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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북항쟁 (사북광산노동자대투쟁)

사북항쟁이 발생한 1980년 초는 억압적인 유신체제가 붕괴되고 제2차 석유파동으로 인한 세계적 불황의 여파 등으로 그간 억눌려왔던 노동자를 비롯한 각계각층의 요구가 분출하던 이른바 ‘민주화의 봄’ 시기이다. 노동자들의 파업투쟁이 일어날 당시 강원도 정선군 사북읍 동원탄좌는 국내 최대의 민영탄광으로 3,052명의 노동자가 연간 160만 톤의 석탄을 캐내었고 하청탄광에서 2천 여 명의 노동자들이 연간 70만 톤을 캐내 전국 채탄량의 11%를 차지했다. 그러나 광산노동자들의 노동조건은 상상을 초월할 만큼 열악하였고, 산업재해의 빈발과 진폐증 때문에 이들은 언제나 죽음의 공포에 시달려야 했으며, 임금은 월평균 15만 5천원의 저임금으로 당시 최저생계비인 24만원에 크게 못 미쳤다. 이에 더하여 전과자들의 조직인 국토개발대라든지 지역청년회 소속의 불량배나 주먹패 출신들로 이루어진 어용노조가 지부장으로 이재기를 선출하여 광산노동자들의 불만은 극에 달했다.

이에 1980년 4월 21일부터 24일까지 4일에 걸쳐 인구 3만의 탄광도시 사북에서 어용노조와 임금 소폭 인상에 항의하는 광부와 그 가족 6,000여 명이 시위를 벌였다. 이 과정에서 경찰과 충돌하면서 유혈사태로 발전했다. 노사분규가 일어난 것은 이보다 앞선 4월 16일이었는데, 이때는 시위가 격렬하지 않았다. 광부들은 4월 18일부터 임금인상과 어용노조 지부장의 사퇴를 요구하였으나, 회사 측이 요구를 듣지 않은 채 경찰을 개입시키자 유혈사태로 번져나갔다. 광부 측은 경찰이 어용노조와 회사 측을 두둔한다고 판단하였고, 더욱이 사건의 원인을 제공한 어용노조 이재기 지부장마저 도망쳐 버리자, 이후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되었다. 광부들은 4월 21일부터 3일 동안 사북읍 시가지를 완전 점거하여 공권력을 무력화시켰으나, 광부들이 자체적으로 조직한 사수대 등이 무기고와 화약고를 통제하는 등 나름대로 질서를 유지하는 노력을 수반하였다. 이 과정에서 경찰관 1명이 숨지고, 160여 명의 경찰과 민간인이 부상을 당했으며, 사북읍은 4월 24일까지 광부들의 세상, 노동자들만의 도시가 되었다. 24일 노·사·정 대표가 합의에 도달, 사태가 평화적으로 해결되는 듯했다. 그러나 사태가 진정된 후 당시 계엄사령부는 합의를 깨고 5월 6일 ‘합동수사단’을 구성하여 부녀자를 포함하여 31명을 구속하고 50명을 불구속 기소하는 등 총 81명을 군법회의에 송치하였다. 그들은 소요죄, 폭행죄로 구속되어 모진 고문과 2~3년간의 감옥생활을 해야 했다.

오랫동안 유신독재 하에서 억눌려 왔던 노동운동은 사북 광산노동자 4천여 명의 총파업을 계기로 새로운 양상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노동자들은 임금인상과 노동조건 개선과 함께 어용노조 퇴진과 노조민주화 요구를 내세웠다. 투쟁방식도 폭력적인 형태로 흘렀으며, 공권력과 맞서는 새로운 모습들이 등장하였다. 봉기에 가까운 4일간의 파업이 끝난 직후, 4월 25일 단 하루 동안에만 전국 8개 공장에서 3천 여 명의 노동자가 경찰과 직접 대치하여 격렬한 투쟁을 벌였고, 5월 17일 직전까지 부산 파이프, 동국제강, 금강제화, 원진레이온, 신일인쇄 등 수많은 공장에서 노동쟁의가 연쇄적으로 일어나 가히 ‘노동운동의 봄’을 가져오게 했다. 그러나 이처럼 격렬해지던 노동자들의 투쟁은 신군부가 5월 17일 계엄령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대대적인 탄압을 개시하자 급속히 잦아들었다. 광주항쟁의 서곡이었던 사북항쟁은 자연발생적이며 비조직적인 투쟁의 한계도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동시에 사북항쟁은 어용노조에 대한 투쟁의 단초가 되었으며, 주민들과의 연대성과 집단성을 특질로 하는 1980년대 노동운동의 양태를 예고한 것이기도 했다. 한편 당시 집권음모를 꾸미던 전두환 신군부세력은 이 사건을 ‘사회혼란의 대표적인 사건’으로 확대, 왜곡하면서 집권의 명분으로 삼기도 했다.

