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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승우전라북도 옥구(군산)에서 태어나 청소년기에 농촌 계몽운동가가 되리라 희망했지만, 축산학과에 진학 후 전공보다는 사회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군복무 후 늦게 복학한 뒤, 농업을 전체 산업 속에서 다룰 수 있는 직업을 찾다가 언론인이 되기로 결심했다.
1975년 합동통신사에 입사하고 정권의 언론 감시, 외신 보도 통제의 실상을 알고 문제의식이 생겼다. 10·26사건 이후 민주화의 바람이 불자 유명무실한 기자협회를 개혁하고자 회사 선배인 김태홍이 기자협회장이 되도록 지원했다.
기자협회의 주도 아래 검열 철폐를 주장하다가 비상계엄령의 확대로 자유언론 운동이 중단되었다. 이후, 국시부정이라 이유로 8월 4일 강제해직 당했다. 취업이 제한되자 대학원에 진학하여 언론사회학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어렵게 대우그룹에 입사하여 80년해직언론인협의회와 언협 활동에 참여했다.
6월항쟁 이후에 퇴사하여 <말>지 편집장을 맡았고 12월 대선을 앞두고 공정보도를 위해 노력했다. 한겨레신문 창간 작업에 참여하였다. 사회부장 시절인 1990년 9월 보안사 민간인 사찰 실태를 폭로하여 우리 사회에 큰 충격을 줬다. 여론매체부장으로서 본격적인 미디어 비평 시도했다. 나아가 언론계의 자정과 언론인의 윤리 강조하여 언론의 민주화에 기여했다.
한겨레 퇴사 이후, <한겨레신문의 창간 과정에 관한 사회학적 연구>라는 박사 학위 논문을 저술하였다. 민언련 이사장 시기에는 민언련 후원회원 증대와 시민운동의 변화에도 기여했다. 조용수와 민족일보 사건, 국가보안법, 한미상호방위조약,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 등 다양한 분야에 관한 연구와 저술활동을 하고 있다.
특히 80년 언론인 해직 사태의 진상규명, 명예회복, 피해자 보상을 위하여 오랜 세월 앞장섰다. 2021년 광주 특별법 개정안이 통과되어 보상이 가능하게 됐지만 입법상 오류가 발생하여 이를 개정하는 데 전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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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언
1952년 충남 천안시 근처 직산에서 천안중, 서울고를 거쳐 1972년 서울대 화학과에 입학했다. 1973년 10월 2일 유신 이후 최초의 ‘유신 철폐’ 학내 시위에 참여했으며, 19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구속, 같은 해 8월 기소유예로 석방되었다. 요주의 인물로 감시를 받으며 군복무를 마쳤다. 1979년 11월 ‘YWCA위장결혼식사건’으로 서울시 서빙고동 국군보안사령부 대공분실에서 조사 받으면 고초를 겪었고, 구류 29일 처분을 받았다.
1980년 4월 한국일보사에 입사하여, 견습기자 시절 서울시청에 가서 신문기사 사전검열을 받았다. 1985년 1월 온산공단 주변 주민들이 공해병에 시달린다는 사실을 보도하였다. 훗날 ‘온산병’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는 한국환경운동사에서 기념비적인 보도였다.
한국기자협회 한국일보 분회 조직에 앞장섰고, 1986년 4월 18일 분회 총회를 열었다. 같은 해 우연히 ‘보도지침’ 보관철이 편집국 서무 책상에 있는 것을 발견하여 이를 복사했다. 이후, 이 복사본은 ‘언협’에 전달하였다. 당시 언협 공동대표 겸 사무국장 김태홍이 김정남 등과 상의하여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과 공동으로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 보도지침은 <말>지 특집호에 실려 세상에 알려졌다.
