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술컬렉션
강제징집 녹화사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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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문수김문수는 1961년 경북 안동군에서 출생했다. 아버지가 공무원이었지만, 경제적으로 어려워 중학교 과정을 비인가 시설에서 공부하고, 검정고시로 이수했다. 성동기계공고에 입학했으나, 적성에 맞지 않아 자퇴했다. 연합고사를 보고 영동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영동고등학교는 명문고였으며, 진보적인 학교였다.
1981년 3월에 서울시립대학교에 입학하고, 1982년 무역학과로 진급했다. 무역학과에도 진보적인 교수들이 있었다. 서울시립대는 입학 정원이 적었고, 등록금이 낮았다. 1981년에 민족문화연구회에 가입해 활동했다. 1982년 10월 초 영등포산업선교회에서 개최된 원풍모방 노동자들의 집회에 참가했다가 경찰에 연행되어 영등포경찰서에 구금되었다. 경찰은 조직사건을 만들기 위해 거의 매일 밤마다 남영동 대공분실로 데려가 폭행과 고문에 의한 조사를 벌였다.
이 사건으로 인해 강제징집 되었다. 103보충대를 거쳐 강원동 원통 소재 12사단 신병교육대에 입소했다. 신병교육대에서도 폭행을 당하고 주시를 받았다. 12사단 오지에 배치되어 정말 고생했다. 부대 내에서도 보안대로부터 주기적으로 감시를 당했고, 고참이 되었음에도 대우를 받을 수 없었다. 심지어 전역 전날까지 근무를 섰다. 전역을 3개월 앞두고 사단 보안대로 호출되어 1주일간 폭행을 동반한 녹화 교육을 받았다. 휴가 중에도 감시를 받아 외출을 하지 않았다. 자신의 경험으로 볼 때, 이윤성의 죽음은 분명 살인이다.
1985년 5월 복학을 포기하고 건설현장으로 들어가 노동조합을 조직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1986년에는 전혀 예기하지 않게 건국대 점거농성사건에 연루되어 유죄판결을 받았다. 노동현장에 들어가기 위해 자격증을 취득했으며, 1988년 취업했다. 그러나 신분이 탄로 나 퇴출이 되었고, 여러 회사를 전전했다. 이후 인천지역에서 합법과 비합법 노동운동을 했다. 1990년부터는 국민연합과 사회당 등에서 활동했다. 1992년 4월 사노맹 사건에 연루되어 수배 상태가 되었고, 1999년에 해제되었다. 강제징집과 녹화사업 그리고 사회운동으로 인한 트라우마가 있다. 특히 분노조절장애가 느껴질 정도로 심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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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보김형보는 1962년 서울에서 출생하고, 1981년 3월 연세대학교 사회복지학과에 입학했다. 누나가 기독교 사회운동에 몸담아서 일찍이 민주화운동의 영향을 받았다. 대학교 면접날 누나의 소개로 전상규를 만났으며, 당일 ‘평화문제연구회’에 가입했다. 써클에서 사회과학을 공부했으며, 학내의 학생운동에서 크고 작은 역할을 했다. 1981년 11월 25일 학내 시위에서 경찰에 연행되던 한민호를 구출하다가 연행되었다. 이 일로 강제징집되었다.
1981년 11월 28일 101보충대로 이송되었고, 5사단 신병교육대에서 훈련을 받았다. 27연대 ○대대 5중대로 배치받았다. 군 생활은 만연한 폭행을 제외하고는 특별하게 문제가 없었으나, 1982년 6월 평소 친밀했던 부사관에게 편지를 부쳐달라고 한 일이 사건이 되었다. 사단보안대를 걸쳐 서울 국군보안사령부, 후암동 소재 보안사 공작분실, 서빙고 대공분실에서 무자비한 폭력과 고문을 동반한 조사를 약 한 달 동안 받았다. 사단 헌병대 영창에 수감된 상태에서 군사재판을 받았는데,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실형을 선고받았다.