사북항쟁 관련자들은 ‘사북노동항쟁 명예회복추진위원회’를 결성하고 2000년 11월 21일 명예회복과 보상을 신청했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는 2008년 4월 23일 “1980년 ‘사북사건’에 대한 조사 결과, 당시 계엄사에 의해 저질러진 인권 침해 사실을 다수 확인했다”고 진실 규명 결정을 내렸다. 진실화해위는 국가에게 피해자에 대한 사과와 함께 정신적 피해와 명예회복을 위한 조치를 취할 것을 권고했다. 진실화해위의 조사에 따르면 당시 수사관들은 조사 전에 미리 주동자 명단을 작성해 ‘짜맞추기 수사’를 벌인 것으로 드러났다. 물고문과 구타를 통해 자백을 강요했으며, 50여 명의 부녀자들에 대해 강제로 옷을 벗기는 등 성적 가혹행위를 벌인 것도 확인됐다. 진실화해위는 “당시 연행됐던 임산부가 유산을 하고 일부 연행자는 이후 정신과 치료를 받는 등 심각한 고문 후유증을 겪었다”고 밝혔다.

주요출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연구소 편, 『한국민주화운동사 연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기획/ 서중석 저,『한국현대사 60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연구소 편, 『지역민주화운동사 편찬을 위한 기초조사사업 최종보고서-태백/정선』 사북청년회의소 편, 『탄광촌의 삶과 애환』 고려대노동문제연구소 편/ 이원보 ,「경제개발기의 노동운동」, 『한국노동운동사』 제5권 수록 김정남 ,『진실, 광장에 서다-민주화 30년의 역정』

