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홈
- 컬렉션
- 구술컬렉션
- 구술 주제별
- 가족운동
-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
구술컬렉션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
-
김성한김성한은 1941년 경북 봉화군에서 출생했다. 7남매 중 막내로 태어나 큰 오빠와 17년 차이다. 큰 오빠를 잘 따랐고, 봉화가 워낙 산골이라 초등학교를 진학하기 위해 큰 오빠가 광업소에서 일하고 있는 태백으로 갔으나 홍역에 걸려 고생하고 6.25 사변이 나서 입학만 해 놓고 정작 학교는 다니지 못하고 다시 봉화로 내려갔다. 18세에 아버지가 작고하시고, 1962년 결혼했다. 5남매를 낳고 봉화에서 키우다가 1982년 자녀 교육을 위해 경북 영주로 이사를 했다. 자녀들이 대학을 가고 하면서 1990년 서울로 상경했다.둘째 아들 심상득은 1989년 3월에 고려대학교에 입학해서 학생운동을 했고, 1992년 이선실 간첩단 사건에 연루되어 구속되었다. 구속된 아들의 행방을 몰라 애타던 중 큰 아들이 수소문하여 구술자와 함께 중부경찰서와 남산 안기부 인근에 갔다가 민가협 어머니들을 접했다. 그 날 이후 민가협 회원으로 가입하고, 다음날부터 안기부 인근에서 민가협 어머니들과 구속자 가족들과 함께 항의시위에 참여하고, 아들 심상득을 면회할 수 있었다. 민가협 가입 직후 활동을 하면서 민가협 어머니 중 임기란 어머니를 잘 기억하고 있다. 아들 심상득은 영등포구치소에 수감 중 재판을 받았고, 목포 교도소로 이감되어 목포까지 면회를 다녔다.민가협 어머니들과 함께 구속자가 발생하면 항의하러 가는 등 민가협 활동을 본격적으로 하던 중 1993년 종로서인지, 시경인지 경찰에게 항의하던 중 꼬리뼈에 금이 가는 부상을 당해 오랜 기간 고생하였다. 1993년 민가협 부회장으로 활동할 당시 회장은 안옥희 어머니였다. 민가협 어머니들과 투쟁을 하던 중 난지도에 버려져 안옥희 어머니와 걸어 돌아오던 기억이 생생하다. 구술자는 1995년에도 민가협 부회장으로 활동하였다. 1993년 9월부터 시작한 목요집회에 빠짐없이 참석하였다. 1996년 구속된 아들 심상득이 출소하였지만 구술자는 민가협 활동을 지속하였다. -
김정숙김정숙은 1939년 전남 보성군에서 7남매 중 둘째로 출생하여 21살 결혼 전까지 생활했다. 보성에도 초등학교를 졸업했다. 1959년 결혼해서 장흥에서 생활하다가 큰 아들이 4살 때 전남 안양으로 분가했다. 1979년에 가족이 서울 동대문구 묵동으로 상경했다. 1989년 셋째 아들 임종석이 전대협 의장으로 선출되어 1989년 1월 13일 수배를 당하고 형제들 직장을 비롯해 집 앞에까지 경찰과 안기부 직원 등이 진을 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1989년 1월 무렵부터 민가협 활동을 시작했다.
아들이 수배 중이어서 연세대 등 아들이 다녀가기로 한 대학교에 음식과 옷가지 등을 싸서 손녀를 업고 갔다가 경찰이 최루탄을 쏘며 시위를 진압하는 상황에 직면해 고생하기도 했다. 아들 임종석은 1989년 12월 18일에 검거되었다. 구술자는 민가협 어머니들과 함께 전주교도소를 비롯하여 대전교도소 등 구속자를 위한 항의시위에 참여하는 등 민가협 활동에 열심히 참여했다. 대전교소도에서는 밤을 새우고 다음날 교도소장을 면담하는데 밤새 피워 둔 곤로 그을음에 얼굴이 시커멓게 된 채 참여한 일화를 기억하기도 했다. 구술자는 1992년과 1998년 민가협 상임의장으로 활동했다.
