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술 컬렉션
구술컬렉션
문화예술운동
-
김봉준
- 1954년 서울 출생
- 홍익대학교 조소과 75학번으로 입학 후, 1980년 졸업
- 홍익대학교 민속문화 동아리 결성, 탈춤 풍물 민화 등 민속문화 학습
- 봉원사 만봉스님에게 탱화, 불화 전수
- 1978년, 노동마당극 <동일방직 문제 해결하라> 공동연출
- 1980년 창작과 비평 재직 중, 5·18 광주 유인물 제작 및 살포로 계엄포고령 위반, 블랙리스트에 오르며 도망자 생활
- 미술동인 두렁 창립회원, 문화예술운동, 민중미술에 참여
-
김정헌김정헌은 1946년 평양에서 출생, 서울대학교 건축과를 다니던 두 형님을 따라 건축과 진학을 희망했으나 진학에 실패, 재수 시절 취미로 다니던 신영헌 화실에서 조교 이경직을 만나며 미대 진학으로 진로를 변경, 65학번으로 서울대학교 회화과에 입학함. 1960년대 중후반의 서울대학교 미대 학풍에 회의감을 느끼던 중, 대학 세미나에서 임영방 선생이 「미술의 사회적 역할」을 주제로 발표했던 것과 『창작과 비평』에 실린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글들에 많은 영향을 받음. 학창 시절 어울리던 임세택, 오경환, 오윤 등이 현실동인을 만들고, 1969년《현실동인》전을 치르려다 서울미대 교수들의 고발로 무산된 소식을 알게 됨. 대학원 시절이었던 1972년부터 졸업 후 1980년 무렵까지 미술교사 생활을 함. 이 시기 오수환(1946~), 원승덕(1941~) 작가와 어울리며《잡초전(三人展)》(1975, 1977) 등의 전시를 함.1979년, 김정헌의 명륜동 화실로 선배 최민과 동기 오윤 등이 찾아와 현실과 발언의 결성을 제안, 그 외 4‧19 20주년을 기념하며 동인 결성을 주도한 원동석 무리와 성완경 무리 등이 모여 1980년 10월 미술회관 지하 전시실에서 《현실과 발언 창립전》을 개최하려 했으나, 당시 전시 작품의 비판 수위를 보고 놀란 관장이 일방적으로 전시 취소를 결정, 김정헌 작가 등이 관장을 찾아가 항의하였으나 운영위원회까지 소집하여 취소 결정을 단행하고 전시장의 전기를 끊어버림. 이에 전시장에 방문한 관람객들이 촛불을 켜고 작품을 관람한 일화로 ‘촛불 전시’로 알려짐. 한달 후 동산방화랑에서 창립전 재개최를 제안하여 창립전이 치러짐. (평론가 윤범모, 성완경, 원동석, 최민과 작가 김정헌, 김용태, 민정기, 임옥상, 주재환, 권순철, 강요배, 노원희 등 참여) 당시 『중앙일보』에서 이 전시에 대해 조명하며, 많은 관람객이 찾았고, 임술년 등과 같은 후배 민중미술 소집단의 결성에 영향을 미침.1985년 군사정부의 예술탄압 사건을 대표하는 이른 바 `힘전' 사건 -《한국미술, 20대의 힘전》(아랍미술관)의 전시 강제 취소 및 그림 탈취(압수) 사건- 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민족미술협의회(민미협)가 결성되고, 안전한 전시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김용태, 유홍준 등과 인사동에 그림마당 민을 만들고 운영함.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다룬 《반고문전》을 비롯하여, 민중미술 활동을 위한 각종 기금마련전을 운용하며 종로서 형사들의 감시 공간이 됨. 1986년 일본의 화가 도마야마 다에코와 미술평론가 하리우 이치로의 초청으로 손장섭, 성완경 등과 《JAALA전》(민중의 아시아)에 참석, 이 과정에서 민중미술 계열 예술가들의 일본행을 탐탁지 않아하던 정부 관계자들의 훼방이 있었음.1980년 공주사대 미술교육과 교수로 부임, 탈춤반 지도교수를 맡으며 학내에서 불온교수로 낙인찍힘. 1984년 무렵 공주사대 불문과 강사로 온 퐁세 신부의 제안으로 공주교도소 벽화 <꿈과 기도>를 제작함. 