사료소개

‘사북’ 조건으로 42건의 사진자료와 4건의 문서가 검색되었다. 사북항쟁 직후인 1980년 4월 27일의 민주주의와민족통일을위한국민연합 성명서 <사북사태의 원만한 해결과 노동쟁의의 근본대책을 당국에 촉구함>(등록번호 : 67317)과 4월 30일에 생산된 ‘정책협의회참가자일동’명의의 선언문 <최근 경향각지에서 일어나는 근로자 농성사태와 동원탄좌 사북사태에 대하여>(등록번호 : 97936)가 사건에 대한 당시의 인식을 보여주는 문건이다.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 성명서에 따르면, “이번 사북사태는 근본적으로는 부패특권층을 위한 대외의존적이고 물량성장위주이며 서민대중의 인간다운 경제생활을 외면한 박정권의 반인간적이고 반민중적이며 반민족적인 경제체제로 말미암은 국민경제파탄의 필연적 귀결이며, 또한 노동삼권을 비롯한 근로자의 정당한 권리를 탄압해 온 반근로자적 노동정책에 대한 근로자의 정당한 항거였음을 분명히 인식하여야 한다”고 사북항쟁의 근본원인을 밝히면서, 폭력으로 사태가 비화한 원인은 “경찰이 기업주와 결탁한 어용노조간부를 감싸고 돌면서, 근로자의 정당한 요구를 강압적으로 억누르려 한 것과, 도망가던 경찰이 이를 제지하기 위해 길에 드러누운 사람 위로 차를 몰아 치명적인 중상을 입힘으로써 광부들의 분노가 폭발했기 때문인 것”임을 분명히 했다. 국민연합은 또 “근로자의 정당한 집회를 불가능케 한 비상계엄령의 존속도 이번 사북사태의 큰 원인”이라고 주장했다. 예수교 장로회 산업선교정책협의회 참가자들은 ‘산업사회와 교회선교’라는 주제로 4월 28일부터 30일까지 반도 유스호스텔에서 전국 노회대표를 초청하여 산업선교정책협의회를 열면서 사북항쟁에 대해 다음과 같이 입장을 밝혔다. “1. 사북사건은 18년의 독재정치 속에서 안보라는 명분아래 노동3권을 유보하고 기업주를 비호하는 정책으로 기업주의 부와 근로자의 빈에서 누적된 감정이 폭발되었다고 본다. 2. 근로자를 위한 복지시설의 부재, 악조건의 근로노동, 기업측과 유착하여 광부들의 기대에 배신한 어용노조의 간부들의 귀족화된 생활이 소요사태를 불러일으킨 것이다. 3. 기업측의 이윤극대화 위주의 경영방식으로 인한 근로자 저임금과 소외된 근로조건에 반해 기업주의 편협한 자세가 더욱 반감을 일으켰으며 근로자의 비인간화된 생활에서 그들의 기본 대우를 회복코자 하는데서 사태가 야기되었다고 본다. 3. 사건의 확대는 구태의연한 지배자의 자세로 근로자를 진압한 경찰의 행위가 사태를 더 악화시켰다고 본다”고 하면서 노동정책의 근본적인 수정을 요구했다.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이 같은 해 6월에 작성한 <사북사태 분석보고서-동원탄좌 노동자 시위사태를 중심으로>(등록번호 : 55305)와 김정남이 『생활성서』에 연재하고 후일 창비에서 출간한『진실, 광장에 서다』에 수록한 글 <민주화 30년, 그 역정-‘80년, 사북노동항쟁을 아시나요 사흘 동안의 광부세상>(등록번호 : 414877) 등이 참고할만한 사료이다. 그 외에 2000년 4월 22일 생산된 정선지역발전연구소의 <1980년 4월 사북>은 그 지역에서 만든 사북사건 자료집이다.

사북항쟁 (사북광산노동자대투쟁)

사북항쟁이 발생한 1980년 초는 억압적인 유신체제가 붕괴되고 제2차 석유파동으로 인한 세계적 불황의 여파 등으로 그간 억눌려왔던 노동자를 비롯한 각계각층의 요구가 분출하던 이른바 ‘민주화의 봄’ 시기이다. 노동자들의 파업투쟁이 일어날 당시 강원도 정선군 사북읍 동원탄좌는 국내 최대의 민영탄광으로 3,052명의 노동자가 연간 160만 톤의 석탄을 캐내었고 하청탄광에서 2천 여 명의 노동자들이 연간 70만 톤을 캐내 전국 채탄량의 11%를 차지했다. 그러나 광산노동자들의 노동조건은 상상을 초월할 만큼 열악하였고, 산업재해의 빈발과 진폐증 때문에 이들은 언제나 죽음의 공포에 시달려야 했으며, 임금은 월평균 15만 5천원의 저임금으로 당시 최저생계비인 24만원에 크게 못 미쳤다. 이에 더하여 전과자들의 조직인 국토개발대라든지 지역청년회 소속의 불량배나 주먹패 출신들로 이루어진 어용노조가 지부장으로 이재기를 선출하여 광산노동자들의 불만은 극에 달했다.

