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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준김봉준은 1954년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1967년 용산 중·고등학교 시절 미술반 활동을 했고, 재수 후 홍익대학교 조소과에 입학하여 1980년 졸업했다. 대학 재학 당시 민속문화 서클을 결성하여 탈춤·풍물·탈·민화·불화·민요 등 민속예술의 학습과 연구에 열중하였다. 졸업 직후 첫 직장 ‘창작과 비평’사를 다닌 지 3개월도 안 되서 1980년 5·18민주화운동을 알려는 유인물 제작 및 배포로 수배(5·18 계엄포고령 위반)되었다. 1여 년간의 도피 생활 끝에 사회에서의 직장 생활을 접고 사회운동을 하기 시작했다. 1981년부터 1983년까지 기독교농민회의 문화간사, 1982년 굴레방 놀이기획실, 1983부터 1984년까지 애오개 문화마당 운영위, 1985년 민중문화운동협의회(민문협)로 이어서 독재정권에 저항하는 민중운동과 문화운동을 하였다. 1986년에는 민족굿회 결성하며 굿 문화에 대한 실기와 연구를 병행하였다. 1987년 민중문화운동협의회(민문협) 실행위원회 결의로 미주 지역 동포사회에 민중문화 보급의 사명을 지명 받고 도미, 5개 도시(뉴욕, 워싱턴, 마이애미, LA, 샌프란시스코, 독일 보쿰 등)에 풍물패를 조직하고 민중미술을 보급하였다. 1987년 12월, 대선 전에 귀국하였으나 활동을 보고할 단체도 와해되었다. 민주 진영의 분열로 노태우 정권이 들어서자 크게 실망하고 서울 활동을 접고 지역으로 내려갔다.
1981년 걸개그림 〈만상천화〉 제작과 농민회 만화책 『농사꾼 타령』(기독교농민회 발간)으로 민중미술을 시작하였다. 졸업 직후, 1983년 민중미술을 지향하는 미술동인 두렁을 결성하였다. 1983년 《미술동인 `두렁' 창립예행전》과 1984년 《미술동인 `두렁' 창립전》을 펼치고, 동인지 『산 그림』과 『산 미술』을 출간하였다. 두렁과 애오개 소극장(문화공간) 활동을 하며 걸개그림운동, 민중목판화운동을 펼쳤다. 여러 마당극의 출연과 연출, 그리고 미술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1985년 『민중미술』(도서출판 공동체) 발간 편집위원장을, 1985년 민중문화운동협의회(민문협) 기획국장을 맡았다. 1987년 이후 5년 간 부천에서 놀이마당 복사골을 운영하며 노조문화 지원 활동과 시민미술공방 흙손공방을 경영하였다. 1993년 이후 강원도 원주 문막으로 낙향, 오랜미래신화미술관을 운영하며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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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헌김정헌은 1946년 평양에서 출생, 서울대학교 건축과를 다니던 두 형님을 따라 건축과 진학을 희망했으나 진학에 실패, 재수 시절 취미로 다니던 신영헌 화실에서 조교 이경직을 만나며 미대 진학으로 진로를 변경, 65학번으로 서울대학교 회화과에 입학함. 1960년대 중후반의 서울대학교 미대 학풍에 회의감을 느끼던 중, 대학 세미나에서 임영방 선생이 「미술의 사회적 역할」을 주제로 발표했던 것과 『창작과 비평』에 실린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글들에 많은 영향을 받음. 학창 시절 어울리던 임세택, 오경환, 오윤 등이 현실동인을 만들고, 1969년《현실동인》전을 치르려다 서울미대 교수들의 고발로 무산된 소식을 알게 됨. 대학원 시절이었던 1972년부터 졸업 후 1980년 무렵까지 미술교사 생활을 함. 이 시기 오수환(1946~), 원승덕(1941~) 작가와 어울리며《잡초전(三人展)》(1975, 1977) 등의 전시를 함.1979년, 김정헌의 명륜동 화실로 선배 최민과 동기 오윤 등이 찾아와 현실과 발언의 결성을 제안, 그 외 4‧19 20주년을 기념하며 동인 결성을 주도한 원동석 무리와 성완경 무리 등이 모여 1980년 10월 미술회관 지하 전시실에서 《현실과 발언 창립전》을 개최하려 했으나, 당시 전시 작품의 비판 수위를 보고 놀란 관장이 일방적으로 전시 취소를 결정, 김정헌 작가 등이 관장을 찾아가 항의하였으나 운영위원회까지 소집하여 취소 결정을 단행하고 전시장의 전기를 끊어버림. 이에 전시장에 방문한 관람객들이 촛불을 켜고 작품을 관람한 일화로 ‘촛불 전시’로 알려짐. 한달 후 동산방화랑에서 창립전 재개최를 제안하여 창립전이 치러짐. (평론가 윤범모, 성완경, 원동석, 최민과 작가 김정헌, 김용태, 민정기, 임옥상, 주재환, 권순철, 강요배, 노원희 등 참여) 당시 『중앙일보』에서 이 전시에 대해 조명하며, 많은 관람객이 찾았고, 임술년 등과 같은 후배 민중미술 소집단의 결성에 영향을 미침.1985년 군사정부의 예술탄압 사건을 대표하는 이른 바 `힘전' 사건 -《한국미술, 20대의 힘전》(아랍미술관)의 전시 강제 취소 및 그림 탈취(압수) 사건- 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민족미술협의회(민미협)가 결성되고, 안전한 전시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김용태, 유홍준 등과 인사동에 그림마당 민을 만들고 운영함.