당시 현실과 발언에서 공공미술의 일환으로 벽화 운동에 관심을 갖고 있던 때라 수락, 농촌의 세 계절을 소재로 작업을 진행, 현재는 사라짐.1994년, 당시 국립현대미술관 임영방 관장의 제안으로 유홍준, 임옥상, 최열, 김인순, 라원식[양원모] 등과《민중미술 15년전》 기획을 돕고, 전시에 참여함, 같은 해 예술의 전당에서 《동학 100주년 기념전》을 기획하고 참여함. 이후 1999년 문화연대 상임공동대표를, 2007-2008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위원장을 지냈고, 2012년 서울문화재단 이사장을 지냈다. 현재 4‧16재단 이사장으로 있으며, 작품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1차)- 1946년 평양에서 출생- 1965년 서울대학교 회화과 입학 후, 1977년 서울대학교 대학원 회화과 졸업- 1979년 말 현실과 발언 동인 창립 회원이자 초대 대표를 맡음. 1980년 군부독재정권 하에서 창립전이 취소되어 ‘촛불 전시’가 됨- 현실과 발언 결성 과정과 주요 전시- 1985년《한국미술, 20대의 힘전》사태에 대한 미술계의 대응과 민족미술협의회(민미협) 결성 과정- 일본의 (민중미술 관련 전시)《JALLA전》 초청과 참여 과정(2차)- 현실과 발언 해체 과정까지 구술- 공주사대 재직 시절, 탈춤반 지도교수를 맡으며 불온 교수로 낙인찍힌 과정- 1985년, 공주교도소 벽화 작업 <꿈과 기도> 제작 계기, 제작 과정, 작품 설명- 그림마당 민을 만들기까지의 과정과 그림마당 민의 역할- 일본의 《JALLA전》 참여 과정 재진술, 이 전시 참여에 대한 정부 관계자들의 대응 진술- 《민중미술 15년전》(국립현대미술관, 1994) 개입 과정과 참여- 《동학 100주년 기념전》(예술의 전당, 1994) 기획 과정- 민중미술에 대한 생각
-
김종례
- 1946년 서울 출생
- 서울교대 입학 후 졸업(1968)
- 서울교대 시절 박광진 교수의 영향으로 미술을 배우고, 1967년《국전》입선
- ‘한국 근대여성 지도자 100인’에 선정
- 초등학교 교사 생활
- 결혼, 임신, 출산 등으로 교직 생활을 그만둠
- ‘죽음’에 대한 화두가 그림에 등장.
- 1980년대 초, 서초동 제3화실에서, 김인순, 윤석남 등과의 작가들과 교류
- 1982년《11인의 소묘전》
- 정문규, 유홍준 등의 도움을 받으며 본격적 작품 활동
- 1985년 관훈미술관 첫 개인전: 죽음, 상처, 회복을 주제로 다룬 작품 발표
- 1985년 ‘힘전’ 사건 뉴스 보도에 작품 등장, ‘민중, 민중미술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
- ‘민미협’ 내 여성미술분과 활동하며, 여성 문제를 본격적으로 문화예술운동 안으로 끌어오는 과정
- ‘여미연’ 결성 및 활동,《여성과 현실전》참여, 한국 여성주의미술운동
- 여성과 노동을 주제로 한 다수의 걸개그림 공동제작에 참여
- 가족법 개정과 같은 실질적 법 개정에 영향을 미침
-
김주형
- 1958년 서울 영등포구에서 2남 2녀 중 셋째로 출생
- 홍익대학교 미술교육과(회화 전공) 77학번으로 입학 후 제적
- 1980년 학내 5·18민주화운동을 알리는 유인물 제작, 살포, 계엄포고령 위반 혐의로 구속
- 1981년 8·15 특사로 사면, 사면 후 학생운동, 노동자문화운동에 투신
- 미술동인 두렁 창립회원, 생활문화연구소 신명 활동 등 문화예술운동, 민중미술에 참여
-
박경훈
- 1962년 제주 출생
- 제주 오현고등학교 미술교사로 있던 강광의 권유로 미술반 활동, 문행섭, 홍성석 등과 교류
- 제주대학교 미술교육과 입학 후 졸업(1985)
- 1988년 ‘제주’ 지역의 자생적 미술운동 그림패 ‘보롬코지’ (제주도 내 최초의 민중미술 동인) 창립. 김수범, 문행섭, 부양식, 양은주, 김동수 등과 함께 ‘보롬코지’ 활동을 시작.
