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술컬렉션
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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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신석출생과 가정 배경, 한신대 생활, 목회활동과 민주회복국민회의 무안지회 결성, 농민선교회 활동, 광주 양림동 반유신선언 사건, 도피와 수감생활, 5.18 체험과 도피, 자수와 조사과정, 상무대 영창생활, 석방 후 5.18피해자 지원활동과 구속자가족 모임 결성, 5.18기념재단 이사장 활동과 5.18특별법 제정 투쟁, 5.18특별재판, 윤한봉 도피생활 지원, 민주화운동에 관한 소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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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희남출생과 학업과정, 목회자로서 생활과 일제시대 풍경, 한국신학대학(조선신학교) 입학, 한국전쟁과 교편생활, 교역생활의 시작, 5.16 이후 박정희에 대한 정보, 77년 연설 후 구속사건, 10.26 전후 상황, 카터방한 상황, 해방전후사에 대한 인식, 범민족대회 경험담, 80년 민주화의 봄, 83년 민통련 결성 논의, 87년 선거와 재야의 분열, 89년 전민련 창립, 한국기독교농민회 이사장 활동, 1986년 전북대 강연 후 구속과 옥중단식, 이석규 노동열사 장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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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범구술자 김상범은 무위당 장일순 선생이 설립한 대성 중`고교를 다니면서 연결된 인연으로 재해대책사업위원회와 사회개발위원회의 활동을 하게 된다. 무엇보다 재해대책위 상담활동가 기간, 마을에서 상호 토론과 협동을 통해 마을복구사업을 펼친 과정을 민주주의의 훈련과정이라고 보고, 이 과정을 통해 성숙된 농민들이 가톨릭농민회 강원연합회의 회원토대가 되었음을 증언한다. 또한 본인은 실질적으로 민주화운동 과정 자체에 큰 역할이나 주도적 활동을 하지는 않았지만, 재해대책위의 활동 자체가 민주화운동이라는 시각으로 삶을 살아간다. 그래서 가톨릭원주교구에서 벌어진 반독재, 반유신 시위에 참가를 하지만 시위를 주도하거나 기획하지는 않았고, 당시 주변의 활동가들이 부락개발사업의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전면에 나서서 투쟁하는 것을 반기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재해대책사업위원회, 사회개발위원회의 15년여 기간을 통해 사회적 문제의 해결을 넘어선 생명운동의 필요성을 가져오게 된 것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김지하 시인이 1982년 작성한 일명 <생명의 세계관 확립과 협동적 생존의 확장>이라는 원주보고서는 이 과정을 통해 만들어진 결과이며 이 원주보고서가 <한살림선언>의 기초가 되었음을 강조한다. 유기농협동운동을 펼치는 한살림생협의 창립정신이 초대 이사장인 고 박재일 씨가 일순간에 만든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현재의 가톨릭농민회가 좀 더 농민들의 문제를 고민하고, 현재의 협동조합이 좀 더 일반 서민들의 삶을 보살피는 활동이 되기를 바라면서 구술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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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찬출생 및 가족관계, 동아중학 시절 학생운동, 한국전쟁으로 인한 고난, 부산대 정치학과 분위기, 이종률 선생과의 조우와 사제의 연을 맺게된 계기, 민족문화협회와 비밀서클 활동, 4.19 이전 부산지역의 민주민족인사들과의 관계, 국제신보 기자 시절 일화, 민주민족청년동맹 경북맹부 결성, 민민청과 통민청 통합 논의, 민족일보와 조용수, 2대악법반대투쟁, 5.16쿠데타 이후 검찰 피소, 인혁당사건 관계, 80년대 이후 민족자주평화회의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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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종완성장과정과 가족상황, 한국전쟁 직후 상황, 이리농과대학 입학과 병역문제, 전북대교수회에서 민주화운동 참여, 전북대학교 민교협 후보로 총장 출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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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광웅출생과 성장과정, 5.18 당시 현장 목격, 목포에서의 시위계획과 진행, 신안 비금 단위농협조합장 생활, 동아일보 격려광고, 서울엠네스티 가입활동과 목포엠네스티 결성과 활동, 목포민주회복국민회의 결성과 활동, 목포에서의 6월항쟁, 87년 대선국면에서의 재야운동, 목포민주시민운동협의회 결성, 김대중 정권 평가 및 목포 문화패 갯돌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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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다지출생 및 유년 시절, 동래중학 및 임시수도 시절, 이종률 선생과의 조우와 일화, 부산대 정치학과 분위기, 국제신보사 입사 관련 일화, 1980년대 민민운동, 민족문화협회 활동, 민주민족청년동맹의 결성 계기, 민민청 조직 기구와 주요활동, 2대악법반대투쟁, 교원노조합법화투쟁 지지활동, 경남민민청사건과 부산민민청사건, 7.29총선 당시 활동과 평가, 경남노인회 결성과 지원, 인혁당사건과 통혁당 사건, 자주평화통일민족회의 활동, 98년 대선 시 민중후보론에 대한 입장, 국내정치와 통일문제, 통일에 대한 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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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기인송기인은 1938년 전남 순천에서 출생하였다. 