1986년 12월 들어 김태홍, 신홍범이 경찰에 연행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자신도 곧 연행될 것을 예감했다. 12월 15일 출근길에 남영동 대공분실로 연행되어 조사를 받고 구속되었다. 1987년 6월 3일, 징역 8월에 자격정지 1년, 집행유예 1년을 선고받고 당일 석방된다. 비교적 관대한 처벌을 받은 이유는, 보도지침 사건 자체가 처벌할 명분이 없었고 외국에서도 한국 정부에 압력을 가했기 때문이다.
1987년 7월 한국일보 문화부로 복직한 다음, 그해 10월 서울 YMCA에서 ‘영등포 조기축구회’ 모임인 것처럼 위장하여 비밀리에 한국일보사 노동조합을 결성했다.
1998년 퇴사하여 ‘언론개혁시민연대’ 초대 사무국장을 역임하는 등 언론개혁운동에서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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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득
1950년 한국전쟁 시기에 경남 함안에서 출생한 박성득은 고려대 사회학과에 입학하였다. 그는 대학 시기 세상사에 무심한 편이었다. 졸업 후 우연히 경향신문사 편집기자 채용시험에 지원해서, 뜻하지 않게 언론계에 입문했다.
그는 소장파 선배들과 자주 어울리며 언론 상황에 대하여 문제의식을 공유했다. 1980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의 참상을 보도하지 못하자, 언론검열에 맞서 신문제작 거부를 주도했다. 이로 인해 계엄 포고령 위반으로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석방된 다음부터 1975년 해직기자 선배 및 민주화운동 인사들과 교유하게 된다.
1984년 12월 민주언론운동협의회가 발족하자 초기 회원으로 활동했고, 언협의 기관지 <말>지 2호부터 제작을 담당했다. 당시, 지하 언론인 <말>지의 제작은 매우 어렵고 위험했다. 해직기자들은 실제 제작에는 어두웠다. 구술자는 자처해서 이 일을 맡은 다음, 충무로 인쇄골목에서 비밀리에 제작하는 데 성공했다. 1986년 9월 <말>지 특집호 보도지침을 발행하고 나서, 그는 도피생활을 시작하여 마포구 대흥동에서 은신하다가 6월항쟁을 맞이했다.
6월항쟁 이후 시민의 역량에 주목한 해직기자들은 새로운 제도권 신문 창간을 도모하게 된다. 구술자는 기획단계부터 여기에 동참하여, 제작 부문을 담당했다. 활자를 사용한 기존의 제작방식으로는 창간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식했고, 이에 CTS라는 컴퓨터조판 방식을 실험적으로 도입하게 된다.
그는 전례가 없어서 불확실하던 이 제작 시스템 구축에 성공하여 한겨레신문 창간에 힘을 보탰다. 이후 판매이사, 사업이사 등을 역임했고 2004년 퇴임했다.
구술자는 언론계 입문 이래, 겪은 일과 사람과의 인연에 감사하며, 노년에도 언론계에 기여할 수 있는 길을 찾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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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우정1950년 충남 홍성의 농가에서 태어난 그는 대학생 시절 문학청년이었지만 작품 창작보다는 비평에 더 재능이 있다는 걸 알게 된다. 1975년 경향신문사에 입사한 다음 신문사의 친정부적인 태도에 실망하고 정신적 방황을 하게 된다. 이 시기 사회과학 서적과 외신을 접하여 국내 현실과 국제 정세에 대하여 눈을 뜨며 지식인으로 지적 성장을 하였다.
77년 12월 본인이 작성한 기사가 불순하다는 혐의로 남영동 대공분실에 연행되어 조사를 받으면서 억압적인 국가권력을 실감한다. 79년 6월 정권을 찬양하는 왜곡기사가 나가자 소장파 기자들과 함께 성명서를 발표하고 편집국 간부에게 항의했다. 이 사건은 유신시대 최초의 자유언론운동이라고 평가받는다.
김영삼 신민당 총재 직무 정지와 관련하여 정권을 대변하는 보도 행태에 항의하다 편집국 외로 축출되기도 했다.
