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술컬렉션
80년대 농민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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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송자
고송자는 1949년 전남 신안군에서 출생했다. 4남 3녀 중 장녀로 태어나 책임감 강하게 자랐다. 가난한 집안의 가세를 일군 할머니의 가르침과 영향이 컸다. 1974년 중매결혼을 해서 무안군으로 이주했다. 고향에서는 농사를 크게 짓지 않았기 때문에 떼밭을 갈아 농사짓기가 매우 어려웠다. 무엇보다 수확한 농작물의 제값을 받지 못하고, 수매상의 횡포에 시달리는 것이 괴로웠다.
1980년 중반까지 농사를 지었지만, 농민운동이나 농민대회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했다. 한 동네 주민이었던 대학생 박진우가 농민교육에 참석해보길 권했고, 그를 따라 해남교회에 가서 처음 교육을 받았다. 1987년 마을‧양파투쟁을 할 때, 농민대회에 처음 참가했다. 헌신적으로 활동하는 농민운동가들을 보며 농민운동을 하기로 결심했다. 1988년 고추의 과잉 생산으로 고추값이 떨어지고, 정부의 전량 수매가 이뤄지지 않아 농민들의 불만이 커졌다. 농협에서는 일부 주민들의 고추만 몰래 수매해서 주민들의 공분을 샀다. 수양촌 부녀회원들에게 불만만 하지 말고 직접 가서 따져보자 하자 다들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현경농협 앞에서 수양촌 부녀회원들의 집회가 있고 3일 후에 농협으로부터 전량 수매 약속을 받아냈다. 정부의 수매 분량 22톤 중에서 무안군에 12톤이 배정되었는데, 수양촌에 9톤을 수매하기로 결정됐다. 고추싸움이 성공을 거두자 부녀회원들은 용기가 나서 나머지 고추수매를 위해 다시 한 번 집회를 열기로 한다. 12월 5일 경운기에 고추를 싣고 정부의 전량수매를 요구하며 무안군청으로 향했다. 무안군청 앞마당에 고추를 쌓아놓고 시위를 하다가, 눈비를 피해 고추 포대를 군청 안으로 옮기며 점거농성을 하게 됐다. 3〜4일 후, 무안군청이 고추 전량 수매를 약속했다. 수양촌 고추싸움이 성공을 거두자 주변 지역 고추를 수매하기 위한 2차 대책위원회가 조직되었고, 이 과정에서 경찰과 백골단이 투입되어 물리적 충돌이 발생하기도 했다. 결국 2차 고추싸움까지 전량 수매라는 결과를 받아내었고, 수양촌의 고추싸움을 시작으로 고추싸움이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고추싸움 이후 무안군여성농민회 조직 논의가 확산되었다. 현경면여성농민회를 먼저 결성하고, 운남면과 현경면 여성회원들을 포함하여 무안군여성농민회 준비위원회를 조직하였다. 1980년대 후반 무안군 여성농민회는 수세폐지운동, TV시청료 거부운동, 의료보험투쟁 등을 활발하게 전개했다. 1992년 무안군여성농민회 초대 회장을 역임하고, 1994〜1995년 전국여성농민회 전남연합 회장을 맡았다. 1997〜2000년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회 회장을 역임하면서 현장 여성농민들의 목소리를 대변하고자 노력했다. 전여농 회장직을 마치고 다시 무안으로 내려와 우리농산물지키기 광주전남운동본부, 수양리 부녀회, 전라남도의원, 여성농업인센터에서 활동하면서 농촌과 여성농민들의 권익을 위해 활동하고 있다. 농민들에게 농민운동은 꼭 필요한 것이기에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할 수 있을 때까지 전력을 다할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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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오혁
권오혁은 1955년 경북 청송군에서 출생했다. 아버지는 집안에서 운영하던 회사에서 일했으나, 젊은 시절에 사망했다. 이후 어머니가 5남매를 양육하여 경제적으로 어려움이 많았다. 고향에서 중학교를 마치고, 직장생활을 했다. 어머니가 기독교에 귀의하면서 구술자도 현서면의 화목교회를 다녔다. 이로부터 교회를 기반으로 사회활동을 하게 되었다. 1975년에는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측 전국청년연합 경안노회 회장 겸 농촌분과 회장을 맡았다. 농촌선교에 관심을 갖다보니 김영원과 김성순 장로를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화목교회를 중심으로 신용협동조합을 만들었는데, 현재는 청송신용협동조합으로 운영되고 있다.