이에 1980년 4월 21일부터 24일까지 4일에 걸쳐 인구 3만의 탄광도시 사북에서 어용노조와 임금 소폭 인상에 항의하는 광부와 그 가족 6,000여 명이 시위를 벌였다. 이 과정에서 경찰과 충돌하면서 유혈사태로 발전했다. 노사분규가 일어난 것은 이보다 앞선 4월 16일이었는데, 이때는 시위가 격렬하지 않았다. 광부들은 4월 18일부터 임금인상과 어용노조 지부장의 사퇴를 요구하였으나, 회사 측이 요구를 듣지 않은 채 경찰을 개입시키자 유혈사태로 번져나갔다. 광부 측은 경찰이 어용노조와 회사 측을 두둔한다고 판단하였고, 더욱이 사건의 원인을 제공한 어용노조 이재기 지부장마저 도망쳐 버리자, 이후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되었다. 광부들은 4월 21일부터 3일 동안 사북읍 시가지를 완전 점거하여 공권력을 무력화시켰으나, 광부들이 자체적으로 조직한 사수대 등이 무기고와 화약고를 통제하는 등 나름대로 질서를 유지하는 노력을 수반하였다. 이 과정에서 경찰관 1명이 숨지고, 160여 명의 경찰과 민간인이 부상을 당했으며, 사북읍은 4월 24일까지 광부들의 세상, 노동자들만의 도시가 되었다. 24일 노·사·정 대표가 합의에 도달, 사태가 평화적으로 해결되는 듯했다. 그러나 사태가 진정된 후 당시 계엄사령부는 합의를 깨고 5월 6일 ‘합동수사단’을 구성하여 부녀자를 포함하여 31명을 구속하고 50명을 불구속 기소하는 등 총 81명을 군법회의에 송치하였다. 그들은 소요죄, 폭행죄로 구속되어 모진 고문과 2~3년간의 감옥생활을 해야 했다.

오랫동안 유신독재 하에서 억눌려 왔던 노동운동은 사북 광산노동자 4천여 명의 총파업을 계기로 새로운 양상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노동자들은 임금인상과 노동조건 개선과 함께 어용노조 퇴진과 노조민주화 요구를 내세웠다. 투쟁방식도 폭력적인 형태로 흘렀으며, 공권력과 맞서는 새로운 모습들이 등장하였다. 봉기에 가까운 4일간의 파업이 끝난 직후, 4월 25일 단 하루 동안에만 전국 8개 공장에서 3천 여 명의 노동자가 경찰과 직접 대치하여 격렬한 투쟁을 벌였고, 5월 17일 직전까지 부산 파이프, 동국제강, 금강제화, 원진레이온, 신일인쇄 등 수많은 공장에서 노동쟁의가 연쇄적으로 일어나 가히 ‘노동운동의 봄’을 가져오게 했다. 그러나 이처럼 격렬해지던 노동자들의 투쟁은 신군부가 5월 17일 계엄령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대대적인 탄압을 개시하자 급속히 잦아들었다. 광주항쟁의 서곡이었던 사북항쟁은 자연발생적이며 비조직적인 투쟁의 한계도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동시에 사북항쟁은 어용노조에 대한 투쟁의 단초가 되었으며, 주민들과의 연대성과 집단성을 특질로 하는 1980년대 노동운동의 양태를 예고한 것이기도 했다. 한편 당시 집권음모를 꾸미던 전두환 신군부세력은 이 사건을 ‘사회혼란의 대표적인 사건’으로 확대, 왜곡하면서 집권의 명분으로 삼기도 했다.

사북항쟁 관련자들은 ‘사북노동항쟁 명예회복추진위원회’를 결성하고 2000년 11월 21일 명예회복과 보상을 신청했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는 2008년 4월 23일 “1980년 ‘사북사건’에 대한 조사 결과, 당시 계엄사에 의해 저질러진 인권 침해 사실을 다수 확인했다”고 진실 규명 결정을 내렸다. 진실화해위는 국가에게 피해자에 대한 사과와 함께 정신적 피해와 명예회복을 위한 조치를 취할 것을 권고했다. 진실화해위의 조사에 따르면 당시 수사관들은 조사 전에 미리 주동자 명단을 작성해 ‘짜맞추기 수사’를 벌인 것으로 드러났다. 물고문과 구타를 통해 자백을 강요했으며, 50여 명의 부녀자들에 대해 강제로 옷을 벗기는 등 성적 가혹행위를 벌인 것도 확인됐다. 진실화해위는 “당시 연행됐던 임산부가 유산을 하고 일부 연행자는 이후 정신과 치료를 받는 등 심각한 고문 후유증을 겪었다”고 밝혔다.