1980년 5월 계엄당국에 항의하여 보도 검열과 신문 제작의 거부를 주동했다. 6월 8일 남영동으로 연행되어 가혹행위를 당하며 거짓 진술을 하게 된다. 결국 계엄포고령 위반으로 징역 1년과 집행유예 선고받았다. 옥중에서 사표를 쓰지 않고 버티다 강제 해직당한다.
석방 후, 현대그룹에 입사했고 언협 창립과 운영에 동참한다. <말>지 편집장을 맡아 객관적이고 사실에 충실한 매체를 발행했다. 1986년 보도지침이 입수되자 홍수원과 <말>지 특집호 보도지침을 제작한다. 전두환 정권의 언론통제 실상과 함께 권력과 언론의 유착을 폭로하여 국민적 분노를 일으켰고, 정권의 반민주적이고 폭압적인 면모를 고발했다. 보도지침 폭로는 1980년 언론운동의 대표적인 성과로 평가받는다.
6월항쟁 이후 <한겨레신문> 창간에 동참했고, 제11대 편집위원장과 논설주간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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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화강박화강은 전라남도 보성군에 태어났다. 사람에 대한 애정이 깊었던 부친은 언제나 덕이 있는 사람이 되라고 강조했다. 시골 공무원의 횡포에 당하는 아버지를 보고 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 하던 그는 친구의 권유에 따라 전남매일신문 입사한다.
재야인사의 동정을 보도하지 말라고 간섭하는 편집국장, 회사에 피해가 되는 기사를 금지하는 선배들을 보며 기자란 직업에 회의를 느꼈다. 정보기관원이 신문사를 수시로 출입하며 보도를 통제했고, 지역 언론인도 침묵만 지켰다.
1980년 소장파 기자들과 함께 ‘5‧13자유언론실천선언’을 주도했다. 이때 직접 작성한 선언문은 지난 시절 기자의 책무를 저버린 부끄러운 과거에 대한 반성문이었다. 광주항쟁의 진상 보도가 좌절되자 지하신문 발행을 생각하기도 했으나 계엄군의 만행을 보고 진실보도가 광주시민을 흥분시켜서 더 많은 희생을 초대할 수 있다고 판단하여 철회했다. 5월 20일 진실보도가 회사 측에 의해 좌절되자 이에 항의 하여 기쟈 26명이 함께 공동사표를 제출했다. 그리고 ‘사람이 개 끌리듯 끌려가 죽어가는 것을...’란 문구를 사직서에 넣어서 광주항쟁의 진실을 한 줄이라도 기록하고자 했다. 이 사직서는 3만부 인쇄되어 광주시민에게 배포되었다.
8월 7일 강제해직을 당한 후, 개인 사업을 했다.
<한겨레신문> 창간에 참여했고 광주·전남 지역 주주 모집에 기여했다. <한겨레신문> 광주 주재 기자로서 광주 송하동 양민학살 사건을 보도하는 등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에 앞장섰다. 들불야학을 운영하던 중 불의의 사고로 요절한 여동생 박기순은 마음의 상처로 남았다. 훗날 광주항쟁 중 전남도청에서 희생한 윤상원과 박기순의 영혼 결혼을 허락했다. 언론 통제와 순치는 권력의 속성이므로 언론인은 언론자유 수호를 위해 싸워야 된다고 믿는다. 언론인은 역사의 심판을 두려워해야 하고, 언론의 사명은 진실 보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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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한표
1942년 유복자로 태어난 성한표는 6‧25전쟁 중에 한날 할아버지, 할머니, 고모를 잃는 비극적인 가정사를 가지고 자랐다. 서울대에서 건축을 전공했으나 한계를 느끼고 언론계에 입문했다. 경제신문을 거쳐 1969년 조선일보에 입사한 그는 박정희 정권 아래서 진실을 보도하지 못하는 언론 현실을 개탄하다가 1974년 10월 자유언론실천선언에 동참하여 적극적으로 활동하다가 1975년 3월 강제 해직된다.