김영원과 김성순의 소개로 1978년 4월 크리스찬아카데미 제1차 교육 18기를 이수했으며, 2차 교육도 받았다. 이는 농민운동에 보다 열심히 참여하는 원인이 되었다. 이오덕의 지원을 받아 마을문고운동도 했다. ‘7총무’라고 불릴 정도로 크고 작은 마을 일에 관여했다. 그러다가 1979년 말에 제2국민역으로 군복무를 시작했고, 1981년 2월에 병역을 마쳤다. 농활과 관련하여 서강대 학생 김의기와 교류했다. 1980년 5월 30일 그가 사망했다는 사실을 모른 채, 약속한 6월 6일 EYC에 갔다. 그 일대가 경찰에 봉쇄되어 있었다. KSCF(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의 누군가로부터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유인물을 받게 되었다. 이 유인물을 보관하다가 병역을 마치기 직전에 부산에서 개최된 기독교 행사에 배포하기 위해 소지하고 이동하다 동대구역에서 발각되어 고초를 치렀다.
기독교농민회의 결성 준비 소식은 기독교 네트웍을 통해 알고 있었다. 경북에서도 1980년부터 기독교농민회의 결성에 착수했고, 1982년 3월 19일에 창립했다. 영주, 봉화, 안동, 청송, 김천, 의성, 달성 등지를 다니면서 참여자를 모으고 조직했다. 이러한 활동으로 인해 경찰과 정보 당국의 감시가 상시적으로 이루어졌으며, 활동에 어려움이 많았다. 1982년 3월 18일 한국기독교농민회총연합회의 결성 준비 과정에는 간사로 참여했다. 1984년 초까지 경북기독교농민회 총무를 역임했다. 경북기독교농민회는 1980년대 중반까지 사실상 안정화되지 못한 상태였다. 구술자가 총무로 활동할 때는 11개 지역에서 50∼60명이 회원으로 참여했다. 역량이 충분하지 않아 독립적으로 집회와 시위를 조직하지 못했다. 경북기독교농민회가 발간한 소식지는 학생운동에서 농민운동으로 투신한 김종길이 발간한 것이다. 김종길이 경북기독교농민회의 2대 총무였고, 3대 총무는 배윤호였다. 사회운동으로는 1987년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대구경북 집행위원과 총무로 활동했다.
1983년부터 신용협동조합운동에 치중했다. 1984년에는 YMCA를 매개로 양곡조합을 주관했다. 신용협동조합 경북 사무국장 윤종대의 권유로 교도원이 되었고, 활발하게 활동했다. 그리하여 1988년에 신용협동조합 중앙회에 특채되었고, 15년간 농촌개발부에서 근무했다. 비록 이 기간에는 농민운동 현장에 있지 않았으나, 환경운동과 생명운동, 먹거리운동, 직거래 등을 통해 농촌의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한 활동을 했다. 현재도 기독교의 인연은 지속되고 있으며, 50대 이후에는 정치인으로 장을 바꾸어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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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순김성순은 1929년 경북 김천면에서 출생했다. 출생한 이후 1970년대 활동에 관한 개괄적인 사항은 2010년 9월 2일에 이루어진 구술채록에서 정리한 바 있다. 1960년 3월 12일부터 포도농사를 시작했고, 1970년 초 현재의 장소로 이사해 포도농사를 지었다. 유달영이 재건국민운동본부 회장에 재임하던 시기에 인연을 맺고 영향을 받아 다양한 사회활동을 전개했다. 대표적인 사례는 재건학교 운영과 새마을금고의 설립이었다. 재건학교는 2년간 운영되었고, 김천새마을금고는 오늘날까지 운영되고 있다. 포도재배기술을 어렵게 습득했으며, 일본에서 품종을 어렵사리 도입해 한국에 확산시켰다. 포도재배기술을 배우러 온 한 젊은이를 통해 기독교에 입문했다.함석헌으로부터 사상적 영향을 받았다. 강정규, 최완택, 이현주의 인연으로 1976년에 크리스찬아카데미 제1차교육 9기로 이수했다. 이 교육을 받은 후, 한국가톨릭농민회 한마음분회를 결성했다. 한마음분회는 안동교구의 영향과 지원을 받았다. 1978년에는 한국가톨릭농민회 경북 총무여서 함평고구마사건 단식농성에 참여했다. 8일간의 단식농성을 마치고 해단식에서 발표한 성명서를 작성했다. 1979년 오원춘사건으로 8월 15일 20일간의 구류처분을 받았다. 정농회와의 인연은 1980년대 초에 오재길을 통해 형성되었다. 정농회와의 인연은 기독교 교리에 대한 이해의 차이로 중단되었다. 최종진의 권유를 받고 가톨릭농민회에서 기독교농민회로 활동 영역을 전환했다.을류농지세 투쟁은 포도농사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농협민주화는 군사정권의 유산을 극복하는 일이었는데, 난관이었다. 당국은 농민운동을 감시하기 위해 주위 사람들을 정보원으로 활용했다. 면에서도 주시했고, 다니던 교회도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1987년에는 경북기독교농민회 회장을 하는 등 다양한 민주화운동과 농민운동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했으나, 현재는 구체적인 활동을 거의 기억하지 못한다. 가톨릭농민회는 중심을 갖고 유지되었던 반면, 기독교농민회는 해산하여 안타깝게 생각한다. 1988년에는 전국농민단체협의회 회장도 역임했으나,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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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순
김정순은 1951년 9월 14일(음력) 전남 강진군 도암면 만연마을에서 출생했다. 안산 김씨 집성촌 마을이었으며, 주로 쌀농사를 지었다. 도암중학교에 입학하면서 도암면에서 자취했고, 광주공업고등학교로 진학했다. 고3 말에 공장에 취직을 했는데, 기계 오일 냄새에 적응하지 못하고 그만두었다. 아버지의 권유로 대학 진학을 위해 광주에서 공부하다 그만두고 1972년 군대에 입대했다. 군대 제대 이후, 신평교회를 다니던 후배 김규식, 윤재경의 권유로 1975년 말부터 교회를 다니기 시작하고 청년회 활동을 했다.