1992년 이선실 간첩단 사건과 관련하여 공안당국이 대선 정국에 활용하기 위해 사건을 확대하였고 민가협도 연루되었다. 민가협에 대한 압수수색도 진행되었고, 이 시기동안 수배 상태로 추석 무렵부터 다음해 대선 투표가 시작되는 날까지 대학가를 전전하기도 했다. 구술자는 남규선 총무가 민가협 사무국을 총괄하던 시기 대부분의 활동을 같이 했다. 장기수 석방 투쟁에 참여했고, 북한을 방문해 당시 장기수 선생님들과 재회하기도 했다.
-
남규선남규선은 1963년 생으로 1980년대 홍익대학교 서양학과를 졸업했다. 1989년 지인의 구속으로 민가협 회원이 되었고, 당시 고문 등을 염려해 사회적 공론화를 시도하던 중 직접 본인이 그 역할을 하기 위해서 1990년 2월 민가협 상근간사로 활동을 시작한다. 그 후 1992년부터 2001년까지 민가협 최장기 총무로 활동하였다. 1989년 시작된 양심수를 위한 시와 노래의 밤을 비롯해 1992년부터 시작된 양심수 석방캠페인, 1993년 9월 23일 시작된 목요집회를 기획하고 주도했다. 이번 1980년대 가족운동 구술대상자 중 유일하게 2회에 걸쳐 구술을 진행했다.
1차 구술에서는 민가협에 소속된 협의체를 비롯해 민가협의 조직적 성격과 주요 활동 내용에 대해서 구술했다. 구술자가 활동할 당시 민가협은 구속학생학부모협의회, 양심수 후원회, 장기수가족협의회, 청년민주인사가족협의회, 구속노동자가족협의회, 유가족협의회 등 6개의 협의체가 소속되어 있었다. 대부분 협의회마다 간사가 있었지만 점차 민가협 활동이 지속되는 동안 협의회에 간사가 없는 경우가 생겼다. 1992년 이선실 간첩단 사건 당시 민가협이 공안당국에 의해 침탈을 당했고, 이 시기민가협 총무로 활동했다. 1989년 시작된 양심수를 위한 시와 노래의 밤은 회원으로 참여했지만 1990년부터는 기획을 도맡아 진행했다. 1996년 연세대 사건 이후 대학가의 공간을 대여할 수 없는 공안정국이 조성된 상황에도 불구하고 한양대에서 양심수를 위한 시와 노래의 밤을 성사시킨 일화, 매해 섭외 과정 및 행사 과정에서의 일화를 구술해 주었다.
2차 구술에서는 1차 구술에 등장한 민가협 관련 다양한 활동가들의 이름 및 활동 등을 다시 확인하고, 1992년부터 시작된 양심수 석방 캠페인 활동과 1993년 9월부터 시작된 목요집회의 기획 배경, 집회 당시의 일화 등을 구술했다. 1990년 민가협 상근간사로 활동을 시작한 이래 상임의장으로 활동한 어머니들, 주요한 민가협의 투쟁들, 특히 장기수 석방운동과 관련한 일화 등을 구술해주어 민가협사 전반을 연결할 수 있는 내용을 제공해 주었다.
-
유시춘유시춘은 1951년 경북 경주시에서 출생하고, 대구로 통학하면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68년 고려대학교 국문학과에 입학했다. 역사교사셨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책을 많이 볼 수 있었다. 1973년 대학 졸업하던 해에 <건조지대>로 신춘문예 작가도 등단했다. 1972년부터 장훈고 교사로 근무하다가 동생 유시민이 소위 서울대 프락치 사건으로 구속되자 서울대학교에 대자보를 쓰는 등 구속에 항의하는 활동을 하다가 1985년 주도적으로 구속학생학부모협의회를 결성하고, 이를 이유로 장훈고에서 파면되었다. 1985년 구속학생학부모협의회 총무로 활동하면서 민가협 결성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1985년 미문화원 점거농성 재판 과정에서 재판정 농성을 주도해서 안기부장, 법무부장관, 서울대 총장 등이 경질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돈명 변호사의 도움으로 유시민 항소이유서를 보게 되고 이를 복사하여 전국적으로 이 항소이유서가 유명해지는 계기를 만들었다. 1985년 12월 12일 민가협 결성과정에서 초대 총무 인재근과 민청련 젊은 여성 활동가들과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민가협 결성 후 민가협 소식지 <민주가족>을 발행하는 일을 도맡아 했다. 박용길 장로님께 민주가족 제호를 받아오기도 했다.