이후, KIST, 한국농촌경제연구원 등에서 근무한 그는 1984년 12월 민주언론운동협의회의 창립 회원으로 참여하여, 언협의 기관지 <말>지의 제작에 깊이 관여했다. 특히 커버스토리 ‘초점’이란 섹션을 담당하여 국내외 정치, 경제 등 정세를 심도있게 분석하였다.
이후 한겨레신문 창간에 동참하여 편집부위원장, 정치부장, 편집위원장을 역임하며 창간 초기 한겨레 내외부에 산적한 문제를 해결하며 구심점으로 활동했다.
1987년 12월 차기 대통령으로 민주정의당 노태우가 당선되면서, 정권 교체가 물거품이 되자 실망한 시민들은 한겨레신문 창간에 힘을 보탰고, 그 결과 국민주 신문 한겨레신문이 기적적으로 탄생했다.
이상적인 언론을 꿈꾸던 구술자는 한겨레신문이 보도, 광고, 영업 면에서도 정도를 지키기를 희망했다. 후배 언론인들이 자신의 전문영역을 개발하는 과정에서 더 깊이 생각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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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홍범
1942년 충북 진천군의 중농에서 7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난 구술자는 서울대 문리대 외교학과를 졸업하고 1968년 조선일보사에 입사했다. 외신부 리영희 부장 아래서 기자 수련을 받았던 그는 박정희 정권의 언론통제에 반감을 가졌다.
1974년 10월 24일 자유언론실천선언을 발표한 조선일보 기자들은 결의 사항을 실천하려 했다. 구술자는 입사동기 백기범 기자와 함께, 정부의 입장을 옹호하는 기고문만 게재하는 것이 문제가 있다고 판단하여 편집국장에게 이의를 제기했고, 이 때문에 그해 12월 18일 해임됐다. 1975년 3월 6일 조선일보 조선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 위원이 되었다.
생계를 위하여 한국증권업협회에서 근무하던 중 1983년 두레출판사를 인수하여 운영하였다. 1984년 민주언론운동협의회의 출범을 기획‧준비했다. 언협의 기관지 <말>의 제호와 편집 체제 등을 결정하였다. 1986년 보도지침의 폭로를 결정하고 같은해 12월 구속되어 1987년 6월 3일 집행유예로 석방된다.
이후 한겨레신문 창간 과정을 주도했으면 특히 지면 구상 논설위원, 논설주간을 지냈다. 한겨레신문 초기에 구성원 간의 갈등, 특히 조선투위와 동아투위의 미묘한 대립에 대하여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다.
구술자는 한겨레신문이 쇄신되야 하고, 언론개혁운동의 선두 주자가 되기를 소망한다. 신문에는 혼이 있어야 하며, 한겨레는 시대정신을 찾고 구현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현재 두레출판사를 운영하는 구술자는 조선투위 위원이자 원로언론인으로서 남은 생을 언론 개혁에 바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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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숙열유숙열은 유복녀로 태어나 계부 밑에서 사랑을 받으며 성장했다. 평범한 대학시절을 보내고 합동통신사 <리더스 다이제스트부> 입사했다. 거기서 만난 회사 선배인 김태홍은 마음이 따뜻했고 대의를 위해 희생할 각오가 있는 사람이었다고 기억한다.
김태홍 기자협회장의 도피를 돕다가 적발되어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수사받던 중 이근안에게 물고문을 당한다. 강제 해직 후, 페미니즘을 발견한다.
남편의 유학에 동행하여 미국 체류 중 여성학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귀국후, 1991년 11월 문화일보사에 입사하여 젠더에 기반한 새로운 시각의 여성 관련 기사로 호평을 받았다. 문화일보사 노동조합 결성 주도하고 페미니즘 성향으로 인하여 회사와 동료들과 갈등이 생기자 퇴사했다.