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다룬 《반고문전》을 비롯하여, 민중미술 활동을 위한 각종 기금마련전을 운용하며 종로서 형사들의 감시 공간이 됨. 1986년 일본의 화가 도마야마 다에코와 미술평론가 하리우 이치로의 초청으로 손장섭, 성완경 등과 《JAALA전》(민중의 아시아)에 참석, 이 과정에서 민중미술 계열 예술가들의 일본행을 탐탁지 않아하던 정부 관계자들의 훼방이 있었음.1980년 공주사대 미술교육과 교수로 부임, 탈춤반 지도교수를 맡으며 학내에서 불온교수로 낙인찍힘. 1984년 무렵 공주사대 불문과 강사로 온 퐁세 신부의 제안으로 공주교도소 벽화 <꿈과 기도>를 제작함. 당시 현실과 발언에서 공공미술의 일환으로 벽화 운동에 관심을 갖고 있던 때라 수락, 농촌의 세 계절을 소재로 작업을 진행, 현재는 사라짐.1994년, 당시 국립현대미술관 임영방 관장의 제안으로 유홍준, 임옥상, 최열, 김인순, 라원식[양원모] 등과《민중미술 15년전》 기획을 돕고, 전시에 참여함, 같은 해 예술의 전당에서 《동학 100주년 기념전》을 기획하고 참여함. 이후 1999년 문화연대 상임공동대표를, 2007-2008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위원장을 지냈고, 2012년 서울문화재단 이사장을 지냈다. 현재 4‧16재단 이사장으로 있으며, 작품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
김종례김종례는 1946년 서울에서 출생. 1961년 중학교 시절, 5‧16 군사정변 지켜봄. (보수적 학풍의) 진명여자고등학교를 거쳐, 서울교대에 진학. 서울교대 시절 박광진(1935~) 교수의 영향으로 미술을 배우고, 1967년《국전》에 입선.《국전》입선 작품을 덕수궁미술관에서 박정희가 관람한 후, 당시 장기영 경제부총리에 의해 구입. 졸업 후에도 박광진 교수의 일을 도우며, ‘일요화가회’ 등의 모임의 총무를 맡았고, 민족기록화 사업이 진행되는 것을 지켜본 경험이 있음. ‘한국 근대여성 지도자 100인’에 선정. 초등학교 교사 생활을 하다 결혼과 연이은 출산으로 인해 교직 생활을 그만둠. 1남 3녀 중, 아들이 4살 되던 해 아들을 잃음, ‘죽음’에 대한 화두가 그림에 등장. 1980년대 초, 서초동의 제3화실을 오가며, 김인순, 윤석남 등과의 작가들과 교류. 1982년 이들과 함께 《11인의 소묘전》을 치르고, 이 무렵부터 정문규, 유홍준 등의 도움을 받으며 작품 활동을 함. 1985년 관훈미술관에서의 첫 개인전에서 죽음과 상처, 회복을 주제로 다룬 작품 발표. 1985년 힘전 사건이 뉴스에 보도될 때, 김종례의 작품도 함께 등장, 이 시기 ‘민중이란 무엇인가?’, ‘민중미술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본격적으로 고민하기 시작. 김인순 등과 함께 ‘힘전 사건’의 대책 마련을 위한 모임(수유리 아카데미하우스)에 참여. 1985년 ‘시월모임’의 창립에 관여는 하였으나, 개인사로 인해 지속적으로 함께하지는 못함. 1986년에서 1987년 무렵, ‘민미협’ 활동을 하며 《반고문전》, 《통일전》, 《인간전》 등 다수의 전시에 참여하면서, 박종철 열사·권인숙 성고문 사건 등에 작업으로서 발언. ‘민미협’ 안에서 여성미술분과(1986~) 활동을 하면서 여성 문제를 본격적으로 문화예술운동 안으로 끌어옴. ‘민미협’ 소속의 여성 작가들과 모여 ‘여미연’(1987년 6월 결성)을 만들어내는 데 역할을 함. 김인순·윤석남·정정엽 등과 ‘여미연’ 활동을 하며《여성과 현실전》을 연례적으로 기획하여 한국 여성주의미술운동의 새로운 흐름을 보여줌. 그림패 ‘둥지’ 활동에 부분적으로 개입하여 여성과 노동을 주제로 한 다수의 걸개그림 공동제작. 1980년대 여성들의 문제, 특히 여성인권과 관련한 문제들을 문화예술의 주제로 다뤄온 과정 구술. 가족법 개정과 같은 실질적 법 개정에도 영향을 미쳤음을 확인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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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형김주형(예명 김준호)는 1958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1977년 홍익대학교 미술교육과 입학 후, 1980년 계엄포고령 위반으로 구속된 일로 제적당했다. 대학교 3학년 때인 1979년에 탈춤반 눈솟말 재인패에서 회장을 맡았다. 1980년 홍익여자중학교에서 교생실습 과정에서 5·18민주화운동을 접하게 되고, 이후 관련하여 학내 유인물을 제작 및 살포하였다가 계엄포고령 위반으로 구속되었다. 종로경찰서, 마포경찰서, 서울구치소, 교도소 등을 거치며 취조, 수감 과정에서 지속적으로 구타 및 고문을 당하였다. 1981년 8·15 특사로 석방되었다. 석방 이후, 성남 만남의 집을 중심으로, 노동자 의식화 교육 활동에 전념했다. 노동자문화운동 단체를 만들어 그림·풍물·탈춤·노래·대동놀이 등을 이용하여 노동자문화 강습 활동을 했다. 신명, 질경이 우리 옷, 한국문화운동연구소(한문연) 등의 활동을 하며, `공동체놀이'의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보급한 활동 내용을 정리하여 『공동체놀이』(동녘출판사, 1985년 초판 인쇄, 공동제작)라는 책으로 출간했다. 1985년 목동 철거민의 항거를 다룬 『나뭇골 사람들』(연성수 구성, 공동체 펴냄, 공동제작)을 출간했다.