윤기현의 소개로 1977년 12월 6일부터 10일까지 크리스찬아카데미 교육을 이수했다. 1차 교육 15기로 성북구 수유리 아카데미하우스 근처에서 교육을 받았는데, 농민 문제에 대해 새롭게 인식하고 농민운동을 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선교교육원 모임에서 전남지역 기독교농민회 조직화 문제가 구체화되었고, 전남기독교농민회 결성 준비를 위한 모임이 이뤄졌다. 김정순은 나상기의 권유로 전남기독교농민회 준비위원회부터 서기로 활동했다. 1978년 3월 8〜9일 전남기독교농민회가 결성되었다. 이후 전남기독교농민회는 각 지역의 기독교농민회 결성을 위한 교육과 지원 활동을 전개했다.
1980년 5월 2일 전북기독교농민회가 결성되었고, 1981년 2월 15일 충북기독교농민회가 결성되었다. 전북지역은 4-H 활동을 했던 임수진이 중심적으로 활동했으며, 충북은 덕촌교회를 중심으로 주요 활동가들의 참여가 이뤄졌다. 기독교농민회 조직화에는 민청학련사건 관련자들의 논의가 초석이 되었고, 학생운동 출신들의 역할이 크게 작용했다. 배종렬, 정광훈, 최종진 등 농민운동 활동가들의 헌신적인 노력과 지원이 더해져 1982년 3월 18일, 영등포산업선교회에서 한국기독교농민회총연합이 결성하게 된다. 이때도 김정순은 준비위원회부터 서기를 맡아 참여했다. 1982년 강진군기독교농민회가 창립되었고, 김정순은 회장을 역임한다.
1983년부터 함평군, 고창군, 임실군, 서천군 등 군 단위 지역별로 기독교농민회가 결성되었으며, 김정순은 강진군, 전라남도, 전국 모임에 참여했다. 1984년 9월 2일 함평‧무안농민대회는 기독교농민회 역량이 총결집되고, 함평의 노금노, 무안의 배종렬, 김홍재 등의 인사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1985년 미국농축산물수입요구 규탄대회와 미국대사관 진입사건이 있었다. 김정순은 기독교농민회 과제실천분과위원장으로 대책회의를 진행했고, 4월 23일 미국대사관 진입 작전을 세우게 된다. 미국대사관 직원들의 출근 시간에 맞춰 기습적인 진입을 시도했고, 플랜카드를 펼치고 농민가를 부르며 시위를 진행했다. 이 사건으로 20〜30명이 종로서로 연행되었다. 1986〜1987년 전남기독교농민회 회장을 역임했다.
1987년부터 일반 농민대중을 대상으로 단일조직을 구성해야 한다는 논의가 이뤄졌고, 1988년부터 본격적인 활동이 이뤄지면서 10월 31일 전국농민단체협의회가 결성되었고, 1989년 3월 1일 대전 가농회관에서 전국농민단체연합이 결성되어 통합을 위한 활동이 이뤄진다. 1990년 4월 24일 전국농민회총연맹이 결성되었고, 5월 11일 전국농민회총연맹 전라남도연맹이 결성되었다. 각 군 단위별로 지역적 차이나 특징이 있었지만, 농민대중 조직으로 나가야 한다는 공유된 논의가 있어서 큰 문제는 없었다.