36연대 13중대로 재배치되어 복무하다가 1984년 6월 14일 전역했다. 군사재판을 받은 이후에는 군 생활이 상대적으로 편해졌다. 전역한 뒤에는 복학을 포기하고, 1991년경까지 인천 일대에서 노동운동에 투신했다. 참여했던 노동운동 조직들이 탄압 등으로 해체되면서 다양한 영역과 부분에서 경제활동과 사회활동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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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영필노영필은 1960년 전남 해남군에서 출생했다. 고향에서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졸업하고, 1976년 광주시 소재 전남고로 진학했다. 전남고 교사들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1979년 2월에 졸업했으나, 질병으로 입원과 요양을 하여 1981년 3월 전남대 철학과에 입학했다.
전남대에서는 사회조사연구회에 가입해 활동했다. 사회조사연구회는 박관현 등이 몸담았던 곳으로 학교에서 유명한 서클이었다. 총학생회 건설운동에 참여했다. 1983년 9월에 계획과 달리 학내 시위에서 경찰에 연행되었다. 10월 3일 31사단으로 이첩되어 입영 절차를 밟았다. 101보충대를 걸쳐 6사단 신병교육대에서 훈련을 받았다. 이곳에서 다른 학교 강제징집자들을 만났다.
6사단 2연대 1대대 1중대에 배치되어 군대 생활을 했다. 특수학적변동자라는 이유로 괴롭힘은 없었다. 다만 소속 중대가 GOP 근무에서 배제되었는데,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사단 항공대에 파견되어 경비를 서다가 1984년 3월경 사단 보안대로 호출되어 폭행과 고문을 동반한 조사를 받았다. 1984년 가을경 소속 중대가 새로운 사단 창설을 위해 이동했는데, 경북대 노명식과 배제되어 천안 소재 군단 보안대에서 조사를 받았다. 이후 7연대 박격포 전투지원 중대로 재 배속되었다. 전역 3개월을 앞두고 소대장과 갈등을 빚었다.
1986년 전역 이후 학교 상황을 보니, 많이 달라져 있었다. 2학기 복학 이전에 철학 정풍운동을 벌여 갈등을 빚었다. 1988년 2월에 졸업하고 한살림운동을 1년간 하다가 1989년 옥천여상에 교사로 임용되었다. 1990년 12월에 결혼하고, 1991년 2월에 전교조 활동을 이유로 해고되었다. 1992년 대학원에 진학하여 공부했으며, 시간강사 등을 역임했다. 2000년에 특별채용 되었고, 2003년에 전남대 철학과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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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지석서지석은 1961년 서울에서 출생하고, 1981년 3월 한국외국어대학교 영어과에 입학했다. 고등학교 재학할 때 문예부에서 활동했으나, 특별한 사건은 없었다. 대학 진학 후 선배 김희상의 영향을 크게 받았고, 사회과학을 공부했다. 영어과 입학 환영회에서 정신적으로 큰 충격을 받았으며, 학년 전체 대표가 되었다. 주로 영어과 학생들을 연합하고, 조직하는 활동을 했다.
1981년 11월 문무대 병영집체교육을 받다가 사건이 발생했다. 고려대학교 학생들이 시위를 주도했으나, 피해는 한국외국어대학생들이 더 받았다. 모두 50여 명이 퇴학 처리되고, 강제징집 되었다. 103보충대를 걸쳐 21사단 65연대에서 훈련을 받고, 63연대로 배치되었다. 보안대가 부대 내 사병으로 하여금 감시하고, 보고하도록 했다.