미술동인 두렁의 창립 회원으로 1984년 《미술동인 두렁 창립전》에 전태일과 노동자의 삶을 그려낸 판화 연작 -<서울로 가는 길> 외- 을 출품했다. 원작은 소실되었지만 작품을 촬영한 인화사진 이미지가 남아 있다. 1984년 무크지 『우리들 I』에 만화 <웃으며 일하는 기쁨>을 실었다. 1985년 영등포 산업선교회의 `파업을 지지하기 위한 기금 마련 전시회'에 참여하는 등 노동자투쟁을 지원하는 전시와 강습 활동을 했다. 1985년 《한국미술, 20대의 힘전》에서 대우어패럴 노조투쟁을 지지하는 작품들 등이 경찰에 의해 탈취되었고, 두렁 및 서울미술공동체(서미공) 등의 작가들과 전시 탄압에 대한 투쟁 과정에 참여했다.
1980년대 초반부터 한국노동자복지협의회(한노협),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 서울노동운동연합(서노련) 등에 파견되어 만화·미술을 활용해 선전 활동을 했다. 주로 『민주노동』, 『민주화의 길』, 『서노련신문』의 만화 및 만평 작업에 참여했다. (1984~1986년,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 파견 작업으로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 창간호 만평, 『민청련 구속자 소식』지에 삽화 등 제작, 회지에 만화 <민돌이 이야기>를 연재하였다. 1984년 전후, 한국노동자복지협의회(한노협) 작업 『민주노동』 회보 삽화 <그림으로 보는 노동의 역사>를 제작하였다. 『민주노동』 회보 작업 당시 서울노동운동연합(서노련)의 김문수와의 인연으로 서울노동운동연합(서노련) 활동에 참여, 1984~1986년 시기에 『서노련신문』 에 <깡순이>를 연재(공동제작), 1986년, <사장과 진실> (김문수 기획, 김주형·이기연·이은홍·(조형일) 공동제작) 작업에 참여하였다. 이 작업으로 인해, 두렁과 신명에서 함께 활동한 동료 이은홍이 구속되는 사건을 겪는다. 1990년대 중반까지 노동 문화 단체에서 노동조합 교육과 문화 활동을 계속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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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훈박경훈은 1962년 제주에서 태어나, 제주 송당 지역에서 유년시절 성장함. 제주 오현고등학교 미술교사로 있던 강광의 권유로, 미술반 활동을 하며, 문행섭, 홍성석 등과 교류. 제주대학교 사범대학 미술교육과로 진학, 학생회 활동이나 학내 조직이 활발하지 않은 상황에서 학생회장을 맡으며 학내 여러 문제들에 대응한 경험이 있음. 대학교 2학년 시절 접한 현기영의 『순이삼촌』을 계기로, 4·3 문제를 구체화하며 미술로 사회적 발언을 하는 일을 고민. 1980년대 초반, 5·18 이후 1여 년간 제주에 머물던 황석영 등의 영향으로 문화운동협의체 ‘수눌음’이 만들어짐. 1980년대 초중반 서울(‘두렁’ 등)과 광주(홍성담 등) 등지의 선후배들과의 만남을 통해, 서울의 민중미술 운동의 분위기를 감지(1985년 ‘힘전 사건’ 등)하며 제주 내 문화예술운동의 기틀을 다짐. 1987년 그림패 ‘보롬코지’ 출범을 위한 준비 기간 중, 1987년 9월 <민족해방과 민족통일 큰 그림 잔치> 순회전(동인미술관; 한국투자신탁 전시실)에서 광주의 이상호, 전정호 작가의 공동작 걸개그림이 경찰에 의해 압수되었고, 행사를 개최한 그림패 ‘보롬코지’ 준비위원회 대표 문행섭이 연행됨. 이 사건으로 인해 ‘보롬코지’ 창립이 잠시 주춤하였으나, 1988년 예술가들과 다시 뜻을 모아, ‘제주’ 지역의 자생적 미술운동을 대표하는 그림패 ‘보롬코지’를 창립. 김수범, 문행섭, 부양식, 양은주와 함께 ‘보롬코지’ 활동을 시작함. 1987년 이후에 들어서야 제주 지역에서 비로소 4·3 에 대한 증언이 나오기 시작하였는데, 1989년 4월 ‘보롬코지’의 주도로 첫 《4·3 미술제》가 기획. 같은 해 8월 《4·3 넋살림전》(그림마당 민)을 기획하여, 서울에도 ‘4·3’에 대해 알리는 역할을 함. 