1991년부터 전남도연맹 정책실장을 역임하며 정책실의 사업계획, 교육정책, 일정 등을 세워 활동했다. 1994년에는 다시 강진군으로 내려와 군 농민회 사무국장으로 활동했으나 1997년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농민운동을 그만두게 된다. 혁명을 꿈꾸며 농민운동에 투신했는데 이루지 못한 아쉬움이 있다. 하지만 여전히 김정순에게 농민운동은 삶의 모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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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재김홍재는 1939년 전남 무안군 몽탄면에서 출생했다. 형이 2명 있었으나 일제강점기 말에 사망했고, 누나도 사망했다. 그래서 호적상 장남이 되었다. 아버지는 1943년 9월부터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되었고, 김홍재는 해방이 되고 아버지를 따라 교회에 다녔다. 초등학교 5학년에 6·25전쟁의 발발로 인해 학업을 중단했다. 아버지는 6·25전쟁 시기 서울수복 즈음에 인공 가담자들에 의해 학살되었다.
1955년에 전남 광주시에서 직공으로 일했고, 1956년에 고향으로 돌아와 농업에 종사했다. 목포 성경고등학교에서 3년 동안 공부하여 1961년에 졸업했다. 1961년부터 1964년까지 강원도 양구에서 포병으로 군복무를 했으며, 1962년에 결혼했다. 전역 후 현재까지 농사를 짓고 있다. 주요 재배 작물은 벼, 보리, 고구마, 유채였으며, 특용작물은 토질이 나빠 재배하지 않았다. 1968년부터 몽탄면사무소에서 2년간 근무했다. 1971년에 새마을지도자로 선정되었다. 1974년에는 대통령특별사업 예산도 받았으며, 1976년에는 민방위교육 교관을 지냈다.
김홍재는 나름의 방식으로 농민운동을 전개하다 배종렬의 소개로 크리스천아카데미 교육을 받으면서 본격적으로 농민운동에 참여했다. 교육을 받은 이후에는 가톨릭농민회에 가입해서 활동했다. 그러다가 1978년 3월 전남기독교농민회 결성에 동참했다. 1980년에서 1984년까지 전남기독교농민회 감사와 총무를 역임했다. 전국을 순회하면서 기독교농민회를 결성하기 위해 조직 활동을 전개했다. 1982년 3월 18일 영등포산업선교회에서 한국기독교농민회총연합회 창립총회에서 사회를 봤다. 당시에는 종교색을 갖지 않으면, 농민운동을 전개하기 어려웠다. 1984년 함평·무안지역현안문제대책위원회 공동위원장을 역임했고, 1988년 무안기독교농민회 회장을 지냈다. 1990년 전국농민회총연맹이 출범하면서 재편된 한국기독교농민회에서 부회장 2회를 비롯해 회장, 감사 등을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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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남식
박남식은 1947년 경남 창원군에서 출생했다. 박 씨들의 집성촌으로 400여 년의 전통을 가진 곳인데, 1960년대 창원산업단지로 편입되었다. 아버지는 농사를 자랑스럽게 생각했고, 평등사상을 실천하며, 신지식 배우기를 좋아했다. 사회적인 관심과 실천적 삶을 살아가는 데는 아버지의 영향이 컸다. 창원여자중학교를 졸업하고 부산 경남여자고등학교에 진학했다. 1968년 고등학교 졸업하고 마산여자중학교에서 수학 교사로 있었다. 1973년 상경을 결심하고, 부모님께 허락을 받고 올라왔다. 1974년 오랜 친구였던 윤두병이 긴급조치1호 위반혐의로 구속되자 돌볼 사람이 없어 옥바라지를 했다. 구속자가족협의회에서 활동했고, 이때 민주주의에 대한 의식을 갖게 되었다. 1975년 형집행정지로 석방된 윤두병과 결혼했다.
김진홍 목사가 있는 활빈교회를 찾아가 청계천 빈민선교 체험을 하고, 1976년 농민선교를 위해 남양만으로 들어갔다. 여기서 이종옥을 만났으며, 빈민운동, 선교활동, 기독교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는 활동가들을 만났다. 김진홍 목사의 소개로 크리스찬아카데미 교육에 참석했다. 크리스찬아카데미 1차 교육(13기), 2차 교육, 사전교육과 집체교육을 받으면서 전문적 역량을 길렀고 농민운동을 결심했다. 남양만에서는 신용협동조합 조직화 사업과 농촌탁아소 어린이집 자모들을 대상으로 의식화 교육 활동을 해나갔다. 신용협동조합 조직화 과정에 대한 이견과 농민선교 활동의 한계를 느껴 2년여 동안의 남양만 생활을 접고 나왔다. 이후 가톨릭이나 기독교의 종파를 넘어, 전국을 돌며 교육 활동과 현장 활동가 양성을 위해 매진했다. 이와 같은 활동은 단독으로 결정한 것이 아니라 주변 활동가들과 함께 논의하고 활동하면서 진행한 것이다.
