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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춘승
사업개요
- 1977년 서울대 3월시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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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76년 송추모임에서 76년 학내상황에 대한 정리를 4학년들과 함께한 74학번 3학년 3명과 그 모임에는 참가하지 않은 박천우까지 4명은 3학년 때 인 76년부터 데모를 주동할 생각을 가지고 준비했으며,학내 정리를 위해 남 긴 김창우를 제외한 3명은 10월 15일 감나무골 사건으로 중단한 10월 22일 한번(76년)과 눈이 내려 중단한 3월 24일 한번(77년) 등 두차례나 유인물은 물론이고 데모 시도 일보직전까지 갔으나 중단한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더구나 예정에 없던 12월 법대 4학년 선배들의 시위까지 보면서 더욱 준비에 박차를 가한다. 계획이 연기되면서 오세범, 김재명 등은 같이 데모하자고 설득하는 등 복잡한 상황도 있었다. 사실 이것은 불가피하게 늦어진 일정 탓도 있었지만 다른 한편 철저한 보안의 반영이었다. 작업은 3월 20일 김천우의 자취방에서 하고, 자금은 공화당 국회의원이 주는 장학금이었고, 민주구국선 언문은 양춘승이 초안을 잡고 동료들이 가필 수정하여 만들었다. 23일 확성기와 플래카드 제작에 필요한 페인트와 포목, 종이 등 시위용품을 구입해 밤새 준비한다. 등사기는 일부러 자취방에 놔두었으나 재빠른 후배들이 치워버려 나중에 애를 먹기도 한다. 내용의 핵심은 민족 민주 민중이었다. 이런 준비를 거쳐 77년 3월 28일 시위에 성공한다. 양춘승은 민주구국선언문을 일기 시작하자마자 제지당하고 모여든 300여명의 학생들은 5분도 못되어 해산 당하고 와중에 탈출하여 한달 뒤에 잡혔다. 박찬우는 유인물을 뿌리고 김천우는 플래카드를 펼쳐들고 사회를 보았으나 일찍 현장에서 잡혔다. 현장에서 안잡 힌 양춘승 때문에 경찰이 김천우의 관자놀이에 권총을 들이대고 공범의 소재를 추궁하는 일이 벌어진다. 물론 시위 양상은 초기 진압됐으나 새로운 실험이 전통으로 정착을 의미했다. 비록 5분 만에 진압 당했으나 이 봉화를 계기로 서울시내에서는 4월 들어 한신대와 감신대, 고려대, 이대, 연대, 성대, 전북대 등에서 시위가 일어난다.
구술채록 정보
- 구술자
- 양춘승
- 면담자
- 오세제
- 구술일자
- 2008. 9. 17.
- 구술장소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 구술시간
- 1시간 2분
구술컬렉션 > 1970년대 학생운동 > 서울대
관련 구술아카이브
구술채록 내용
- 구술자 이력
- [양춘승]
1977년 서울대 학생 데모시위 주동(1979년 7월 17일까지 투옥)
관악민주포럼 회장(전)
7080 민주학생운동연대 상임부회장(현)
- 구술내용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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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써클 커리큘럼과 숱한 농활들, 1학년 때 데모경험과 향토개척단, 농법의 역사, 농법의 현재와 이범영선배의 추억, 그 인간적 면모, 유인물 미수사건과 감나무골사건, 3.24연기와 3.28데모, 연이은 소내투쟁
- 하이라이트 영상 내용
- 녹취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