구속자 어머니들 설득해 내 자식의 안위만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 민주화 투쟁을 해야 하는 이유를 납득시키는 역할을 잘했다. 구속학생학부모협의회 활동 당시에는 김민석 어머니, 함운경 아버지, 장영승 어머니, 전진숙 어머니 등과의 일화를 구체적으로 구술했다. 구술자는 1985년 7월 구속학생학부협회의 결성 과정부터 1985년 12월 12일 민가협 결성에 이르는 과정에 대해 자세히 기억하고 있었다. 민가협 결성 당시 각 협의회 대표로 활동하던 분들도 구술과정에서 일일이 밝히고 있다. 아울러 인재근 총무, 조무하 총무를 거쳐 박광숙 총무가 민가협 총무로 활동할 수 있도록 구술자가 역할을 한 내용도 포함되어 있다. 구술자는 1987년 6월 항쟁 과정에서 구속된 이후에는 민가협에 직접적인 역할을 맡아 활동하지는 않았지만 민가협에 관심을 기울이며 다른 사회운동 분야에서 지속적으로 활동했다.
-
이소남이소남은 1934년 전남 해남군에서 8남매 중 다섯째로 출생했다. 아버지는 농사를 짓고 오빠와 동생은 공무원이었다. 구술자는 12살 때 해방을 맞았다. 구술자는 어려서 들은 해방가를 지금도 3절까지 정확히 기억하고 있다. 구술과정에서 광복군들이 고국을 생각하면서 부르던 광야의 달밤도 2절까지 불렀다. 구술자는 1956년 대학을 졸업하고 육군 장교로 임관할 남편을 만나 1956년 2월 5일 결혼했다. 남편이 1956년 8월 23일 임관하여 최전방에서 군복무를 하던 중 어린 3형제를 남겨둔 채 급성 심장마비로 순직했다. 결혼 5년 6개월 만이었다.
구술자는 아들 3형제를 혼자 키우면서 어려운 고비들을 기억하며 이를 시로 적어 남겨두었다. 구술과정에서 직접 지어 발표한 시를 가지고 오셔서 읽을 수 있었다. 성균관대 사학과에 입학하여 학생운동을 하던 셋째 아들 박승렬이 1985년 여름 구속되었다. 구술자는 민가협 창립을 주도한 인재근과 유시춘을 기억하고 있었다. 구술자는 보기 드문 1985년 12월 12일 창립 회원으로 민가협 활동에 참여했다.
구술자는 이난영의 해조곡에 수배 중인 아들에 대한 걱정을 담아 1절을 개사하고, 2절에는 수감 가사를 붙여서 민가협 집회에서 자주 불렀다. 닭장차에 실렸을 때에는 투사의 노래를 불렀다. 구술자는 김선명 선생 환영회가 열린 충북 옥천의 모 초등학교에서 모닥불을 피워놓고 강강술래를 할 때 선소리를 맡아 하기도 했다. 구술자는 장애를 가진 손녀를 돌보아야 해서 1992년부터 민가협 활동에 열심히 참여하지 못하고 중요한 행사나 집회에만 참여했다.
-
이영이영은 1941년 전남 담양군에서 3남 3녀 중 막내로 출생했다. 고향 인근에서 한재중학교를 졸업하고 이후 고졸 검정고시를 통과했다. 아버님이 한학을 하셨던 분이라 어깨 너머로 한자를 익혀 한자가 섞인 신문을 읽을 정도였다. 어머니는 중학교 때 돌아가셨고, 구술자는 23살 때 결혼했다. 결혼 후 과수원을 운영하기도 했다.
아들 백인승이 1983년 동국대학교 농학과에 입학했고, 학생운동에 참여했다. 1988년 미문화원 점거농성 사건과 관련하여 수배되고, 민정당사에 들어가 사제폭탄을 터뜨려 구속된다. 구술자는 1988년 아들이 구속되자 아들을 면회하기 위해 수소문 하던 중 경동산업주식회사 간판이 있던 안기부 장안동 대공분실을 찾아갔다가 김종태 열사 어머니과 송광영 열사 어머니를 만나 아들을 면회하기 위해 항의하면서 민가협 회원이 되었다. 다음날 동대문경찰서에 아들 면회를 하기 위해 갔더니 미리 민가협 어머니들이 와 있었던 모습을 지금도 고맙게 기억하고 있다.