1983년 일본 아시아농업전문학교로 1년 동안 연수를 다녀왔다. 1984년 한명숙이 독일 테레데즈홈 기관에서 지원하는 한국농촌탁아사업 지원 프로젝트를 맡아 달라 요청했고, 사업을 받아 수행할 귀속단체가 필요해 한국교회여성연합회 농촌사업부를 신설하여 농촌탁아사업을 진행했다. 농촌탁아사업을 통해 여성농민의 생산성을 지원하기도 했지만, 여성농민 교육, 청년지도자 훈련, 여성농민활동가 교육 등 교육과 지속적인 후원 관리를 위한 활동이었다. 또한 여성활동가가 농촌탁아소 보모로 지역에 들어가 현장 여성운동가를 양성하고 조직화하는데 활용했으며, 청원 등동어린이집, 중원 문산어린이집을 집중적으로 운영하며 활동했다. 1980년 중반에는 여성농민 교육을 위한 여건을 조성해가며 여성농민 활동가 교육을 전국적 차원에서 조직적으로 추진했다고 평가할 수 있겠다.
1987년은 민주화운동 국면에서 새로운 변화와 전환점이 필요했던 시기였으며, 현장 농민 조직도 활발하게 이뤄졌던 흐름이 형성되었다. 자주적 여성농민 조직 건설에 대해 암묵적 합의가 이어졌고, 전반적인 흐름 속에서 전국여성농민 조직화를 위한 활동이 본격화된다. 1989년 자주적 여성농민 조직의 필요성에 합의하여 ‘전국여성농민조직 활성화를 위한 조직위원회’가 결성되었고, 6개월 이후에 여성농민위원회 준비위원회로 본격화되었으며, 1989년 12월 18일 전국여성농민위원회가 결성되었다. 1990~1991년 전국농민회총연맹 제1대 사무국 총무국장을 역임했고, 1991〜1993년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 부회장을 역임했다. 1990년대 초까지 농민운동의 일선에서 활동하다가 후배 활동가들이 양성되면서 후배들이 활동할 수 있도록 일선에서 물러났다.
1992년 안양시에 주거지를 마련하면서 정착하게 되었고, 1993년 상가를 분양받아 요가센터를 운영하면서 건강문화 쪽으로 활동 영역을 옮겼다. 지역사회운동에도 참여하면서 안양여성회 창립, 참교육학부모회 조직화에 참여하였고, 1998년에는 전국지방선거 경기도의원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1999년 휴식을 갖고자 1년간 티베트로 여행을 떠났다. 현재 요가와 차문화를 전공하여 활동하고 있지만, 인생에서 여성농민운동은 가장 핵심적인 삶의 가치였기에 언제나 활동의 중심에는 여성농민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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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래박용래는 1948년 충북 청원군에서 장남으로 출생했다. 집 뒤에 있던 교회의 주일학교를 다니면서 종교인이 되기로 결심하여 1967년 한국신학대학교에 입학했다. 군복무를 마친 뒤 1972년 복학했다. 1973년부터 1976년까지 충북 봉황교회 전도사로 일했다. 1976년 2월에 졸업하고, 그해 5월에 청주시 흥덕구 옥산면 소재 덕천교회 전도사로 부임했다. 1977년 10월부터 1987년 5월까지 덕천교회 목사로 봉직했다.
덕천교회 목사로 있는 동안 농촌선교를 활성화해 교회 부흥을 이끌었다. 목사의 신분으로 크리스천아카데미 교육을 이수했다. 농민선교를 위해 농번기 탁아소, 다양한 형태의 근로협동반, 축산협동반, 신협 등을 운영하여 교회를 중심으로 마을의 생활공동체가 뿌리내리도록 했다. 또한 농산물 제값 받기운동을 전개했으며, 3·1절 기념행사를 매개로 주민의 연대를 공고화했다. 이외에도 마을 입구까지의 도로 확장사업과 시내버스 노선 연장, 노풍 보상 투쟁, KBS 시청료 납부거부운동 등을 전개했다. 덕천교회에는 이 지역 농민운동의 원조였던 정만호, 정방래 장로가 있었다.
박용래는 1982년 충북기독교농민회와 한국기독교농민회총연합회 창립에 참여했다. 박용래는 농민운동에 음으로 양으로 참여했으나, 농민운동은 평신도를 중심으로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1985년 4월 충북민주운동협의회가 출범하자 상임대표가 되었다. 1985년 9월에는 충북 고문폭력 용공조작 저지대책위원회 공동대표를 맡았다. 1987년 5월 13일부터 4·13호헌조치에 항의하여 목회자들과 청주제일교회에서 단식농성을 벌였다.