불온한 그림, 빨갱이 그림으로 낙인찍히는 과정 속에서도, 당시만 해도 금기의 언어였던 ‘4·3’을 미학적 테제로 최초 노출한 전시를 보여주었다는 데서 큰 의미가 있음. ‘보롬코지’의 다수 회원이 전국 조직 ‘민미협’ 활동에도 결합하면서, 지역의 민주화운동과 서울의 활동들이 결합, 연대하는 모습을 보여줌. 1993년 ‘보롬코지’의 발전적 해체 이후, ‘탐미협’ 창립을 주도한 박경훈은 4·3 목판화 연작 등을 꾸준히 제작하며, 제주에서의 미술운동을 통해 ‘4·3’과 같은 기억투쟁을 전면화하고, 제주의 현실을 리얼리즘 미학으로 담아내는 작품 활동을 펼쳐오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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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규박홍규(예명 박소래)는 1959년 전남 부안에서 태어났다. 전주 신흥고등학교 재학 시절, 교사로 재직 중이던 정양 시인의 추천으로 함석헌, 윤흥길 등 민족 계열 문학을 접하였다. 미술동인 두렁의 회원인 이은홍과는 고등학교, 대학교 동기이기도 하다. 홍익대학교 조소과를 입학하고, 1981-1983년 시기 군대를 다녀온 후 1985년 졸업하였다. 대학교 1학년 시절, 종로 YMCA 앞에서 동일방직똥물사건에 대한 유인물과 학내에 뿌려진 우리 시대 미술(가)의 역할을 묻는 유인물에 영향을 받아 사회과학 학습을 시작했다. 학내 민화반 활동을 하며 미술동인 두렁의 이봉민, 이춘호 등과 어울렸고, 공식적으로는 1985년 두렁 회원으로 가입하였다. 농촌 하방을 결심한 이후, 1983년 가을 무렵부터 기독교농민회를 직접 찾아가 활동을 시작했다. 이봉민 등 민화반과 함께 『농민가락 차차차』(1984년 10월, 한국기독교농민회총연합회 발행)에 삽화를 제작했다. 졸업 후, 출판사 지양사에서 1여년 정도 일하며 농촌 하방을 준비, 1985년 겨울 충남 부여로 내려가 농민 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농민운동에 투신했다. 1987년 농촌의 6월항쟁을 겪으며 농민회를 조직, 1989년 부여군농민회를 결성했다. 1989년 농민회 창립을 준비하며, 창립 포스터 그림을 맡게 되면서 농촌 하방 시 접었던 그림을 다시 시작하게 되었다, 1989년 그림마당 민에서 이봉민과 함께《전국농민회총연맹 창립 기금마련전》을 기획하여 창립기금 마련을 도왔다. 부여군농민회 초대 사무국장, 전국농민회총연맹(전농) 1기 문화국장(1990)을 맡아 활발히 활동했다. 1989년 2·13여의도농민대회(2·13여의도농민항쟁, 2·13투쟁)으로 인해 수배되었다. 1991년 건강 악화로 고향 전주로 와 치료를 받으며 2여년 회복기를 거친 후, 다시 농촌 현장-완주군 고산-으로 들어갔다. 완주에서 완주군농민회 정책실장, 전국도연맹 농민회 조국통일위원장 등을 맡으며 농민운동을 계속해 왔다. 1999년, 2·13여의도농민대회 등을 그린 작품 등을 선보이며 첫 개인전《들에서 여의도까지》(우진문화공간, 전주)을 치렀다. 이후 농민판화들을 비롯하여 농민들의 삶과 동학농민혁명을 주제로 한 다양한 작품들을 선보였다. 현재는 『한국농정신문』에서 <농민만평> 연재하며 작가로서의 삶을 병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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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원모양원모(예명 라원식)는 1958년 강원도 영월군에서 출생하였다. 1977년 오산학교를 졸업하고, 1978년 홍익대학교 사범대 외국어교육학과에 입학하였다. 홍익민속연구회, 가톨릭민속연구회, 기독청년민속연구회, 홍익대 탈춤반 눈솟말 재인패 활동을 하였다. 1980년 전국대학 탈춤패 연합 교육주무를 역임하였다. 1983년 카투사 전역 후, 놀이패 한두레에 입단하여 마당극 공연(<강쟁이 다리쟁이>)을 했다. 1984년 미술동인 두렁에 가입, 미술동인 `두렁' 창립전에 참여하며, 동인지 『산 미술』을 편집했다.