- 1987년 이후, 4·3 에 대한 증언이 나오기 시작, 1989년 4월 ‘보롬코지’의 주도로 첫 《4·3 미술제》가 기획. 같은 해 8월 《4·3 넋살림전》(그림마당 민)을 기획하여, 서울에도 ‘4·3’에 대해 알리는 역할.
- 금기의 언어였던 ‘4·3’을 미학적 테제로 최초 노출한 전시
- ‘보롬코지’의 다수 회원이 전국 조직 ‘민미협’ 활동에 결합
- 1993년 ‘보롬코지’의 발전적 해체 이후, ‘탐미협’ 창립을 주도
- 4·3 목판화 연작 제작, 해제
-
박홍규
- 1959년 전남 부안 출생
- 홍익대학교 조소과 입학 및 졸업(1985)
- 『농민가락 차차차』(1984년 10월, 한국기독교농민회총연합회 발행)에 이봉민 등 홍대 민화반과 함께 삽화 제작
- 미술동인 두렁 회원
- 농민운동 투신(1986-)
- 전국농민회총연맹(전농) 1기 문화국장(1990) 활동
- 1989년 2·13여의도농민대회(2·13투쟁)으로 인해 수배
- 『한국농정신문』에 <농민만평> 연재 등
-
양원모
- 1958년, 강원도 영월군에서 4남 1녀 중 장남으로 출생
- 가톨릭의 종교적 영향과 오산학교의 민족주의 교육 아래 성장
- 홍익대학교 사범대 외국어교육학과 입학
- 향린교회에서 인문, 사회학 공부하고 기독교 탈춤반(기탈), 홍익대 탈춤반 눈솟말 재인패 활동. 연합대학 탈춤반(연탈)에서 후배들 교육 담당 주무로 활동
- 미술동인 두렁과 놀이패 한광대에서 활동. 노동 현장에서도 문화예술을 통한 노동운동에 참여
-
이기연
- 1956년 서울에서 출생
- 홍익대학교 조소과 입학, 졸업
- 1980년, 5‧18민주화운동 유인물 제작, 배포로 체포, 심문
- 1981년 동월교회(돌산교회) 허병섭 목사 제안으로 노동자 의식화 교육 프로젝트(교육책자 제작)에 그림으로 참여
- 1985-6년, 『사장과 진실』, <깡순이> 만화 (서울노동운동연합(서노련) 기관지 연재, 이은홍, 이기연, 김주형 공동) 제작
- 《한국미술, 20대의 힘전》 사건 투쟁 과정
-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 창립판화 <두꺼비>
-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민가협) 수첩 제작
- 미술동인 두렁 창립회원, 신명, ‘질경이 우리 옷’ 활동 등 문화예술운동, 노동운동, 노동자문화운동에 참여
-
이은홍
이은홍은 1960년 전주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조선일보 지방 주재 기자를 하던 아버지가 해직 당한 후, 신문 보급소(조선일보 지국장) 운영하며 신문사 집 아들로 불렸다. 전주 신흥고등학교 시절, 교사로 재직 중이던 정양 시인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미술동인 두렁 회원인 박홍규와는 고등학교 동기이자 대학 동기이기도 하다. 아버지의 권유로 미대 입시를 준비, 1978년 홍익대학교 미술교육과로 입학 후, 폐과되어 1985년 동양화과로 졸업하였다. 한신대학교 재학 중이던 고향친구와 어울리며, 하월곡동 동월교회(돌산교회)에서 빈민 선교를 하던 허병섭 목사와 만남, 동월교회에서 어린이들에게 그림을 가르쳐주며 대학 시절을 보냈다. 