1987년 5월 21일 대전장로교회 목사로 부임해 도시선교라는 제2의 목회활동을 시작했다. 대전에서도 민주화운동에 참여했으나, 충북에서와 같이 활동하기에는 여러모로 어려웠다. 2018년 4월 28일 대전장로교회에서 은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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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장환
배장환은 1959년 충북 청주시에서 출생했다. 아버지는 직업군인이었고, 전역 후에는 예비군 중대장을 10여 년간 역임했다. 조부모와 어머니는 성동교회에서 경작권을 준 천수답에서 농사를 지었다. 배장환은 일찍이 농사를 지으려고 마음을 먹었다. 청주농고에 진학한 것도 농업을 계승하기 위한 것이었다. 기독교와의 인연으로 한국기독교장로회 충북연합회에서 활동했다. 하계수련회에서 안병무의 강의를 듣고, 기독교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성경과 더불어 사회과학을 공부했다.
1980년 5‧18민주화운동 이후, 군에 입대했는데, 전투경찰로 선발되어 서울에서 근무했다. 1983년 4월에 전역한 뒤, 충북연합회에서 활동했던 박종희로부터 최종진을 소개받았다. 이후 최종진과 농민운동의 길을 걸었다. 당시 청주지역은 청주제일교회의 건물에 다수의 단체들이 입주해 있었다. 그래서 이들 간에 소통이 원활했고, 친밀감도 높았다. 충북기독교농민회에서 박종수의 뒤를 이어 총무가 되었다. 최종진이 기독교농민회의 활동을 주도했다. 1985년 4월 23일 미국대사관 진입사건, 1985년 7월 17일 서영석 추모식과 외국농축산물수입 규탄대회, 1986년 8월 31일 최종철 추모식과 추모비 건립 등 다양한 사건을 주도하거나 참여하여 유죄판결(구류처분)을 받고, 도피생활을 했다.
최종진이 서울로 올라가 활동하게 되면서 지역에 내려와 농사를 짓고 있던 학생운동 출신가 신언관에 도움을 청했다. 이후는 신언관이 청주와 청원의 농민운동을 사실상 주도했다. 기독교농민회의 구성원이 달라지고, 성격에 관한 논의가 이루어지면서 이를 바탕으로 1986년에 청원군농민협회가 창립되었다. 기독교농민회는 이유근이 유지하는 것으로 하고, 다수의 회원들은 농민협회로 이전했다. 지역 내에서는 이와 관련하여 다소 갈등이 있었다. 가톨릭농민회와 기독교농민회는 충분히 교류가 이루어지지 않았고, 필요에 따라 협력하는 수준이었다. 행사를 공동으로 개최하지 않은 관계였다. 운동의 방식과 목적 그리고 의제를 제출하는 방식에서 차이가 있었다.
청원군농민협회 초대 회장을 맡았으나, 신언관이 주도가 되어 이끌었다. 청주지역 농민단체들의 통일 작업에도 신언관의 역할이 컸다. 학생운동 출신가들이 농민운동에 투신하면서 발전도 있었으나, 갈등과 대립도 심화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1987년 6월항쟁부터 시작되었다. 결국은 기존의 농민운동가들이 활동을 중단하는 중요한 이유가 되었다. 이때에는 지역의 사회운동에서 농민운동이 차지하는 역할이 동원력으로 볼 때 중추적이었다. 농민회에서 발행하는 신문은 농민들 자체로는 제작하기 어려워 외부의 도움을 받았다. 농민협회가 출범하면서 지역에서도 다양한 성격의 농민회가 결성되었다.
농민운동은 한국의 민주화에 기여한 바가 컸다. 이에 비해 현재의 농민운동은 농민생존권을 보장하는 활동 그 이상은 아닌 것으로 판단된다. 1980년대는 농민운동에 뛰어들지 않을 수 없는 환경이었다. 농민혁명의 관점에서 농민운동에 헌신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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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병기
소병기는 1943년 전북 익산군에서 출생했다. 이곳은 집성촌이었다. 가난과 교육에 대한 열의가 낮아 초등학교는 졸업했으나,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했다. 2년 후 어렵사리 삼례중학교에 진학했고, 이리농림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중학교 재학 시에 4-H와 인연을 맺었다. 고등학교 재학 시에도 종친회를 결성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전개했다. 이때의 인연은 이후 농민운동과 사회활동에 큰 도움이 되었다.
1964년 원광대학교에 진학했다. 대학에서도 4-H 활동에 열심이었고, 전국적인 연계 속에서 활동했다. 1965년 한일협정반대운동에 참여했다. 1967년 총학생회장에 선출되었고, 파월 위문단으로 베트남에 가기도 했다.