『미술평론』에 필명 라원식으로 「민속미술에 대한 새로운 조명」 평론을 발표하며 등단하였다. 1985년 『민중미술』(공동체 출간)을 묶어 내는 데 함께했다. 《한국미술, 20대의 힘전》 사건 투쟁에 함께 하며, 1985년 민족미술인협회(민미협)의 창립 준비위원으로 들어가 활동, 정책실장을 역임하였다. 1986년 미술동인 두렁이 논두렁과 밭두렁으로 산개를 결정, 현장 활동을 하는 밭두렁과 함께 부평으로 이전하여 노동문화야학(주안5동성당)을 열었다. 풍물패 한광대를 창단하고, 한광대와 함께 주안역 앞에 문화공간 쑥골마루를 개관, 운영하였다. 노래패 산하, 그림패 갯꽃과 노동문화 상담과 지원 조직 일손나눔을 모아들여 인천민중문화운동협의회와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민예총)의 모태가 된 우리문화사랑회를 꾸렸다. 1987년, 인천 민중문화운동연합 지도위원 역임, 1989년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민예총) 창립준비위원 활동과 그림마당 민 운영위원을 맡았다. 국립현대미술관의 《민중미술 15년전》(1994) 기획을 준비하며 추진위원을 맡아 활동했다.
2003년부터 경기문화재단, 경기도미술관, 경기도어린이박물관, 양평문화재단을 거치며, 지역 공동체 기반 예술 확장에 힘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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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연이기연은 1956년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1976년 홍익대학교 미대를 입학, 조소를 전공하였다. 연극·탈춤·탱화·풍물·옛이야기 등의 무형의 문화를 찾고 익혔다. 홍익대학교에서 연극반 활동을 하며 학내에서는 미술동인 두렁 활동을 함께 한 장진영을, 학외에서는 1979년 극단 연우무대 공연 <장산곶매>에 출연하며 문화운동가이자 민주화운동청년연합 활동을 함께 한 연성수를 만났다. 홍익대학교에서 음성적으로 존재해오던 탈반(탈춤반)의 공식적 활동을 위해 지도교수를 섭외하여 공식 동아리로 만드는 역할을 했다. 탈반 활동을 하며 김봉준을 만나고, 김주형 등과 두렁을 결성을 하였다. 학내 스터디 모임 멤버들 –이은홍, 성효숙, 이정임 등-과 빈민선교를 하던 허병섭 목사와의 공동 프로젝트에 참여하여 노동자 교육용 그림을 제작하였다.
1980년 5월, 5·18민주화운동을 겪으며 민주화운동, 노동운동, 노동자문화운동의 길에 투신하게 되었다. 임정희, 윤명순, 배형경 등과 서초동 맨션아파트 아지트에서 5·18 유인물을 제작, 배포하였다. 3개월 도망 후 체포되어 서대문구 대공과에서 심문을 당했다. 1983년 《미술동인 ‘두렁’ 창립예행전》(애오개 소극장)과 1984년 《미술동인 ‘두렁’ 창립전》(경인미술관)에 참여하였다. 1984년 3월 민족생활문화연구소를 만들고, 1984년 7월 부설로 질경이 우리 옷을 설립하였다. ‘생활한복’이라는 신조어를 만들고 우리 옷 입기 운동을 펼쳤다. 1985년 두렁에서 김주형, 이은홍과 함께 신명으로 분화, 노동운동 현장 활동에 집중하였다.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의 창립판화 <두꺼비>를 만들고,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민가협)의 수첩을 제작하였다.
개인 작업으로 1980년대 초 안양근로자회관에서 노동자 문화교육을 하던 시절 제작한 <지게꾼> 판화와, <더 이상 뒤로 물러설 곳이 없어요>(국립현대미술관 소장)를 포함하여, 장산곶매, 이심이, 골굿떼 이야기를 소재로 한 민족상징물 작업들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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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홍이은홍은 1960년 전주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조선일보 지방 주재 기자를 하던 아버지가 해직 당한 후, 신문 보급소(조선일보 지국장) 운영하며 신문사 집 아들로 불렸다. 전주 신흥고등학교 시절, 교사로 재직 중이던 정양 시인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미술동인 두렁 회원인 박홍규와는 고등학교 동기이자 대학 동기이기도 하다. 아버지의 권유로 미대 입시를 준비, 1978년 홍익대학교 미술교육과로 입학 후, 폐과되어 1985년 동양화과로 졸업하였다. 한신대학교 재학 중이던 고향친구와 어울리며, 하월곡동 동월교회(돌산교회)에서 빈민 선교를 하던 허병섭 목사와 만남, 동월교회에서 어린이들에게 그림을 가르쳐주며 대학 시절을 보냈다. 동월교회(돌산교회)에서 만난 동일방직 해고 여성 노동자들을 통해 노동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1981년, 대학 4학년 시절, 허병섭 목사의 제안으로, 이기연, 성효숙, 이정임, 조소영과 함께 노동자 (의식화) 교육 프로젝트에 협력하여 수백 장을 노동 관련 그림을 그렸으나 분실하였다. 1980년, 대학 3학년 시절, 보문동에 화실을 차리고 성균관대 운동권이었던 친형과 함께 살았다. 5·18민주화운동(당시 광주학살, 광주사태) 이후, 보문동 화실은 성균관대 운동권 학생들의 일종의 아지트처럼 사용되고, 화실에서 5·18 관련 유인물을 제작하였다.