동월교회(돌산교회)에서 만난 동일방직 해고 여성 노동자들을 통해 노동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1981년, 대학 4학년 시절, 허병섭 목사의 제안으로, 이기연, 성효숙, 이정임, 조소영과 함께 노동자 (의식화) 교육 프로젝트에 협력하여 수백 장을 노동 관련 그림을 그렸으나 분실하였다. 1980년, 대학 3학년 시절, 보문동에 화실을 차리고 성균관대 운동권이었던 친형과 함께 살았다. 5·18민주화운동(당시 광주학살, 광주사태) 이후, 보문동 화실은 성균관대 운동권 학생들의 일종의 아지트처럼 사용되고, 화실에서 5·18 관련 유인물을 제작하였다.
1980년, 학교 외부 연합모임에서 이기연 선배 등을 만나, 이후 학내 탈춤반 중심의 사회과학 학습 모임에 합류하였다. 학내 유인물 제작 및 살포 계획 모의 중, 김주형이 유인물 사건으로 구속, 이에 영향 받아 유인물 살포 계획이 불발되고, 1981년 학교를 졸업, 1982년 8월에 군에 입대하였다. 군 입대 중, 두렁이 결성되고, 《미술동인 ‘두렁’ 창립예행전》(애오개 소극장, 1983)과 《미술동인 ‘두렁’ 창립전》(경인미술관, 1984) 소식은 군대에서 『산 미술』 동인지를 통해 접하였다. 1984년 가을, 제대 후 자연스럽게 미술동인 두렁에 합류(공식 가입은 1985년으로 기록), 《한국미술, 20대의 힘전》(아랍미술관, 1985) 사건 –경찰에 의한 작품 탈취- 에 항의하는 투쟁에 두렁 회원들과 참여하였다. 노동자로서의 삶에 대한 결심, 노동자로서의 ‘존재-이전’을 실행하기 위해, 인천 부평 4공단, 대한금속에 취업하여 노동자로 살아가다 부상당해 쉬던 중, 신명에서 함께 활동하던 이기연, 김주형의 권유로, 서울노동운동연합(서노련)의 기관지 네 컷 만화 <깡순이> 작업을 이어서 맡게 되면서, 김문수를 만나게 되었다. 일명 서노련사건에 연루되어 체포, 노동자 교육용 학습만화 <사장과 진실>과 서울노동운동연합(서노련) 기관지에 연재한 <깡순이>가 이적 표현물로 분류되며, 이적 표현물 제작 혐의로 구속,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안양교도소에서 6개월 실형을 살았다. (1심에서 구형 5년, 선고 3년 받은 후, 1986년 10월 건대 애학투사건(전국반외세반독재애국학생투쟁연합)의 영향으로 2심에서 집행유예로 석방되었다.) 이기연, 김주형 등과 공동 제작하였으나 이은홍이 혼자 한 것으로 재판을 받고 수감 생활을 하게 되면서, ‘깡순이 작가 이은홍’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불법 납치 구금에 항의하며 구치소에서 「‘노동미술’의 올바른 자리매김을 위하여」 글을 작성하여 이기연의 도움을 받아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민가협)를 통해 외부로 알렸다. 서울노동운동연합(서노련) 변호를 맡았던 조영래, 이상수 변호사를 통해 고문규탄대회 공개 발언자로 나서길 권유받았으나, 노동자로서의 삶을 위해 포기, 이후 1987-1988년 시기, 이기연, 연성수, 김주형 등과 한국문화운동연구소(한문연)에 속해 파업 현장 지원 및 노동조합, 노동자 소모임 지원 활동을 이어갔다.