대학 졸업 후, 1971년 고향인 왕궁면에서 왕궁고등공민학교를 설립했다. 비인가 학교였으나, 농촌봉사운동의 일환이었다. 이때 한센인 정착촌 사람들과 교류했다. 새마을운동의 일환으로 공장을 세웠으나, 허가 취소로 큰 손실을 입었다.
1974년 지역사회 목사의 추천으로 크리스찬아카데미 제1차 제1기 교육에 참가했다. 크리스찬아카데미 교육 이수자들이 중심이 되어 1976년 전북가톨릭농민회를 결성했다. 다소 난항 끝에 간사(총무)로 선임되었다. 이들 대부분은 4-H 활동과 관련된 사람들이었다. 함평고구마피해보상운동에 참가하여 경찰에 연행되었다. 전남의 서경원과 돈독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1980년대에는 농민운동과는 거리를 두었고, 학생운동을 후원했다. 당시 원광대학교 동창회 사무국장을 역임했다. 익산지역에서는 기독교농민회의 결성과 활동이 없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전북에서 가톨릭농민회의 활동이 활발한 지역은 임실, 부안, 정읍이었다. 익산에서는 황등분회의 활동이 활발했다. 1980년대 후반 익산군농민회 초대 회장 등을 역임했으나, 그다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1990년대에는 전라북도 도의원으로 활동했다. 도의원은 농민운동과 관련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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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언관
신언관은 1955년 충북 청원군 현 자택에서 출생했다. 신언관의 선조는 대대로 이곳에서 살았으며, 중농 이상이었다. 학업에 재능이 있어 중학교 때부터 서울에서 공부했고, 1975년 3월 서울대학교 농업교육학과에 진학했다.
대학에 진학한 해에 김상진할복사건이 발생했다. 신언관은 사건 현장 바로 옆에 있었다. 이 일은 인생의 행로를 전환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대학 3학년부터 본격적으로 사회과학을 공부했고, 학생운동에 투신했다. 그로 인해 1978년 6월 민주구국선언문을 제작 배포하여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유죄판결을 받고 제적되었고, 1980년에도 유죄판결과 제적 처분을 받았다. 대구교도소와 영등포교도소에서 수감생활을 했다.
1980년 후반에 석방된 후, 노동운동을 하고자 했으나, 여의치 않아 농민운동으로 전환했다. 청주로 돌아와 ‘정우사’라는 사회과학 서점을 운영했다. 이 서점은 청주지역 사회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82년 서점을 후배에게 물려주고, 농업에 전념했다. 농민운동을 위해서는 농사를 짓는 방법과 정서를 습득하는 것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1984년에 지역의 농민운동가였던 최종진을 만나 충북기독교농민회 총무직을 권유받았고, 이를 계기로 농민운동에 본격적으로 합류했다.
1987년 6월항쟁 이후 학생운동 출신자들이 농민운동에 합류했다. 청주지역은 기독교농민회와 가톨릭농민회가 연대하여 활동했던 기억은 없다. 기독교농민회의 종교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1987년에 청원군농민협회를 설립하고 제2대 회장이 되었다. 얼마 후인 1987년 2월 28일에 전국농민협회가 결성되었다. 신언관은 충북농민협회 회장, 전국농민단체협의회 총무로도 활동했다. 충북지역의 다양한 농민운동의 흐름은 전국농민회총연맹 결성으로 합류했다.
신언관은 전국농민회총연맹이 출범할 때, 「창립선언문」을 작성했다. 제1대 정책실장을 맡았는데, 농민운동의 조직 활동은 이것이 마지막이었다. 1991년 11월 정치인으로 전환했다. 그렇지만 농민운동의 끈을 놓치는 않았다. 현재는 한국가톨릭농민회 청주교구연합회에서 활동하고 있다. 생협운동이 주된 활동 영역이다. 농민운동은 대중운동으로서 위상을 지녀야 했으나, 당 조직으로 변모한 이후에는 지지기반을 상실해갔다. 농민운동에 헌신할 수 있었던 것은 젊은 시절의 열정과 통합농민운동 조직 결성에 대한 열망에서 비롯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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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봉구이봉구는 1941년 1충남 서천군에서 출생했다. 6·25전쟁이 발발하기 이전 초등학교 재학 중에 동네 어른들을 따라 부여군 충화면 소재 오덕교회에 나가면서 기독교인이 되었다. 서울에서 중학교 시험에 합격했으나 등록금이 없어 입학하지 못했다. 장안중학교에 다니던 무렵 아버지가 중풍으로 쓰러졌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낙향하여 농사를 지었다. 결혼은 같은 동네 후배와 했다.