1984년 1월 사단보안대로 호출되었고, 서울 국군보안사령부로 인계되었다. 과천 보안대로 이송되어 문부대사건에 관한 조사를 받았다. 특별하게 진술할 내용이 없었다. 사단보안대로 돌아왔는데, 부대 간부들도 어떤 이유로 호출되었고 조사를 받았는지 알지 못했다. 군종사병과 음어병으로 근무했으며, 군기반장으로 위험한 상황에 처하기도 했다. 일반하사 교육대상자로 추천되었다가 특수학변자로 드러나 퇴소했다. 혹여 발생할 수 있는 상황에 대비해 매일 학교 동료들에게 편지를 썼다.
1984년 7월에 제대하고, 1985년에 복학하여 학내민주화운동에 관여했다. 이로 인해 1987년에 유죄판결을 받았는데, 6월항쟁의 성과로 석방되었다. 9월에 복학하여 다시 학내민주화운동을 했다. 졸업 후 학원 등을 운영하며 생계활동을 했다. 강제징집과 녹화사업은 김창식과 최경조에 대한 조사를 통해 밝힐 수 있다고 본다. 문무대사건 관련자들의 피해는 여러 가지 의구심이 있으며, 별다른 활동이 없이 피해가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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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병기윤병기는 1961년 경북 청송에서 출생하고, 초등학교 2학년부터 대구에서 생활했다. 1980년 2월에 대구 달성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같은 해 3월 경희대학교 사학과에 입학했다. 1980년 민주화의 봄 국면에 나름의 방식으로 참여했으나, 학생운동에 몸담은 것은 아니었다. 흥사단아카데미에 가입하여 서클활동을 했다. 본격적으로 학생운동을 했던 것은 1980년 2학기 중간고사 직전 무렵이었다.
경희대 학생운동과 관련한 주요 사건들을 지켜보았거나 참여했으며, 백단학회로 파견되어 공개활동을 하기도 했다. 주요 사건은 1980년 9월 9일 유인물 배포와 자해사건, 1982년 6월 11일 도서관 앞 시위, 1982년 10월 공대 이전과 건축과 폐지 반대시위였다. 이들 사건과 관련해 학생들 일부가 강제징집이 되었다. 윤병기는 1982년 10월 사건과 관련되어 무기정학 처분을 받았고, 특수학적변동자로 분류되어 혼자만 강제입영이 되었다.
윤병기는 무기정학 처분을 받고 대구 집에 내려와 칩거하던 중에 1983년 3월 30일 천안 공설운동장으로 소집되었다. 주거지나 주소지와 전혀 무관한 천안 공설운동장으로 징집이 되었고, 101보충대를 걸쳐 28사단 신병교육대에서 기초군사훈련을 받았다. 28사단 신병교육대에는 16명의 강제징집자들이 있었다. 매일 밤에 진술서를 작성했으며, 16명이 4·19기념식을 갖기도 했다. 28사단 82연대 3대대로 자대배치를 받았다. 군생활은 감시 하에 이루어졌고, 활동에 제약이 있었다. 특히 선임하사의 괴롭힘이 극심했다. 사단 보안대로 호출되어 10여 일 동안 조사를 받았다. 사단 조사를 받은 후에는 군생활이 나아졌으나, 선임하사의 폭행과 구타는 계속되었다. 휴가와 복귀는 보안대 신고 절차를 걸쳐야 했다.
1985년 6월 15일 전역한 후, 1986년 1월경부터 노동현장에 투신했다. 경희대 선배들의 소개로 인천지역에서 오랜 기간 노동운동을 했다. 노동운동을 하면서 1996년에 경희대를 졸업했다. 2003년에 선배들의 정당활동을 도왔고, 현재는 인천시설관리공단에서 근무하고 있다. 현재 강제징집 녹화·선도공작 진실규명추진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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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범이용범은 1963년 충북 청원군에서 출생했다. 초등학교 2학년부터는 논산에서, 5학년부터는 대전에서 생활했다. 대전고등학교 재학 시 문예반에서 열심히 활동했고, 선배들을 통해 세상 소식을 전해 들었다. 글쓰기를 좋아했고, 두각을 드러냈다. 1981년 3월 동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 입학했다.