1989년 결혼 이후, 한국문화운동연구소(한문연) 활동 정리 후 인천으로 이동, 인천여성노동자운동 관련 노동단체 및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노협), 한국여성노동자회, 산재노동자협회,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 진정추진위원회(진보정당추진위원회), 백선본(민중후보백기완선거운동본부) 등 각종 노동운동 단체 선전물 작업 제작 및 만화, 만평을 그렸다. 1995년 이후, 사계절 출판사의 『역사신문』 작업을 맡으며, 개인 작업으로의 방향 전환을 모색, 현재는 ‘노동해방’-일, 일꾼, 일터를 주제로 한 만화 작업을 구상 중이다.
- 1960년 전주에서 출생
- 홍익대학교 미술교육과 78학번으로 입학 후, 1985년 동양화과로 졸업
- 1980년, 5·18민주화운동 유인물 제작에 가담
- 1981년 동월교회(돌산교회) 허병섭 목사 제안으로 노동자 의식화 교육 프로젝트(교육책자 제작)에 그림으로 참여
- 1986년, 서노련사건으로 체포, <사장과 진실>, <깡순이>가 이적표현물로 분류되며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6개월 실형
- 미술동인 두렁 창립회원, 민족생활문화연구소 신명, 한국문화운동연구소(한문연) 활동 등 문화예술운동, 노동운동, 노동자문화운동에 참여
-
장진영
장진영(예명 장영수)은 1956년 서울에서 2남 중 막내로 태어났다. 부모님 두 분이 모두 한국전쟁 때 월남한 실향민으로, 중앙정보부 지휘관급 요원으로 있던 아버지 직장 근처 우이동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중3 무렵 아버지가 빚을 지고 도망, 은행에 집이 저당 잡히며 어머니와 형과 함께 야반도주, 청량리역 근처에 단칸방을 얻어 살면서 어머니가 노점상을 하며 생계를 유지했다. 불우한 환경 속에서 형은 서울대학교 사회 계열로 진학했으나, 청소년기를 우울하게 보내며 고등학교 입시까지 실패, 방황하던 시절 가출하여, 당시 그렸던 만화그림들을 모아 ‘소년한국일보’사에 찾아갔으나 집으로 돌려보내짐. 재수해서 중경고등학교로 진학, 미술반 활동을 하며 선배 화실에서 독락으로 미대 입시를 준비, 홍익대학교 서양화과에 76학번으로 입학했다.
대학 시절, 추상미술 계열의 작품 활동이 지배적인 학풍 속에서 ‘예술이란 무엇인가’라는 의문에 부딪혔다. 친형의 추천으로 『창작과 비평』을 접하고, 백낙청의 평론 「문학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 등을 읽으며 감흥을 받았다. 대학 1학년 시절, 선배의 권유로 연극반에 가입, 훗날 두렁 활동을 함께 한 이기연을 만났다. 홍익대학교 연극반 활동 시절, 회장을 맡으며 번역극 금지와 구타 금지를 선언했다가 전통을 와해시킨다는 명목으로 선배들의 구타 속에 제명을 당했다. 대학 3-4학년 시절, 관계하고 있던 교사 연극모임이 남민전사건(간첩단사건)에 연루되며 전원 체포, 회원명부에 이름이 올라가지 않아 수배 대상에서 제외되었으나 연이은 폭력과 억압으로 정신착란 증세를 경험하였다.