1980년, 학교 외부 연합모임에서 이기연 선배 등을 만나, 이후 학내 탈춤반 중심의 사회과학 학습 모임에 합류하였다. 학내 유인물 제작 및 살포 계획 모의 중, 김주형이 유인물 사건으로 구속, 이에 영향 받아 유인물 살포 계획이 불발되고, 1981년 학교를 졸업, 1982년 8월에 군에 입대하였다. 군 입대 중, 두렁이 결성되고, 《미술동인 ‘두렁’ 창립예행전》(애오개 소극장, 1983)과 《미술동인 ‘두렁’ 창립전》(경인미술관, 1984) 소식은 군대에서 『산 미술』 동인지를 통해 접하였다. 1984년 가을, 제대 후 자연스럽게 미술동인 두렁에 합류(공식 가입은 1985년으로 기록), 《한국미술, 20대의 힘전》(아랍미술관, 1985) 사건 –경찰에 의한 작품 탈취- 에 항의하는 투쟁에 두렁 회원들과 참여하였다. 노동자로서의 삶에 대한 결심, 노동자로서의 ‘존재-이전’을 실행하기 위해, 인천 부평 4공단, 대한금속에 취업하여 노동자로 살아가다 부상당해 쉬던 중, 신명에서 함께 활동하던 이기연, 김주형의 권유로, 서울노동운동연합(서노련)의 기관지 네 컷 만화 <깡순이> 작업을 이어서 맡게 되면서, 김문수를 만나게 되었다. 일명 서노련사건에 연루되어 체포, 노동자 교육용 학습만화 <사장과 진실>과 서울노동운동연합(서노련) 기관지에 연재한 <깡순이>가 이적 표현물로 분류되며, 이적 표현물 제작 혐의로 구속,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안양교도소에서 6개월 실형을 살았다. (1심에서 구형 5년, 선고 3년 받은 후, 1986년 10월 건대 애학투사건(전국반외세반독재애국학생투쟁연합)의 영향으로 2심에서 집행유예로 석방되었다.) 이기연, 김주형 등과 공동 제작하였으나 이은홍이 혼자 한 것으로 재판을 받고 수감 생활을 하게 되면서, ‘깡순이 작가 이은홍’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불법 납치 구금에 항의하며 구치소에서 「‘노동미술’의 올바른 자리매김을 위하여」 글을 작성하여 이기연의 도움을 받아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민가협)를 통해 외부로 알렸다. 서울노동운동연합(서노련) 변호를 맡았던 조영래, 이상수 변호사를 통해 고문규탄대회 공개 발언자로 나서길 권유받았으나, 노동자로서의 삶을 위해 포기, 이후 1987-1988년 시기, 이기연, 연성수, 김주형 등과 한국문화운동연구소(한문연)에 속해 파업 현장 지원 및 노동조합, 노동자 소모임 지원 활동을 이어갔다.
1989년 결혼 이후, 한국문화운동연구소(한문연) 활동 정리 후 인천으로 이동, 인천여성노동자운동 관련 노동단체 및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노협), 한국여성노동자회, 산재노동자협회,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 진정추진위원회(진보정당추진위원회), 백선본(민중후보백기완선거운동본부) 등 각종 노동운동 단체 선전물 작업 제작 및 만화, 만평을 그렸다. 1995년 이후, 사계절 출판사의 『역사신문』 작업을 맡으며, 개인 작업으로의 방향 전환을 모색, 현재는 ‘노동해방’-일, 일꾼, 일터를 주제로 한 만화 작업을 구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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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진영장진영(예명 장영수)은 1956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부모님 두 분이 모두 한국전쟁 때 월남한 실향민으로, 중앙정보부 지휘관급 요원으로 있던 아버지 직장 근처 우이동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중3 무렵 아버지가 빚을 지고 도망, 은행에 집이 저당 잡히며 어머니와 형과 함께 야반도주, 청량리역 근처에 단칸방을 얻어 살면서 어머니가 노점상을 하며 생계를 유지했다. 불우한 환경 속에서 형은 서울대학교 사회 계열로 진학했으나, 청소년기를 우울하게 보내며 고등학교 입시까지 실패, 방황하던 시절 가출하여, 당시 그렸던 만화그림들을 모아 ‘소년한국일보’사에 찾아갔으나 집으로 돌려보내짐. 재수해서 중경고등학교로 진학, 미술반 활동을 하며 선배 화실에서 독락으로 미대 입시를 준비, 홍익대학교 서양화과에 76학번으로 입학했다.