구술자는 구속된 아들에게 책을 넣어주기 전에 미리 읽고 보내주었다. 태백산맥을 읽으면서는 어려서 빨치산을 만났던 기억이 났다고 당시 화순에서의 어린 시절을 구술했다. 구술자는 1990년경부터 2000년까지 민가협 회원으로만 있고 직접적인 활동을 하지 않았지만 민가협 어머니들에 대한 마음의 빚을 항상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2000년부터 다시 민가협 활동에 열심히 참여한 특이한 경우다. 2002년부터 2006년까지 민가협 부회장으로 활동했고, 2006년부터 2009년까지 민가협 상임의장으로 활동했다.
-
인재근인재근은 1953년 인천시 강화군에서 1남 3녀 중 장녀로 출생했다. 1973년 이화여대 사회학과에 입학했고, 1977년 졸업 후 인천시 부평 소재 공장에 위장취업 했다. 1978년 인천도시산업선교회 노동상담 간사를 하면서 고 김근태 의원을 만나 결혼했다. 구술자가 직접적으로 구속자 가족운동을 시작한 계기는 1985년 9월 4일 당시 민청련 의장 김근태의 연행에서 비롯되었다. 1985년 9월 26일 김근태 의장 구치소 송치과정에서 만나 고문 받은 모습을 확인하고 바로 기독교회관의 목요기도회에 참여하여 고문 사실을 공개한다. 민청련 중앙위원회에 이 소식을 전하고 민청련 구속자들의 부인과 활동가들이 결합하여 공론화를 시작하고, 기독교회관 농성에 많은 사람들이 결합하기 시작하였다.
기독교회관 농성에 일본 기자, 호주 기자, 영국 BBC 등 외신과 김영삼, 김대중 등 유력 정치인들이 찾아왔다. 그동안 외롭게 투쟁했던 장기수 가족들도 다수가 찾아와 위로하고 상주하다시피 함께 농성을 했다. 조작된 간첩단 사건 관련자부터 납북 어부사건 관련 가족들, 학생 어머니들, 노동자 어머니들이 오고 유가족들이 결합하면서 민가협 결성의 토대가 마련되었다. 장기수 구속자 가족들이 구술자가 주도한다면 민가협에 동참하겠다고 하는 등 구속자 가족들의 공감대가 형성되어 1985년 12월 12일 민가협을 창립하였다. 당시 민가협에 결합한 협의회는 곧 5개로 확대되었고 구속 학생, 학부모 협의회, 구속 노동자, 농민 가족협의회, 민주화운동 유가족협의회, 장기수 가족협의회, 청년, 민주인사 가족협의회가 결합하였다.
-
정순녀정순녀는 1937년 충남 공주시에서 3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한학을 공부하신 분이었다. 가정 형편이 여의치 않아 어려서부터 돈을 벌어야 해서 가정부에서부터 서울 식당일까지 했다. 1961년 결혼했다. 큰 딸 양용주가 1982년 서울대학교에 지질학과 입학하고 학생운동에 참여했다. 2학년 때부터는 노동현장에 위장취업 했다. 구술자는 딸을 말리기 위해 서울대학교에도 자주 찾아가고 했고, 용하다는 점쟁이를 찾거나 무당을 찾아 굿을 하기도 했다.
1987년부터 민가협 활동을 시작했다. 구술자는 본인이 임기란 어머니 꼬붕이라고 할 정도로 임기란 어머니에 대한 신뢰가 깊다. 구술자는 딸이 교도소에 구금되자 1988년부터 민가협 활동을 시작했다. 1988년 임기란 어머니와 구로구청 부정선거 항의 투쟁 현장에서 고생하는 사람들을 위해 밥과 콩나물국을 준비해 갔다가 진압이 벌어져 모두 땅에 쏟았던 기억을 생생하게 하고 있다. 1991년 수서비리 항의투쟁에 참여했다가 최루탄에 맞아 눈이 거의 실명상태에 이르렀다.