1960년 2월 부산 원예고를 졸업하고 국회통신이라는 언론사에 취업을 하여 3년간 견습기자 생활을 했다. 그때 사회의 부패상을 접하고 이승만 정권에 대한 분노를 느꼈다. 서울에서 기자 생활 도중에 4‧19를 맞았는데 시위에 참여하고 부산에 내려와서 온천장에서 서면까지 시위를 하다가 트럭을 타고 마산으로 가서 시위를 하였다. 1961년 카톨릭대학교에 입학, 1972년 12월에 신부 서품을 받았다. 당시는 유신체제라는 암울한 시기였는데 언론이 제 역할을 못하는지라 기독교방송에서 아침 명상 시간을 맡아서 방송을 했는데 정보기관의 압력에 의해 방송을 그만둔 적이 있다. 1974년 정의구현사제단 결성에 역할을 했으며, 1980년 5‧18항쟁이 끝난 후 광주를 방문하여 진상조사를 하였다. 1982년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이 났을 때 맨 처음 잡혀 고초를 치르기도 했다. 송기인은 그 후 민족문제연구소 발족을 비롯하여 1985년 5월 부산민주시민협의회 발족, 부마민주항쟁기념사업회, 민주공원 조성 등 부산지역의 시민사회단체를 만드는 데 앞장섰으며, 지역의 민주화 원로로서 지금도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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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좌빈가정환경 및 반일운동 계기, 민주당 등 야당활동에 대한 부분, 대전충남지역 민주화운동에서의 일화와 사건,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 지역운동과 민주화운동의 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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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충일1940년 황해도에서 태어난 오충일은 한국전쟁 직전 어머니와 단둘이 월남하여 인천에 정착했다. 아버지는 일제 강점기 때 일본어를 가르치던 사람으로, 해방 직후 사라졌다가 한국 경찰이 되어 나타났다. 그 후 아버지는 한국전쟁에 군으로 참전, 전쟁 중 폐병을 얻어 구술자가 초등학교 4학년 때 쯤 사망했다. 어머니와 단둘이 인천에서 장사를 시작했고 명문 중학교에서 입학했으나 빈곤을 벗어나지 못했다. 중학생 때 우연히 서울을 방문한 구술자는 이후 상경을 결심하고 인천 생활을 접고 최초 청량리 근처에 자리를 잡는다. 이후 청계천으로 이주해 노점상을 하였다. 노점을 하면서 우연히 교회를 나가게 되고 신앙의 길로 접어들었다. 집안 형편이 녹록치 않았지만, 연세대학교 신학과에 입학해서 본격적으로 신학을 공부했다. 20대 초반에는 농촌운동에 관심을 가지고 경기도 이천의 감리교 산하 교회에서 전도사 생활을 하면서 나름의 농촌운동에 힘썼다. 20살이 되던 1960년, 4월 혁명 때는 개인적으로 참가하였는데, 광화문 사거리에서 시위대들을 위해 수신호수 역할을 했다. 이후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에 진학해 한태동 박사 밑에서 공부를 하였다. 70년대 초반 연세대 위수령 상황에서 김찬국 교수의 당당한 행동에 감동을 받고 학교를 장악한 군대의 모습을 보며 민주화운동에 투신하기로 했다. 70년대 초부터 NCC실행위원을 시작으로 NCC인권위원회, 목요기도회 등을 조직하는데 앞장섰고, 민중과 신학의 관계와 현장성에 관해 고민했다. 조용술 목사의 설교 ‘표리부동’을 배포하여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체포되어 9개월간 수감생활을 하였다. 이후 도시산업선교회 등에서도 활동하였다. 1980년 5‧18민주화운동이 발생했을 때 NCC차원에서 진상조사를 실시해야겠다는 생각으로 광주를 2차례 방문하고 NCC에 보고했으나, 당시 이 의견은 묵살되었다. 1987년 6월항쟁에서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상임집행위원장으로 활동하면서, 국본 조직 및 6‧10항쟁을 이끌었으나, 항쟁 직후 체포되어 한 달 간 서울구치소에 수감되었다. 1990년대에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회장, 기독교사회선교협의회 의장으로 활동했다. 90년대부터는 목회활동에 집중하기도 했다. 《노동일보》사장을 역임하였고, 2004년에는 국가정보원 과거사건진실규명위원회 위원장으로 임명되어 인혁당재건위사건 등 국정원에 의한 국가폭력 사건의 진상규명을 진두지휘했다. 그 후 정계에 투신하여 대통합민주신당(민주당) 창당 및 대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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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병화가정환경과 성장과정, 해방 이후 철도 입사와 노조 결성, 10월항쟁 발발, 9.23 총파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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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영소가치관 형성, 목사가 되기까지의 과정과 목회활동, 기장 목사 활동과 민중교회, 기독교신문 활동, 교회 탄압, 함께 활동한 분들, 후배 운동가들에게 당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