1954년 4월경 오덕교회에서 관포교회가 분리 설립되었다. 이때부터 점차 관포교회를 중심으로 관포리 마을 일이 이루어졌다. 박정희시대에는 한창 열을 올렸던 새마을운동에 참여했다. 관포리는 농토가 적고 수입이 낮았다. 새마을운동을 열심히 했으나, 생활은 여전히 어려웠다. 그래서 이농을 결심했는데, 관포교회 임종수 목사의 훈계로 주저앉았다. 그 무렵인 1977년 양주석 장로의 권유로 크리스천아카데미 교육을 받았다. 양주석 장로의 외갓집이 관포리여서 일찍이 인연이 있었다. 크리스천아카데미 교육을 받은 직후 YMCA가 의정부에서 실시한 다락방교육을 이수했다. 크리스천아카데미 교육 이수 후 관포교회에서 문동환 목사 초청강연회를 개최한 것과 관련해 당국의 주시를 받았다.
1982년 3월 한국기독교농민회총연합회 창립총회에 참여했으나, 중요한 역할을 맡지는 않았다. 양주석 장로와 연계하여 1983년 3월 11일 충남기독교농민회 창립에 참여했고, 총무로 인선되었다. 충남기독교농민회 창립에 앞서 이화여대 내 다락방에서 개최된 농민 집단교육에 참여했다. 이러한 활동 인연으로 1983년 12월 한국기독교농민회총연합회 중앙상임위원에, 1984년 2월 같은 단체 부회장에 선출되었다. 이후 부회장을 한차례 연임했으며, 1988년에는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회장에 재임하는 동안 전국농민회총연맹이 출범하는데 일조했다. 전국농민회총연맹이 출범한 이후에는 그동안 도외시하여 어려워진 가정의 경제를 위해 일정기간 전념했으며, 평회원으로 농민운동에 참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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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욱
이재욱은 1958년 경남 김해시에서 출생했다. 공병장교 육군 대위였던 아버지 근무처를 따라 이주하다가 초등학교 시절부터 서울에 정착했다. 어릴 때부터 모태신앙인 교회에 다니면서 학생회, 청년회 활동을 했다. 양광교회를 다녔는데, 운동권 출신 선배들이 한국기독청년협의회(EYC) 농촌분과모임을 추천하여 활동하게 되었다. 그 모임에서 김의기를 처음 만나 친구가 되었다. 홍익대학교 디자인학과를 중퇴하고, 1980년 신학대학교에 입학했으며 정치 민주화를 위한 시위에 참여했다. 그러다 5월 30일 김의기 투신자살 소식을 듣게 된다. 김의기가 투신하면서 배포한 ‘동포에게 드리는 글’ 유인물을 등사, 배포했다. 이후 김의기가 리더였던 ‘농촌분과모임’을 이어 맡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농촌문제를 학습하고, 언더그룹인 현장 이전팀을 조직하면서 현장 투신 준비를 하였다.
이재욱은 1985년 충남지역 현장으로 투신했다. 당시 충남지역에는 서천기독교농민회, 부여기독교농민회, 아산기독교농민회가 조직되어 있었지만, 경찰들의 회유와 협박으로 회원들이 탈퇴하는 사례가 발생하고 있었다. 이재욱은 충남기독교농민회 총무간사를 맡아 활동하면서 기관지, 유인물 등을 발행하며 홍보활동에 힘썼다. 충남지역 교육활동과 인력을 양성했으며, 중앙에서 투신한 현장 이전팀을 계속해서 관리하며 농민대중 조직을 구성하기 위해 노력했다. 학생운동 출신들과 현장의 선진적 활동가들이 결합하면서 농민운동 통합 논의가 본격화되었고, 조직적인 준비를 통해 전국농민운동연합을 거쳐, 1990년 전국농민회총연맹을 결성하는데 나름의 역할을 했다.
1990년 전국농민회총연맹이 출범했지만, 가톨릭농민회 중심으로 조직이 구성되면서 다시 현장으로 내려가 활동했다. 전국농민회총연맹 충남도연맹 지도부도 가톨릭농민회 중심으로 구성되면서, 1991년 충남지역의 농민운동을 정리하고 강원도로 이주했다. 농민운동을 계속하려면 직접 농사를 지어야겠다고 결심하고, 1993년부터 유기농법으로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1994년부터는 농산물 직거래 판매를 위해 생태공동체를 조직했고, 춘천농민회를 결성하여 대외사업부장을 역임한다. 1995년부터 농어촌사회연구소 소장을 맡아 6년 동안 활동했으며, 최근에는 경기도 농수산진흥원 이사장으로 일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