주요출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연구소 편, 『한국민주화운동사 연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기획/ 서중석 저,『한국현대사 60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연구소 편, 『지역민주화운동사 편찬을 위한 기초조사사업 최종보고서-태백/정선』 사북청년회의소 편, 『탄광촌의 삶과 애환』 고려대노동문제연구소 편/ 이원보 ,「경제개발기의 노동운동」, 『한국노동운동사』 제5권 수록 김정남 ,『진실, 광장에 서다-민주화 30년의 역정』

사료소개

‘사북’ 조건으로 42건의 사진자료와 4건의 문서가 검색되었다. 사북항쟁 직후인 1980년 4월 27일의 민주주의와민족통일을위한국민연합 성명서 <사북사태의 원만한 해결과 노동쟁의의 근본대책을 당국에 촉구함>(등록번호 : 67317)과 4월 30일에 생산된 ‘정책협의회참가자일동’명의의 선언문 <최근 경향각지에서 일어나는 근로자 농성사태와 동원탄좌 사북사태에 대하여>(등록번호 : 97936)가 사건에 대한 당시의 인식을 보여주는 문건이다.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 성명서에 따르면, “이번 사북사태는 근본적으로는 부패특권층을 위한 대외의존적이고 물량성장위주이며 서민대중의 인간다운 경제생활을 외면한 박정권의 반인간적이고 반민중적이며 반민족적인 경제체제로 말미암은 국민경제파탄의 필연적 귀결이며, 또한 노동삼권을 비롯한 근로자의 정당한 권리를 탄압해 온 반근로자적 노동정책에 대한 근로자의 정당한 항거였음을 분명히 인식하여야 한다”고 사북항쟁의 근본원인을 밝히면서, 폭력으로 사태가 비화한 원인은 “경찰이 기업주와 결탁한 어용노조간부를 감싸고 돌면서, 근로자의 정당한 요구를 강압적으로 억누르려 한 것과, 도망가던 경찰이 이를 제지하기 위해 길에 드러누운 사람 위로 차를 몰아 치명적인 중상을 입힘으로써 광부들의 분노가 폭발했기 때문인 것”임을 분명히 했다. 국민연합은 또 “근로자의 정당한 집회를 불가능케 한 비상계엄령의 존속도 이번 사북사태의 큰 원인”이라고 주장했다. 예수교 장로회 산업선교정책협의회 참가자들은 ‘산업사회와 교회선교’라는 주제로 4월 28일부터 30일까지 반도 유스호스텔에서 전국 노회대표를 초청하여 산업선교정책협의회를 열면서 사북항쟁에 대해 다음과 같이 입장을 밝혔다. “1. 사북사건은 18년의 독재정치 속에서 안보라는 명분아래 노동3권을 유보하고 기업주를 비호하는 정책으로 기업주의 부와 근로자의 빈에서 누적된 감정이 폭발되었다고 본다. 2. 근로자를 위한 복지시설의 부재, 악조건의 근로노동, 기업측과 유착하여 광부들의 기대에 배신한 어용노조의 간부들의 귀족화된 생활이 소요사태를 불러일으킨 것이다. 3. 기업측의 이윤극대화 위주의 경영방식으로 인한 근로자 저임금과 소외된 근로조건에 반해 기업주의 편협한 자세가 더욱 반감을 일으켰으며 근로자의 비인간화된 생활에서 그들의 기본 대우를 회복코자 하는데서 사태가 야기되었다고 본다. 3. 사건의 확대는 구태의연한 지배자의 자세로 근로자를 진압한 경찰의 행위가 사태를 더 악화시켰다고 본다”고 하면서 노동정책의 근본적인 수정을 요구했다.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이 같은 해 6월에 작성한 <사북사태 분석보고서-동원탄좌 노동자 시위사태를 중심으로>(등록번호 : 55305)와 김정남이 『생활성서』에 연재하고 후일 창비에서 출간한『진실, 광장에 서다』에 수록한 글 <민주화 30년, 그 역정-‘80년, 사북노동항쟁을 아시나요 사흘 동안의 광부세상>(등록번호 : 414877) 등이 참고할만한 사료이다. 그 외에 2000년 4월 22일 생산된 정선지역발전연구소의 <1980년 4월 사북>은 그 지역에서 만든 사북사건 자료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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