1992년 연극 대본 ‘자기만의 방’을 썼는데 이 연극이 크게 성공했다. 97년 페미니즘 저널 <if>를 창간하여 우리 사회에 문화적 충격과 문제의식을 던졌다. <if>는 여성의 욕망에 집중했고, 여자들도 살고 싶은 욕망이 들도록 사회를 만들어 나가야 된다고 생각했다. <if> 발간을 중단 후, ‘if books’를 설립하여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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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부영
1942년 서울에서 출생한 이부영은 용산고 재학시, 동급생이 4‧19혁명 시위에 나섰다가 피격되어 사망하자 부끄러움을 느끼고 기계공학도의 꿈을 바꿔서 서울대 문리대 정치학과에 진학했다. 입학한 해, 5‧16쿠데타가 발발하여 억압과 공포 아래서 대학생 시절을 보냈다.
군 복무를 마치고 한국일보, 중앙일보를 거쳐 1968년 동아일보에 입사하여, 언론통제 아래 침묵하는 언론계를 보며 자괴감을 느꼈다. 1974년 동아일보 노동조합 창립을 주도했고, 그해 10‧24자유언론실천선언에 참가했다. 그러나 1975년 3월 강제해직 당했고, 이어 정권의 조작에 의해 ‘청우회 사건’으로 수감되었다.
박정희 정권 시기 계속 민주화운동을 했던 그는 1979년 다시 계엄포고령 위반으로 구속되어, 교도소에서 삼청교육을 받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언론사 복직보다는 민주화가 먼저라는 것을 자각하고, 해직 기자들과 1984년 민주언론운동협의회 결성을 주도한다.
이어 그는 민민협, 민통련 등의 활동을 하면서 민주화운동의 상징적인 인물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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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석원이석원은 서울대 법학과에 입학하여 운동권 학생의 설득으로 학생운동에 가담하게 된다. 법대 대의원회 의장으로서 민청학련 사건이 벌어지자 법대 조직책으로 몰리기도 했다. 1975년 학원민주화운동을 주도하다가 4학년 1학기 중 제적된다. 이후 1975년 5·22사건에 연루되었다는 누명을 쓰고 조사를 받은 후 강제 입대하게 된다.
10·26사건 이후 복학, 졸업할 수 있었다. 광주항쟁 자료를 보고 분노하여 진상을 폭로하고 신군부에 저항을 촉구하는 유인물을 작성, 배포한다. 체포되어 군사법원에서 재판 중 선고유예로 석방된다.
직장인으로서 민청련 회원 활동을 하던 그는 퇴사 후, 민주언론운동협의회(언협) 사무차장 겸 <말>지 편집차장으로 일했다. 1986년 친구인 한국일보 김주언 기자로부터 정부의 언론통제의 증거인 ‘보도지침’을 입수하여 언협에 전달한다. 1986년 9월 <말>지 보도지침 특집호가 발행된 후, 6월항쟁까지 도피 생활을 하며 <말>지 편집에 참여했다.
언협을 떠나 진보적 대중정당 건립 운동에 참여하고, 민중당 출범을 주도한다. 진보정당운동의 현실적 한계를 절감한 그는 대안적 정치세력 형성과 정책 수립을 위하여 나라정책자료실을 만들고 이 조직은 후에 나라정책연구회로 발전한다. 다양한 정책 보고서와 국회의원 성적표를 발간한다.
여당인 민주정의당을 견제하고 변화를 이끌고자 여의도연구소에 참여했으나 내부 의견이 맞지 않아서 그만둔다.
이후에도 한국정치 발전을 위한 다양한 활동을 했다.
언협 사무차장과 <말>지 기자는 인생의 중요한 시기이자 보람을 느낀 시기였다. 지식인운동의 중요성과 영향력을 절감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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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익정동익은 전북 지역의 존경받는 언론인의 부친 정희남의 영향으로 언론인을 희망했다. 고학을 하며 어렵게 대학을 졸업한 후, 1967년 동아일보사에 10기 수습기자로 입사한다.