1977년 서울대중앙도서관점거 유신반대시위사건(11·11중앙도서관점거농성)에 참여했던 친형이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되었다. 구속자 가족 총무를 맡아 인권 변호사 섭외, NCC(한국기독교 교회협의회 인권위원회)와 관계하며 한국 사회 현실에 눈을 뜨게 되었다. 법정에서 친형의 최후 진술-자립 경제, 민주 정치, 노동자 계급의 권리 보장-을 통해 학습, 대학 4학년 시절, 친형을 통해 대한전선노동조합의 신금호 선배(노동운동가, 당시 대한전선노조 전문위원)를 만나 대한전선노조의 선전물 작업(노동자 교육을 위한 만화 슬라이드 작업)을 하며 예술의 역할과 의미를 찾았다.
대학교 3학년 시절, 서울대 운동권의 소개로 김봉준 선배와 첫 만남, 1982년 군 제대 후 재회하며 홍익대 내 스터디 모임에 합류하였다. 1983년, 공개된 반합법 문화적 정치투쟁 공간으로서의 애오개 소극장(애오개 문화공간)이 출범, 서울대 탈반 활동가들과 김봉준 등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애오개에서 지내며 《미술동인 ‘두렁’ 창립예행전》을 준비하였다. 당시 수배 중이던 김봉준, 결혼과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 창립 준비 과정에 있던 이기연, 한국노동자복지협의회(한노협) 활동과 노동 현장 활동에 치중해 있었던 김주형 등 초기 두렁 회원들의 여건 상, 공개 활동으로 장진영이 총대를 메고 두렁의 대표를 맡아 《미술동인 ‘두렁’ 창립예행전》과 이후 《미술동인 ‘두렁’ 창립전》을 치러 냈다. 창립전 이후 애오개에서 독립하여 장진영이 살던 방을 정리하여 서대문 로터리에 두렁 작업실을 구축하여 활동을 했다. 이 시절, 작업실 밖에는 늘 형사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1985년, 정치적 문화투쟁을 선언한 단체 민중문화운동협의회(민문협)이 창립, 집행부 간사를 맡게 되면서 두렁의 회장직을 김우선에게 넘겼다. 민중문화운동협의회(민문협) 활동 시절, 각종 노동단체 회보 및 집회 선전물(선전그림) 등 노동운동 관련 인쇄물, 걸개그림, 깃발, 슬라이드 등을 제작 총괄하였다. 1985년, 《한국미술, 20대의 힘전》 사건 –경찰에 의한 불법 그림 탈취(압수)- 에 미술동인 두렁이 관계, 미술 탄압에 항의하는 미술계의 목소리가 모아져 민족미술협의회(민미협)가 창립되었다. 1986년, 민중문화운동협의회(민문협)이 노선투쟁 –중간계층의 선전 역량 강화 vs. 노동계급의 선전 역량 강화-을 겪으며 와해, 노동계급 강화 이론에 방점을 찍었던 장진영 역시 1986년 조직을 정리하였다.
민중문화운동협의회(민문협) 활동을 정리한 이후, 1987년 후배들과 『만화신문』을 제작, 노동운동가 유동우가 대표로 있던 기독노동자총연맹에서 방패막이 역할을 해주었으나 1여년 발행 후 해체하였다. 이 외 작화공방에서는 『임투를 위한 선전·문화활동 실무사전』, 『이석규 열사전』 등을 출간하였다. 1987년 6월항쟁 이후 언론 표현의 자유가 확대되며 문화 지형의 변화를 감지, 저항만화보다 합법적 대중만화의 인기가 높아졌음을 실감하며, 1994년 작화공방의 발전적 해체를 단행하였다.
1994년 이후, 귀농하여 농사 짓는 틈틈이『주간노동자신문』, 『문화일보』, 『한국농어민신문』 등에 만화와 만평을 연재, 연재했던 만화들을 『삽 한 자루 달랑 들고』, 『무논에 개구리 울고』 등의 단행본으로 출간하였다. 최근에는 민중만화에 대한 재평가 작업을 위해, 1980년대 작업했던 재야단체 기관지에 실린 민중만화들을 묶어 출간하였다. 그 중 1980년대 학생운동 과정에 있던 이름 없는 민주투사들에게 바치는 헌정만화 <나선>과 여성 노동자가 선진 노동자로 나아가는 과정을 그린 <누가 나를 이 길로 가라 하지 않았네> 등이 있다.