기억력이 좋지 않아 자세한 일자와 사건 지명 등을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당시 상황에 대한 설명을 들으시면 각인된 인상에 대해 말씀을 전하셨다. 특히 장기수 석방운동을 하러 공주 교도소 항의방문을 했던 내용을 기억하고 있다. 딸과 같이 활동했던 박충렬이 단식을 한다는 말을 듣고 전주교도소에 혼자 찾아가 교도소 과장을 만나 책상 유리를 깨뜨리고 항의해서 문제를 해결하기도 했다.
-
조무하조무하는 1950년 경기도 파주시에서 7남매 중 3녀로 태어났다. 1972년 이화여자대학교 국문과를 졸업하고 원주 등지에서 교사로 생활했다. 1977년 결혼 후 남편 장기표 선생이 구속되었다. 1979년 12월에 출소했지만 1980년 5월경에는 다시 예비검속을 피해 아는 집이나 친척집 등지로 도피생활을 해야 했다. 가산중학교에서 교사로 근무 하던 중에 1986년 5.3인천사태가 있었고 남편이 구속되었다. 이때부터 목요기도회에 나와 남편의 구속을 알리는 활동을 시작하였다. 이때는 교사로 근무 중이어서 민가협활동을 시작하지 않은 상태였다.
1987년 남편이 6년형을 받고 구술자는 1988년 1월부터 석방운동도 본격적으로 할 겸 민가협 활동을 시작했다. 인재근 총무의 다음 총무로 역할을 했다. 1988년 남민전을 비롯해 많은 장기수들이 출소를 한 것이 보람된 일로 기억에 남아 있다. 구술자는 민가협 총무로 일한 경험을 돌아보면 다섯 개의 협의체적 성격을 갖는 구속자 협의회가 모여 만든 협의체적 조직이 민가협이라고 하는 것에 대한 평가는 다소 형식적이라고 평했다. 실제 활동하는 동안 5개 협의체가 제대로 구조적 관계를 유지한 것은 아니었다.
구술자는 구속학생학부협의회 활동이 가장 활발했다고 기억한다. 구술자는 특히 장기수 문제에 관심이 많았다. 김해식 선생을 직접 면회하기도 했다. 김해식 선생을 면회하면서 오래 못나가게 되니 다른 데로 시집가라고 해서 정말 시집을 가게 된 사연을 들으면서 울었던 기억을 생생하게 하고 있었다. 구술자는 총무 활동을 마무리하면서 양심수후원회 결성에 주력했다. 당시 양심수후원회를 결성을 주도하고, 결성 초기 후원회 부회장으로 활동했다.
-
조순덕조순덕은 1961년 전남 순천에서 5남 2년 중 둘째로 출생했다. 아버지는 면사무소 일을 하시고 행정 대소서 일을 하셨다. 구술자는 1972년 결혼하여 형제를 두었다. 구술자는 1996년 아들 위영석이 경원대 총학생회장에 당선되고 경원대 학원민주화 투쟁이 심각하게 전개되자 자주 경원대학교에 나갔다. 장현구 열사 분신을 비롯해 진철원 분신 등 당시 경원대에서는 학원민주화 투쟁과 관련한 분신 및 장례투쟁이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민가협, 유가협 어머니들을 자주 만났다.
1996년 연세대 투쟁 이후 민가협 회원을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민가협 활동을 시작한 것은 아들 위영석이 매주 목요일마다 탑골공원에 가면 민가협에서 집회를 하는데 거기서 남규선 총무를 찾으라는 쪽지를 보내면서였다. 구술자는 1997년 아들 위영석이 무혐의로 수배가 해제되었는데도 민가협 활동을 계속하였는데, 다른 어머니들도 다들 자식 문제가 해결되었어도 활동을 지속하는 것을 보고 계속하게 되었다고 한다. 2000년부터 2002년까지 구속자학생학부모협의회 총무 겸 민가협 부회장으로 활동하였다. 구술자는 민가협 초기 활동했던 어머니들을 전대협 엄마, 민가협 후반기 활동했던 어머니들을 한총련 엄마로 구분하기도 했다.
2002년부터 2005년까지 민가협 상임의장으로 활동하고, 2010년부터 현재까지 민가협 상임의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구술자는 2000년 이후 민가협 활동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해 왔기 때문에 주로 민가협 후반기 활동에 대한 이야기를 자세히 들을 수 있었다. 민가협 총무, 간사 등 민가협 후반기 젊은 활동가들에 대한 이야기를 구체적인 기록으로 남겼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