동국대에 진학하니 학생운동을 하던 친구들로부터 연락이 왔고, 최석민의 권유로 만해사상연구회라는 언더서클에 가입했다. 공개서클이었던 불교학생회에서도 활동했다. 선배들의 활동과 법정 진술에서 크게 감동을 받았고, 성장하는 듯했다. 학생운동을 하면서도 학보사에 소설을 연재하는 등 문학도의 자질을 연마했다. 1982년 2학기에 들어 학생운동의 방식에 회의를 갖게 되어 거리를 두었으나, 자신에게 알리바이가 맞춰지고 있었다.
1983년 3월 휴학계를 내고 선후배 집을 전전하던 어느 날 새벽 경찰에 연행되었다. 경찰은 그동안 구술자를 추적하고 있었다. 중부경찰서로 연행되어 구속과 입영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도록 했다. 협박을 받은 상태에서 입영을 선택하자, 다음 날 성북경찰서로 이첩되었다. 이곳에서 성균관대 등의 강제징집자들을 만났다. 101 보충대를 걸쳐 28사단 신병교육대에서 훈련을 받았다. 신병교육대에서는 한 차례 면담 조사가 있었다.
28사단 80연대 4대대 14중대로 자대 배치를 받았다. 그해 겨울 사단 보안대로 불려가 조사와 녹화 교육을 받았다. 성균관대 박경식은 병역 의무 대상자가 아니었으나, 강제징집 되어 크게 고생했다. 조선대학교에 재학 중이던 어느 강제징집자도 고초를 겪었다. 최온순이 사망했다는 소식은 사건이 난 이후에 휴가에서 들었다. 군 생활 동안 꾸준하게 감시를 받았다. 휴가 중에는 물론 전역 이후에도 경찰이 감시했다.
1985년 6월경 전역하고, 1986년에 복학했는데, 학생운동 지형이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예비역협의회에서 활동하기는 했으나, 학생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는 없었다. 졸업 후 문학잡지사에서 일하다가, 프리랜서로 전향했다. 동국대 총장의 추천으로 기획예산처 변양균 장관실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현재는 IT기업에서 8년째 근무하고 있다. 시흥YMCA 이사장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강제징집과 녹화사업의 청산은 기록하고 정리하는 것만으로 우리의 몫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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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호이준호는 1962년 경상남도 사천군에서 출생했고, 1980년 3월 서울대학교 자연과학대학에 입학했다. 형들이 민주화운동에 관계를 맺었으나, 특별히 영향을 받지 않았다. 고등학교 선배들이 회원으로 있던 써클 휴머니스트에 가입해 사회과학을 공부했다. 5월에 문부대에서 병영집체교육을 받았고, 귀교하여 바로 서울역 집회에 갔다. 5월 18일 새벽 4시경, 기숙사에서 자다가 계엄군에 의해 폭행을 당하고 쫓겨났다.
휴교령 해제 후, 학교 일정은 순탄하지 않았다. 휴머니스트 활동은 운영 방식에 대한 입장 차이로 2학년 때부터 소원했다. 학도호국단 학생장이었던 배명규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당시 서울대학교 자연과학대학이나 공과대학 학생들은 군대에 가지 않고, 대체복무를 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6사단에서 전방입소교육을 받았는데, 결국 강제징집되어 이 부대에서 근무했다. 1982년 자연대 학생장으로 선임된 송태수가 총부학생장이 되면서 이어받았다. 학도호국단 간부들은 학교가 보내준 유럽연수에서 이후 활동을 논의했고, 학생운동의 일환으로 나타났다.