- 1956년 서울에서 2남 중 막내로 출생
- 홍익대학교 서양화과 76학번으로 입학 후, 1980년 졸업
- 1977년 서울대중앙도서관점거 유신반대시위사건(11·11중앙도서관점거농성),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친형이 구속되며, 구속자 가족 활동을 시작함
- 1979년 대한전선노조의 선전물 작업 (노동자 교육을 위한 만화 형식의 슬라이드 작업)
- 미술동인 두렁과 민중문화운동협의회(민문협) 활동을 하며 민주화운동, 노동운동, 문화예술운동에 참여
- 1980년대 민중만화 관련 구술
-
정선희
* 하이라이트 영상 준비중입니다
- 1959년 부산 출생
- 대구효성여자대학교 독어독문과 입학 후 졸업
- 대학 시절 학내 문제에 발언하는 대자보를 붙이며 처음 사회적 발언을 함
- 대학 졸업 후 충무로 기획사에서 디자인 일 시작
- 학생운동 하던 동생의 영향으로 성수동 봉제공장 취업
- 봉제공장 나온 후, ‘민미협’ 소개로 ‘우리마당’ 활동 시작
- ‘우리마당’의 인연으로 1987년 서울미술운동집단 ‘가는패’ 결성
- ‘가는패’ 첫 사업: 박종철 열사 장례 걸개그림 제작
- 1987년, 상계동 철거민 지원을 위한 《‘가는패’ 열림전》
- 《농촌 장터 순회전》
- 한독금속노조 연대 공장벽화 제작
- 노동절 《벽보선전전》
- 노동자 화실 햇살그림터 개소
- 1988년, ‘전노협’ 제안으로 연세대학교에서 열린 전태일열사 정신계승 전국노동자대회를 위한 걸개그림 <노동자> 제작
- 1988년, ‘민미련 건준위’ 참여. ‘가는패’ 대표 차일환 등 구속
- ‘가는패’에서 ‘서울민미련’으로 확대 개편, ‘서울민미련’ 대표를 맡아 이끔
- 1991년, 국가보안법 위반(이적단체구성) 혐의로 구속되어 수감 생활 후 출소
-
정정엽
- 1962년 전남 강진 출생
- 이화여자대학교 서양화과 입학 후 졸업(1985)
- 현장 지향 민중미술 소집단 ‘두렁’의 동인 가입(1985)
- ‘두렁’의 산개와 함께 ‘밭두렁’의 일원으로 1986년 부평공단에 노동자로 취업
- 부평공단 시절 함께 했던 노동자 동료들과 주고받은 편지(일부) 구술
- 현장 생활을 정리 후 노동운동을 지원하는 문화 소모임 ‘일손나눔’ 활동
- 인천 미술패 ‘갯꽃’ 활동(1986~1992)을 하며 다수의 현장 작업 진행
- 걸개그림(<송철순열사도> 등), 깃발그림, 벽화(한독금속벽화), 판화, 삽화 등-제작.
- 민족미술협의회 산하 여성미술분과 모임(1989년 ‘여성미술연구회’로 명칭 변경) 등의 활동 병행
- 일정 기간 ‘여미연’을 대표로서 이끌었으며, 그림패 ‘둥지’ 등의 활동에도 관여
- 여성과 노동을 주제로 한 다수의 걸개그림을 제작
- 1987년 김인순, 김종례, 정정엽, 그림패 ‘둥지’ 등 공동제작, 명동성당 앞 6·10 민주항쟁 현장에서 활용된 걸개그림 <해방의 햇새벽이 떠오를 때까지 하나되어 나아가세> 제작과정 구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