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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ㆍ26 국민대행진

6월 23일 국민운동본부(상세는 별도 항목 참조)는 26일 오후 6시 전국에서 동시에 ‘민주헌법쟁취를 위한 국민평화대행진’을 실시하겠다고 발표했다. 6월민주항쟁의 제3단계인 26일 국민평화대행진에서 6·29선언까지의 기간을 여는 시점인 사건인 것이다.

전두환 정권이 4·13 조치(상세는 ‘4.13 호헌조치 철폐투쟁’ 참조) 철회와 개헌 논의 재개라는 부분적인 양보안을 제시했으나, 국민운동본부와 민주당이 이를 거부한 가운데 개최된 26일의 대회는 이제까지의 범국민 투쟁을 총결산하는 대규모 투쟁으로 전개되었다. 이들은 행동지침으로 오후 6시 국기하강식과 동시에 애국가를 제창하고, 전국의 교회와 사찰에서는 타종, 차량은 경적을 울리며, 밤 9시에는 10분간 TV를 끄고 소등할 것 등을 제시했다. 서울의 경우 동대문, 시청 앞, 안국동, 신세계백화점, 영등포시장 등 각 구별로 주민들이 모일 곳을 정했다. 최종집결지는 탑골공원으로 정하고 그쪽을 향해 태극기와 손수건을 흔들며 행진하도록 했다.

이 대회에는 전국 33개 시·군·읍에서 180만여 명이 참여했다. 시위 진압에 나섰던 경찰 5만 6,000여 명은 24곳의 평화대행진 집회 및 시위 예상도시에 배치하고 서울에서는 경찰 2만여 명을 동원해 원천봉쇄에 들어갔다. 전국에서 일제 검문검색을 실시했고, 전국 각 대학은 교직원을 동원해 수색을 벌여 시위용품을 수거하고 주요 지역을 원천봉쇄했지만, 걷잡을 수 없이 늘어만 가는 시위대의 위세에 밀려 속수무책이었다. 특히 이른바 ‘넥타이 부대’로 불리는 중산층과 사무직 시민들의 참여는 전두환 정권을 다시 한 번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전국 34개 도시, 4개 군에서 거의 같은 시간에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되었으며, 경찰의 원천봉쇄에도 불구하고 100여 만 명의 시민과 학생이 참여한 시위로, 4월혁명 이후 최대 규모이자 역사상 최대 규모의 시위였다. 이날 시위로 전국에서 3,467명이 연행되었고, 경찰서 2개소, 파출소 29개소, 민정당 지구당사 4개소 등이 투석과 화염병 투척으로 파괴되거나 방화되었다. 파손된 경찰 차량도 수십 대에 이르렀다. 이러한 전국민적 저항에 직면한 전두환 정권은 결국 노태우로 하여금 6·29선언을 발표케 하였다. 직선제 개헌이 쟁취되면서 투쟁 열기는 급격히 수그러들었으나, 6월항쟁을 계기로 7월부터 9월까지의 노동자대투쟁을 비롯한 각계각층의 민주화를 위한 투쟁이 봇물처럼 전개되는 등 6월항쟁은 한국민주화운동사에 빛나는 전기를 마련해주었다.

주요출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연구소 편, 『한국민주화운동사연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연구소 편, 『한국민주화운동사 3』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기획/서중석 저,『한국현대사 60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기획/정해구 김혜진 정상호 저, 『6월항쟁과 한국의 민주주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6월민주항쟁계승사업회 편, 『6월항쟁을 기록하다』

6ㆍ26 국민대행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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