학과장이 11월에 호출하여 학사징계와 입영을 선택하게 했다. 학사징계를 받겠다고 했는데, 무기정학 처분을 하고, 지도휴학 처리를 해서 강제징집되었다. 101보충대를 걸쳐, 6사단 신병훈련소에서 교육을 받고, 27포대에 배치되었다. 신병훈련소에서는 별다른 조사를 받지 않았으나, 자대 배치 후 일정 시점에 보안대를 다녀오고, 상급 보안대에서 8∼9일 동안 조사를 겸한 교육을 받았다. 이후 한 달에 한 번씩 보안대에 들어가 조사를 받았다. 자대에서도 감시와 관리를 받았는데, 포대장이 보안대에 유선 보고하는 소리를 직접 들었다. 1983년 12월경 서울 진양상가(보안대)에 호출되어 이른바 ‘짭새 휴가’를 받았으나, 별다른 성과가 없자 복귀시켰다.
다른 강제징집자들과 달리 민통선 내에서도 근무했다. 편지는 일체 쓰지 않았다. 보안대 교육을 받은 이후에는 부대원들로부터 간섭받지 않았다. 전역 후 복학하고, 대학원에 진학했으며, 유학했다. 강제징집 트라우마는 여전히 남아 있다. 강제징집 문제의 핵심은 피해자는 있으나, 아무도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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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화용정화용은 1961년 서울 서대문구에서 출생했다. 부모님은 모두 월남인이었다. 초등학교 입학 전에는 부산의 고아원에서 생활했으며, 입학 직전에 서울로 올라와 부모의 얼굴을 봤다. 학교생활은 성실한 편은 아니었으나, 1979년 3학년에 서울대를 목표로 열심히 공부하다 폐결핵을 앓았다. 이로 인해 재수하여 1981년 성균관대학교 낙농학과에 입학했다.
1981년 2학기부터 농우회에 가입하여 학생운동을 시작했다. 1982년 자연과학대 캠퍼스가 이전하면서 이후의 생활은 주로 수원에서 이루어졌다. 기질상 학생운동 선배들과 운동 방식 등에 대해 마찰을 빚기도 했다. 성균관대학교에서 여러 사건들이 있었으나, 1982년 11월 학생의 날 시위가 가장 충격이 컸다. 이 일로 연행된 학생들이 많았고, 파장은 강제징집으로 이어졌다. 1982년에 농과대학 부학생장이었던 것도 영향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983년 3월 30일 집에서 자다가 경찰에 연행되어 학교 보직자들이 참관한 가운데 구속과 입영을 선택하게 했다. 연행된 82학번 후배 2명의 석방을 조건으로 입영했다. 1983년 3월 31일 101보충대를 걸쳐 28사단 신병훈련소에 입소했다. 강제징집자들 십여 명이 함께 훈련을 받았다. 28사단 82연대로 자대배치를 받았다.
군대 생활은 성격상 녹록하지 않았으나, 중대원들에게는 나름 인기가 있었고, 사격 능력이 있어 좋은 평가를 받았다. 1984년 1월 녹화사업 대상자로 선정되어 사단 보안대를 걸쳐 1월 10일 경기도 과천 보안대로 이송되었다. 이곳에서 폭력을 동반한 조사를 7박 8일 동안 받았다. 이후 서울 진양상가로 이첩되어 프락치 공작 압박을 받았다. 거짓으로 보고한 것이 탄로나 폭행을 당해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군대에서의 치료는 형식적이었고, 이때의 후유증으로 지금도 고생하고 있다. 1월 말경 자대로 돌아와 1985년 6월경 전역했다. 이 과정에도 많은 사건들이 있었다.
전역 후 노동현장으로 들어갔으나, 상이 후유증이 악화되어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선배들이 창업한 부동산 뱅크에서 일하다가, 독립해 사업체를 운영했는데, 결국은 망했다. 1,200명이나 되는 청년들을 프락치로 활용하려했다는 것은 심각한 문제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무엇보다 진상을 제대로 밝혀야 한다. 그동안 녹화사업을 당했다는 것은 거의 밝히지 않았으나, 정말 힘들었고, 자괴감이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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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종주조종주는 1964년 전남 해남군에서 출생했다. 아버지가 경남 거창고등학교 교사로 부임함에 따라 4세에 거창으로 이주했다. 아버지는 곧 교사를 사직하고 목사가 되었으며, 사회운동에 열심이었다. 조종주는 1979년 거창고등학교에 입학하여 1982년 2월에 졸업했다. 거창고는 상당히 진보적인 성향의 학교였다.