편집부 시절 정보기관원들이 매일 신문사를 출입하며 보도를 통제하고 언론을 감시하는 현실을 보게 된다. 언론통제를 견디다 못한 동아일보 기자들은 1974년 10·24 자유언론실천선언을 통해 언론자유와 진실보도를 추구한다. 정동익은 74년 11월 시국사건과 인권운동을 보도할 것을 주장하며 제작 거부를 주동했다.
1975년 3월 정권의 탄압에 맞서 제작을 거부하며 단식농성 중 17일 새벽에 강제해산되고 같은 날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를 결성한다. 강제 해직 이후 생활고에 시달리다가 <간협신보>에 취직하게 된다.
1982년 전북민주동우회를 결성하여 초대회장을 맡았고, 84년에 도서출판 아침을 설립하여 출판운동에 뛰어든다. 각종 사회과학 서적과 금서를 출판했고 85년 <김형욱회고록>을 발간하여 현상수배되기도 했다. 86년에는 한국출판문화운동협의회(한출협) 공동대표로 선출되어 정권의 출판 탄압에 맞섰다.
85년 민통련 초대 감사, 서울민통련 부의장 등 민주화운동에 깊이 관여했고, 87년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공동대표를 지내기도 했다.
88년 언협 2대 의장으로 선출되어 월간 <말>의 정기간행물 등록, 국민언론운동 제창, 언협 내부에 언론학교 설치, 지역 언협의 설립, 언협의 시민언론운동 조직으로 전환 등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92년 ‘선거보도감시연대회의’ 상임대표를 맡아 공정한 선거보도를 위해 노력했다. 사월혁명회 상임의장도 역임하는 등 변함없이 떳떳하게 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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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모충남 금산에서 태어난 정상모는 인류 평화, 화합을 추구하며 인류학을 전공으로 선택했다. 언론자유는 모든 자유를 가능케 하는 자유이므로 언론 분야에 관심을 갖게 됐고, 결국 문화방송에 입사한다. 그러나 친정부적인 보도와 거대자본 앞에 침묵하는 행태를 보고 언론 현실에 실망한다.
10·26사건 이후 민주화의 희망이 생기자 1979년 11월 기자 총회를 주도하여 유신 언론 청산, 언론 정도의 확립, 언론자유의 수호를 결의했다. 1980년 5월 문화방송 보도국 기자 총회를 주도하여 ‘언론자유수호선언문’을 채택했다. 그리고, 총회 결의사항을 뉴스로 보도할 것을 제안하여 관철시킨다. 외신을 통해 광주항쟁의 참상을 알게 되자 보도 검열에 항의하여 제작 거부에 돌입한다. 그러나 얼마 후 찬반 투표에서 제작 거부 중단이 결정된다.
7월 19일 강제 해직 후, 취업이 제한되자 해직기자·민중예술인·민주화 인사 등과 교류했다, 벽산그룹 홍보실을 거쳐, 금강기획으로 이직했다. 80년해직언론인협의회와 민주언론운동협의회 참여했다. <핵과 한반도> 저술을 계기로 반핵평화 운동에 참여했다. 언론운동 참여를 반대한 회사의 강요로 퇴사하게 된다.
보도지침 폭로 이후 정권의 탄압에 몰려 위기에 처한 언협의 사무국장을 맡았다. 사무실 문을 열고, <말>지 발행을 재개하고, <말소식>을 발행했다. <말>지 9호를 발행하고 구류 9일 처분을 받았다. <말>지 10호에서 권력과 대학 재단의 유착, 학원 정보공작의 실상을 폭로하고 도피 생활에 들어갔다.
<한겨레신문> 창간에 참여했고 한겨레기자평의회 2대 의장으로 선출되어 편집위원장 직선제 도입을 주도했다. 직선제는 언론계로 퍼져나가서 언론민주화의 물꼬를 텄다. MBC로 이직하여 논설위원을 지냈다. 언론의 기능은 예측과 예방이라고 생각하며 사회가 엉망이 되고 있다면 언론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라고 믿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