대학 시절, 추상미술 계열의 작품 활동이 지배적인 학풍 속에서 ‘예술이란 무엇인가’라는 의문에 부딪혔다. 친형의 추천으로 『창작과 비평』을 접하고, 백낙청의 평론 「문학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 등을 읽으며 감흥을 받았다. 대학 1학년 시절, 선배의 권유로 연극반에 가입, 훗날 두렁 활동을 함께 한 이기연을 만났다. 홍익대학교 연극반 활동 시절, 회장을 맡으며 번역극 금지와 구타 금지를 선언했다가 전통을 와해시킨다는 명목으로 선배들의 구타 속에 제명을 당했다. 대학 3-4학년 시절, 관계하고 있던 교사 연극모임이 남민전사건(간첩단사건)에 연루되며 전원 체포, 회원명부에 이름이 올라가지 않아 수배 대상에서 제외되었으나 연이은 폭력과 억압으로 정신착란 증세를 경험하였다.
1977년 서울대중앙도서관점거 유신반대시위사건(11·11중앙도서관점거농성)에 참여했던 친형이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되었다. 구속자 가족 총무를 맡아 인권 변호사 섭외, NCC(한국기독교 교회협의회 인권위원회)와 관계하며 한국 사회 현실에 눈을 뜨게 되었다. 법정에서 친형의 최후 진술-자립 경제, 민주 정치, 노동자 계급의 권리 보장-을 통해 학습, 대학 4학년 시절, 친형을 통해 대한전선노동조합의 신금호 선배(노동운동가, 당시 대한전선노조 전문위원)를 만나 대한전선노조의 선전물 작업(노동자 교육을 위한 만화 슬라이드 작업)을 하며 예술의 역할과 의미를 찾았다.
대학교 3학년 시절, 서울대 운동권의 소개로 김봉준 선배와 첫 만남, 1982년 군 제대 후 재회하며 홍익대 내 스터디 모임에 합류하였다. 1983년, 공개된 반합법 문화적 정치투쟁 공간으로서의 애오개 소극장(애오개 문화공간)이 출범, 서울대 탈반 활동가들과 김봉준 등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애오개에서 지내며 《미술동인 ‘두렁’ 창립예행전》을 준비하였다. 당시 수배 중이던 김봉준, 결혼과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 창립 준비 과정에 있던 이기연, 한국노동자복지협의회(한노협) 활동과 노동 현장 활동에 치중해 있었던 김주형 등 초기 두렁 회원들의 여건 상, 공개 활동으로 장진영이 총대를 메고 두렁의 대표를 맡아 《미술동인 ‘두렁’ 창립예행전》과 이후 《미술동인 ‘두렁’ 창립전》을 치러 냈다. 창립전 이후 애오개에서 독립하여 장진영이 살던 방을 정리하여 서대문 로터리에 두렁 작업실을 구축하여 활동을 했다. 이 시절, 작업실 밖에는 늘 형사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1985년, 정치적 문화투쟁을 선언한 단체 민중문화운동협의회(민문협)이 창립, 집행부 간사를 맡게 되면서 두렁의 회장직을 김우선에게 넘겼다. 민중문화운동협의회(민문협) 활동 시절, 각종 노동단체 회보 및 집회 선전물(선전그림) 등 노동운동 관련 인쇄물, 걸개그림, 깃발, 슬라이드 등을 제작 총괄하였다. 1985년, 《한국미술, 20대의 힘전》 사건 –경찰에 의한 불법 그림 탈취(압수)- 에 미술동인 두렁이 관계, 미술 탄압에 항의하는 미술계의 목소리가 모아져 민족미술협의회(민미협)가 창립되었다. 1986년, 민중문화운동협의회(민문협)이 노선투쟁 –중간계층의 선전 역량 강화 vs. 노동계급의 선전 역량 강화-을 겪으며 와해, 노동계급 강화 이론에 방점을 찍었던 장진영 역시 1986년 조직을 정리하였다.
민중문화운동협의회(민문협) 활동을 정리한 이후, 1987년 후배들과 『만화신문』을 제작, 노동운동가 유동우가 대표로 있던 기독노동자총연맹에서 방패막이 역할을 해주었으나 1여년 발행 후 해체하였다. 이 외 작화공방에서는 『임투를 위한 선전·문화활동 실무사전』, 『이석규 열사전』 등을 출간하였다. 1987년 6월항쟁 이후 언론 표현의 자유가 확대되며 문화 지형의 변화를 감지, 저항만화보다 합법적 대중만화의 인기가 높아졌음을 실감하며, 1994년 작화공방의 발전적 해체를 단행하였다.
