러난 바와 같이 가장 ‘반민족적, 비민족적’ 행동을 한다는 사실을 저자세의 대일 외교를 통해 쉽게 폭로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3.24시위(상세는 별도 항목 ‘한일회담반대투쟁’ 참조) 이후 부정부패 스캔들과 학원사찰 폭로로 악화된 여론을 무마하기 위해 박정희 정권은 전면개각을 단행했지만 정일권 내각은 한일회담을 밀어붙이기에 급급했다.

이 성토대회는 애초 서울문리대와 동국대 연석회의에서 추진되었다. 그리고 1964년 5월 16일 저녁 7시 서울문리대 건너편 음식점 진아춘에서 서울대 동국대 성균관대 건국대 경희대 등 5개 학교 투위(학생회와는 무관) 대표가 거의 다 참석하여 ‘장례식’ 준비를 최종점검하였다. 한편 한일굴욕회담반대학생총연합회(회장 김중태)가 주최하는 장례식에 대해 각 대학 학생회는 반대 입장이었다. 장례식 전날 9개 대 총학생회장은 “장례식은 학생회와는 무관한 집회”라며 각 신문사에 해명하고 다녔다. 5월 20일 서울대에서 고려대, 동국대, 성균관대, 건국대, 경희대, 한양대 등 2,000여 명의 학생과 시민들이 결집한 가운데 ‘대일굴욕외교반대 학생총연합회’의 주도하에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이 거행되었다. 오후 1시 ‘축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이라고 쓴 만장이 펄럭이는 가운데 각 대학 대표 4명이 민족적 민주주의의 관을 어깨에 메고 대회장으로 들어와 조사 낭독을 하고 화형식과 함께 선언문과 결의문을 발표하였다. 장례식의 조사는 김지하가 작성하였다. “시체여! 너는 오래 전에 죽었다. 죽어서 썩어가고 있었다. 넋 없는 시체여! 반민족적 비민주적 민족적 민주주의여! 썩고 있던 네 죽음의 악취는 사꾸라의 향기가 되어….”로 시작된 조사에서 학생들은 “4월항쟁의 참다운 가치성은 반외세·반매판·반봉건에 있으며, 민족·민주의 참된 길로 나아가기 위한 도정이었으나, 5·16쿠데타는 이러한 민족·민주이념에 대한 정면적인 도전”이라고 비판하였다. 그리고 “민족적 민주주의는 수렵적 정보정치를 합리화하기 위한 행상적 탈춤으로 변장”됐다고 규탄하고, “매국적 한일 굴욕회담을 전면 중지”하라고 요구하였다. 결의문에서는 박 정권을 4·19 정신을 근본적으로 부정한 친일, 친미 정권으로 규정하고, 그 지주는 국내의 매판자본임을 천명하면서 반외세 반독재를 하나의 구호로 결합하였다. 이러한 내용의 선언문은 군사정권의 숱한 의혹 사건, 박정희의 억압과 계속되는 빈곤에 점점 회의를 느끼기 시작하던 많은 학생들과 시민의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민족적 민주주의’를 장례지내는 것은 바로 박정희를 장례지내는 것이었고, 대정부 선전포고문에 다름 아니었다. 선언문은 ‘반매판 반외세 반봉건 민족자주 민주주의’라는 6ㆍ3항쟁의 본질을 규정하는 내용이 최초로 집약된 내용이었다. 장례식을 마친 학생들은 5·16 이념, 민생고, 한일회담, 학원사찰 등에 대한 성토대회를 열었다. 각 학교 대표가 5·16쿠데타 성토문, 민생고 성토문, 한일회담 성토문, 학원사찰 성토문을 분담하여 낭독하였다. “총파탄에 이른 국민경제를 일본 제국주의의 더러운 배설물로 얼버무려 놓으려는 자 과연 누구냐? 피로써 되찾은 한국을 일본 의존적 예속의 쇠사슬에 묶은 것이 근대화요 자립이라고 말하는 자 소위 민족적 민주주의를 장사지내자….”는 내용의 선언문은 김중태와 김정남, 김도현 등이 선배들의 자문을 받고 상호 협의하여 작성하였다. 학생들은 성토대회를 마치고 시위에 들어갔다. 이날 시위는 “축!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이라고 쓴 조기와, ‘민족적 민주주의’ 시체가 든 검은 관을 앞세우고 시작되었다. 시청 앞에서 관을 태우기 위해 교문을 나선 2,000여 명의 시위 학생들은 이화동 삼거리에서 방독면을 쓴 500여 명의 경찰과 수많은 무술경관들과 충돌하여 약 5시간 동안 투쟁하다 오후 7시 40분경 해산하였다.

이날 시위 학생들은 전에 볼 수 없는 시민들의 열렬한 호응을 받으며 미 대사관 앞까지 진출했으나, 경찰의 최루탄공세로 더 나아가지 못한 채 대학가 여기저기서 농성을 벌였다. 이날 학생 시위는 그 어느 때보다 격렬했다. 경찰은 이날 시위 과정에서 학생 87명, 시민 94명 등 181명을 무더기 연행하였으며, 그중 107명에게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위반과 특수공무집행방해 혐의로 구속영장을 신청하였다. 그러나 법원에 의해 모조리 기각되었다.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 조사를 읽은 직후 도피했던 서울대 문리대생 송철원이 붙잡히고 린치를 당했으며, 데모 학생들의 영장기각 사태에 대한 불만으로 무장군인들이 법원과 양헌 판사의 자택에 난입했다. 이렇듯 학생들에 의해 ‘산송장’이 된 박정희 정권은 송철원 린치사건과 무장군인 법원난입 사건이라는 더 큰 악수를 초래한 셈이었다. 5월 20일의 민족적민주주의장례식 및 성토대회는 1964년의 한일회담반대투쟁이 반정부투쟁의 성격을 띄는 계기가 되었다.

주요출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연구소 편, 『한국민주화운동사 연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기획/ 서중석 저,『한국현대사 60년』 이재오 저, 『해방후 한국학생운동사』 

‘민족적민주주의’ 장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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