전남대학교에 진학하려 했으나, 가족의 반대로 1982년 3월 경북대학교 수의학과에 진학했다. 1학년 1학기를 마치고, 노동운동을 결심했는데, 큰누나 지인의 설득으로 뒤로 미뤘다. 고등학교 친구들과 세미나 팀을 꾸려 사회과학 공부를 했으나, 잘 운영되지 않았다. 2학년이었던 1983년 4월경 운동 선배들이 대거 강제징집되거나 시위로 사라졌다.
1983년 8월 23일 강제징집 되었다. 대구대 언더 서클인 디딤반의 MT사건에 연루된 것이다. 대공분실로 연행되어 조사를 받았다. 50사단으로 입소해 신체검사를 받고 군번을 부여받았다. 대구의 강제징집자들은 6사단 신병교육대로 보내졌다. 신병교육대에서 수차례 자술서를 작성했다. 가족들은 강제징집되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2연대 2대대 6중대 3소대 소총수로 자대배치 되었다. 중대를 대표해 노래하여 대대장 포상휴가를 받았다. 나이가 어려 입영대상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강제징집 되었던 것을 받아들일 수 없어 탈영했다. 어머니의 설득으로 복귀하여 사단 헌병대에서 조사를 받고 영창에 14일간 구금되었다. 자대 복귀하여 감시를 받고 지냈다. 부대가 GOP 근무에 투입되자, 1대대로 전출되었다. 1대대는 신막사여서 화단 관리병으로 배치되었다. 감시하기 위한 목적도 컸다. 녹화사업 대상자에서는 배제되었다.
1982년 2월 전역 후, 현장 활동 준비를 하다가 여러 집회와 시위에 합류해 유죄판결을 받았다. 1989년 학교 당국에 항의하여 복학하여 그해에 수의대 학생회장을 맡았다. 1993년에 제적되었다. 복학할 당시에 농민운동을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동생과 농사를 짓고, 김치공장을 운영했다. 강제징집과 녹화사업의 양상이 다양하여 어려움이 있다. 민주화운동의 주역이라는 관점에서 진상규명과 향후 활동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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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창원진창원은 1961년 경남 합천군에서 출생했다. 아버지는 지역에서 정치 활동에 참여했던 사람이었다. 박정희 시대에는 공화당에 몸담았다. 진창원은 대학 진학 시까지 지극히 평범한 학생이었다. 중학교 2학년 무렵에 상경하여 서울고를 졸업하고, 재수하여 1980년 3월에 고려대에 진학했다. 2학년에 법학과를 선택했다.
대학 1학년 때는 서울의 봄 시국이었는데, 사실상 개인 자격으로 참여했다. 1980년 5·18민주화운동에 대해서는 빚진 마음이 크다. 1982년 법대 학생장에 당선되었다. 법대 학생들은 학생운동은 물론 학생장에도 관심이 없었다. 구술자는 애초에 고시를 목표로 삼지 않았다. 학도호국단 총학생장에 출마하여 당선되었으나, 선거인단의 문제로 선거가 다시 실시되었다. 후보자들이 약소한 것과 달리 특정인이 단독 출마하여 무투표 당선되었다. 법대 학생장 활동은 서클에서 온 학생들의 도움을 받았다.
1982년 9월에 경찰에 연행되어 조사를 받은 바 있다. 그해 11월 2일 학생의 날 연합시위에서 연행되어 강제징집 되었다. 11월 6일 102보충대를 걸쳐 5사단 신병교육대에 입영했다. 성균관대학교 학생들 19명도 함께 강제징집 되었다.