1994년 이후, 귀농하여 농사 짓는 틈틈이『주간노동자신문』, 『문화일보』, 『한국농어민신문』 등에 만화와 만평을 연재, 연재했던 만화들을 『삽 한 자루 달랑 들고』, 『무논에 개구리 울고』 등의 단행본으로 출간하였다. 최근에는 민중만화에 대한 재평가 작업을 위해, 1980년대 작업했던 재야단체 기관지에 실린 민중만화들을 묶어 출간하였다. 그 중 1980년대 학생운동 과정에 있던 이름 없는 민주투사들에게 바치는 헌정만화 <나선>과 여성 노동자가 선진 노동자로 나아가는 과정을 그린 <누가 나를 이 길로 가라 하지 않았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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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선희정선희는 1959년 부산 출생. 유년 시절을 부산에서 보낸 후, 부산 이사벨여자고등학교와 대구 효성여자대학교 독문학과를 졸업. 평범한 학창 시절을 보냈으나, 대학 시절 학내 문제에 발언하는 대자보(성명서)를 붙이며 처음으로 사회적 발언을 함. 미대에 진학하고 싶었으나, 보수적인 집안 분위기상 진학이 어려웠음. 4학년 여름방학,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던 동생의 권유로 서울에서 디자인 아카데미를 수강, 교생실습을 포기하고, 학교 졸업 후 충무로에 있는 기획사에서 직장 일을 시작. 집안의 결혼 강요로 고향 부산에 잠시 내려가 있다가, 20대 후반이 되던 1985년 말 다시 상경함. 당시 서울대학교 재학 중 명동성당을 중심으로 학생운동을 하던 동생의 생활을 지켜보다, 성수동 봉제공장에 취업. 6개월 후 봉제공장을 그만두고, 동생의 소개로 ‘민미협’을 찾아갔다가, ‘우리마당’ 활동을 시작하 됨. ‘우리마당’의 판화교실 선생으로 있던 차일환을 비롯하여, 남규선, 이성강, 오진희, 김원주, 신경숙, 마문호 등을 만나면서, 1980년대 후반 진보적·전위적 민중미술의 가장 실천적 소집단의 면모를 보여준 서울미술운동집단 ‘가는패’(1987년 1월)를 결성. 결성 후 바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발생해, ‘가는패’의 첫 사업으로 박종철 장례 걸개그림을 제작. 이후, 1987년 상계동 철거민 지원을 위한 《‘가는패’ 열림전》을 시작으로, 안성, 광혜원, 장호원, 진천 등을 돌며 《농촌 장터 순회전》을 개최. 한독금속노조 연대 공장벽화 제작, 노동절벽보선전전 기획, 노동자 화실 햇살그림터 개소. 1988년, 연세대학교에서 열린 전태일열사 정신계승 전국노동자대회를 위한 걸개그림 <노동자>를 제작·설치. ‘전노협’의 제안으로 제작된 그림으로 정선희가 제작 과정에 주도적으로 참여. 1988년 8월, 민미련 전국연합 건설준비위원회에 참여. 이 무렵 차일환 등이 구속되며, 정선희가 이어 ‘가는패’(1990년 이후 ‘서울민미련’으로 변경)의 대표를 맡아 이끌며, 창작단 활동과 교육선전대 활동을 적극적으로 실천. 범민족대회에 설치한 걸개그림 <통일을 염원하는 여성노동자>(1990) 등의 제작에 참여. 1991년 3월 18일, 국가보안법 위반(이적단체구성) 혐의로 구속되어 수감 생활 후 출소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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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정엽정정엽은 1962년 전남 강진에서 태어남. 1982년 이화여자대학교 서양화과 입학 후, 현장 지향 민중미술 소집단 ‘두렁’의 동인으로 활동하다가, 1980년대 중반 ‘두렁’의 산개와 함께 ‘밭두렁’의 일원으로 1986년 부평공단에 노동자로 취업함. 노동자와 예술가로서의 정체성 사이에서 고민하고 갈등하는 과정을 구술함. 부평공단 시절 함께 했던 노동자 동료들의 편지(일부)를 공개함. 이후 현장 생활을 정리하고 노동운동을 지원하는 문화 소모임 ‘일손나눔’으로 활동의 근거지를 이동함. ‘일손나눔’을 거쳐, 인천 미술패 ‘갯꽃’ 활동(1986~1992)을 하며 다수의 현장 작업 –걸개그림(<송철순열사도> 등), 깃발그림, 벽화(한독금속벽화), 판화, 삽화 등-을 제작함. 여성예술가로서의 현실참여를 모색하는 입장에서 정정엽은 ‘터’ 동인, 민족미술협의회 산하 여성미술분과 모임(1989년 ‘여성미술연구회’로 명칭 변경) 등의 활동도 병행하며, 김인순, 김종례 등과 더불어 1980년대 여성미술운동을 이끄는 주축으로 활동함. 일정 기간 ‘여미연’을 대표로서 이끌었으며, 그림패 ‘둥지’ 등의 활동에도 관여한 바 있음. 여성과 노동을 주제로 한 다수의 걸개그림을 제작, 대중 집회 현장에 사용함으로써 여성노동운동과 민중미술운동을 결합한 활동을 펼친 사례를 다수 구술. 대표적으로, 1987년 김인순, 김종례, 정정엽, 그림패 ‘둥지’ 등에 의해 제작되어, 명동성당 앞 6‧10 민주항쟁 현장에서 활용된 걸개그림 <해방의 햇새벽이 떠오를 때까지 하나되어 나아가세>를 들 수 있음. 이 걸개그림의 제작 과정에 현장의 시민들이 개입한 내용을 면담을 통해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었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