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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컬렉션
1970년대 학생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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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성구1977년 10월 25일 시위 사건의 구체적 내용, 연세대 기독학생회 활동, 1977년 4.19 백지선언문 사건의 전말, 노동운동과 기술훈련소 개설, 제주도 4.3 기념사업의 법제화 과정, 제2건국위원회 활동과 한국투명성기구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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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아석교양과정부에서의 대학생활, 10·2시위 당일 날 시위의 구체적인 과정, 무역협회에 근무하던 시절의 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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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유상1977년 10월 25일 시위 사건이 확대된 과정, 연세대 탈반 활동과 그 성격 변화 과정, 비운동권 학생이 운동가로 거듭나는 과정, 인천에서의 노동운동과 인노련 활동, 1977년 10월 25일 시위가 인생에서 차지하는 비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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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오성한국전쟁 중 부산에서 출생한 권오성은 철도공무원인 아버지로 인해 어렵지 않은 어린 시절을 보냈다. 용산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사회의식, 정치의식은 성장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1971년 서강대 전자공학과에 입학한 후 대한 내에서 흥사단아카데미 활동을 시작하면서 사회문제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그러나 당시 흥사단에서는 사회과학서적보다는 역사 관련한 학습에 집중하는 경향이었다. 1972년 유신헌법 선포 이후 1973년 10월 서울대 문리대 시위에 자극을 받고 11월 서강대 내에서 시위를 일으켜 72시간 단식농성을 이어갔다. 그 후 1974년 2월 선배 박석률의 중재로 서울대 이철을 만나 전국적 규모의 학생시위 권유를 받았다. 그 과정에서 서울 시위의 신호탄으로 서강대에서 가장 먼저 시위를 해달라는 요청을 받고 3월 28일 시위를 시위 날로 정한 후 준비를 하였다. 구술자는 성명서를 작성하고 함께할 동지들을 규합하였다. 그러나 시위 당일 군 입대를 위한 신체검사 날이어서 참여하지 못하였다. 시위 당일 시위는 10분도 채 하지 못하고 경찰에 의해 주동자들이 끌려가면서 끝이 났다. 구술자 또한 그날 저녁 바로 마포경찰서로 출두하여 조사를 받았다. 그 후 재판을 거쳐 징역 8년이 확정되어 형을 살다가 다음해 2월 형집행정지로 석방되었다. 석방 후 학교로 돌아갔으나 75년 가을 학내에서 다시 시위를 일으켰고, 긴급조치9호 위반으로 구속되어 징역 2년형을 받고 78년 2월 만기출소 하였다. 이후 신학교에 진학하여 목회자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79년 명동 YWCA위장결혼식 사건으로 다시 수배가 떨어져 10개월 동안 도피생활 끝에 기소유예 처분을 받았다. 이후에도 신앙인이자 사회활동가로 적극 활동하다가 현재는 목사 은퇴를 하고 평신도로서 평범한 여생을 꿈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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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형택77년 11월 11일 민주구국투쟁선언문사건, 당시 시위의 주동자로서 당시 학내 상황에 대한 진단과, 시위 동기, 계획과 결행 과정 전반에 대한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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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건만경제학도가 되려 했는데 학과 공부를 소홀히 하는 바람에 해군사관학교를 다니다가 2년 늦게 1969년 연세대 정외과에 입학하였다. 3선개헌반대운동 때 행동대장 역할을 하다가 선배들의 눈에 띄고 한국문제연구회(한연회)에도 가입해 학생운동의 길로 들어섰다.
연세대 학생운동은 거의 한연회 단일 라인으로 이루어진다. 총학생회, 정법대, 서클연합회, 민권수호투쟁위원회 등등의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각종 집회·시위는 한연회가 너무 나서는 모양을 띠지 않게 주의를 분산시킨 결과로 봐야 한다. 1970년 12월에 교련강화반대를 내걸고 행동을 취하기 시작하였다. 현역 교관이 캠퍼스에 들어오는 것부터 막자는 취지로 총학생회를 설득하기 위해 그렇게 시작했지만 싸움이 가열되면서 자연스럽게 교련철폐운동으로 전환되었다.
1971년 한연회 회장으로 지목되었으나 정법대 학생회장 선거에 나가는 바람에 임시로 허소길 회장 체제로 운영되었다. 그런데 선거에서 떨어져 5월 임원 개선을 통해 한연회 회장을 맡아 교련반대운동에 본격적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서울법대 채만수를 통해 김근태, 이신범 등으로부터 전국학생연맹 조직을 넘겨받았다. 윤재걸 선배의 범대학민권쟁취청년단은 한연회보다 윤 선배 개인 차원에서 조직·활동한 것이다. 거기에 관여한 부분은 없다. 전국학생연맹은 외대 선경식 체제로 출범하려 했으나 여러 사람이 남산 중앙정보부로 끌려가고 그 다음날 위수령이 내리면서 무산되었다. 김대중과 관련 여부에 대해 혹독한 조사를 받고 군에 강제징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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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택77년 11월 11일 민주구국투쟁선언문사건, 당시 시위의 핵심활동가로서 학내상황에 대한 진단, 시위 동기, 계획과 결행 과정 전반에 대한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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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훈성장 과정, 한신대 입학 경위 및 대학내 활동, 77년 '신앙고백사건' 주모과정, 감옥 및 출소후 생활, 민중교회운동 참여와 현재의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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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복1970년대 연세대 학생운동 주체세력으로서의 이념써클의 내력, 1973년 김대중 납치미수사건 관련 서대문경찰서에서 극심한 고문을 받음, 1974년의 박대선 총장 사퇴운동, 연세대 개혁운동, 1975년 3,4월 연세대 시위 조직과정, 민중교회 사목과 관련한 현재의 사회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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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윤구술자는 자신의 어린 시절과 학창시절을 아주 상세히 진술하였다. 이로써 구술자의 가치관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확인할 수 있었다. 전남대학교 국문과 시절 「함성」·「고발」지 사건으로 자신의 가치관이 변하고 형성되어 가는 과정, 1973~74년 학생운동과 민청학련에 관한 일련의 내용을 상세히 진술하였다. 구술자가 1974년 4월 민청학련과 관련하여 학내 시위를 준비하였으나 실패한 과정, 그리고 그 실패 원인에 대한 구술자의 개인적 생각도 확인할 수 있었다. 이후 조사 및 재판과정, 녹두서점 운영, 5·18민주화운동과 관련한 구술자의 활동을 자세히 확인할 수 있었다. 면담을 마무리하며 구술자는 한국사회가 갈등을 극복해나갈 충분한 힘을 가지고 있으며, 구세대가 신세대를 믿고 지원해주어야 한다는 생각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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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준부산에서 보낸 어린 시절, 서울대 사회계열 입학 배경과 초기 활동, '한국사회연구회' 가입과 활동, 심포지움 준비 및 사건 당시상황, 사회학과 백서 사건, 부산지역에서의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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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택1977년 11월 벌어진 서강대 세차례 시위의 직접적인 참여자는 아니었지만 민청학련부터 이어지는 서강대 학생운동의 중심에 있었기 때문에, 시위의 숨겨진 이야기나 70년대 서강대 학생운동 내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