배치 받은 자대는 GOP에 투입해 근무하고 있었다. 1983년 8월 말경 사단 보안대에서 조사를 받았다. 폭력과 고문을 받지 않았고, 기간병들과 함께 내무반에서 생활했다. 서울 충무로 진양상가로 보내져 조사를 받았다. 차비를 받고 프락치 사업에 동원되었으나, 조직 활동을 하지 않았기에 별다른 것은 없었다. 보안대 조사 이후 자대에서의 군 생활은 원만했다. 녹화사업은 부대와 개인에 따라 상황이 다른 것 같다.
1985년 1월에 전역하고 복학했다. 2학기에 휴학하고 인천과 성수동 등지에서 노동과 노동운동을 했다. 1986년 9월에 4학년 2학기로 복학해 졸업했다. 이후 노동운동을 하다가 6·10민주항쟁과 대통령 선거운동에 참여했다. 삼성전자에 입사하여 초대 노조위원장을 역임하고 있다. 강제징집과 녹화사업은 진상규명에 초점을 두어야 한다. 그리고 책임을 물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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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병윤황병윤은 1961년 경북 영천시에서 출생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대구로 전학했고 1980년 3월 대구대 물리학과에 입학했다.
1980년 5월 대구에서도 민주화운동이 있었다. 대구대에서는 5월 14일 구술자와 친구 2명이 주도한 시위가 있었다. 다른 학교에 경찰이 집중 배치되어 대구대 학생들은 도심으로 진출할 수 있었고, 연좌시위를 벌였다.
1980년 하반기에 교회 선배인 경북대 하정호로부터 5·18민주화운동에 관한 소식을 들었다. 하정호를 통해 야학운동에 참여했는데, 대구대 학생운동 조직의 결성이 시급하다고 판단하고 활동을 중지했다. 대구대에서 디딤반이라는 언더 서클을 결성했다. 1983년 6월경 회원의 고향인 거창 남덕유산에서 MT를 했는데, 주민이 신고하여 경찰이 조사를 시작했다. 학교에서도 경찰과 같은 수준의 조사를 했고, 결국 경찰로 이첩되었다. 구속되었으나, 아버지 친구의 도움으로 취소되고, 강제징집 되었다.
8월 23일경 대구 주둔군인 50사단에서 신체검사를 받고, 6사단 신병교육대에 입소했다. 6사단에서 강제징집된 학생들이 다수임을 알았고, 교류했다. 6사단 2연대 3대대 9중대로 배치되어 생활하다 1984년 4월 혹은 5월경 사단 보안대로 호출되었다. 녹화교육을 받고, 한 달 휴가증을 주며 대구 태백공사로 내려가 지시를 받도록 했다. 태백공사는 대구대에 등장한 낙서 작성자를 파악하라는 이른바 프락치 활동을 강요했다. 폭행과 고문을 당하지는 않았으나, 심리적인 압박이 상당했다. 자대 복귀하고 보니 연대 보안대장이 친척이었다. 이후 1년간의 군 생활은 양호했다. 강제징집자들을 여러 모로 차별을 받았는데, 녹화사업의 방식은 사람과 부대에 따라 달랐다.
1985년에 전역하고, 1985년 1학기에 복학했다. 총장과 면담하고, 학점이 남았으나, 1986년 2월에 졸업했다. 노동현장 투신을 준비하여 5월에 대구 3공단의 공장들에 위장취업했다. 위장취업이 발각되어 현장에서 나왔으나, 오랜 기간 노동운동을 했다. 강제징집과 녹화사업의 사례들은 다양하며, 강제징집이 안 되었으면 다른 사건들에 연루되어 고초를 치렀을 것이다. 강제징집과 녹화사업으로 인한 트라우마를 호소하는 사람들이 많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