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술 컬렉션
구술컬렉션
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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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세환
- 어린시절 성장과정과 가계 이야기
- 경북고등학교 시절과 경북대학교 입학 후 학내 활동
-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과 민족민주청년동맹
- 당시 통일운동
- 5.16 군사쿠데타 이후 도피생활
- 대구일보사 기자생활
- 대구지역운동의 평가와 기자 해직 이후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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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명철1960년 2월 28일 발생한 2‧28대구민주화운동의 참여자들 가운데 당시 대구공고 학생이었던 박명철의 인터뷰를 통해서 2‧28직전 대구지역의 여당(자유당)에 대한 민심과 학생들의 눈에 비춰진 당시의 사회상을 여실히 알 수 있었다. 당시 대구지역은 야도(野都)라 불릴 만큼 여당이었던 자유당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았던 상황이었다. 이러한 지역사회의 분위기는 비록 구체적으로 당시의 시대적 문제를 인식할 수 없었던 대구지역 주민들, 특히 학생들에게도 전이되었다. 즉 당시 학생들은 자유당의 지배에 대해 막연하나마 정의롭지 못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학생이라는 신분적 제약과 경험의 부재로 인해 그러한 불만을 외부적으로 표출하지 못하고 있었다.당시 구술자를 비롯해 대구지역의 고등학생들은 대한적십자반 회원으로 방학 때 농활과 다양한 봉사활동에 참여하면서 주변 어른들한테서 "이승만 정권한테 얘기를 잘못하면 빨갱이로 몰리니 학생들도 말조심해라"는 얘기를 자주 들었고, 학생들끼리 "만날 학생들 억압만 하고 거짓말만 한다, 농민들의 어려움은 외면한다", "이놈의 세상, 무조건 야당인 민주당이 해야 한다"는 얘기를 자주했다.이러한 상황에서 당시 대구공고의 학생들은 학교당국의 일요등교 지시, 즉 일제고사의 실시와 노래자랑의 명목으로 일요등교를 감행한 학교당국의 처사에 대응해 불만을 외부적으로 표출시켰고 이것이 2‧28로 이어진 것이다.대구공고의 학생들은 일요등교 지시의 부당함을 알리고자 학생회를 동원하여 교장선생님과의 면담을 요청하였으나 교무과장의 저지와 정학이라는 엄포에 가로막혀 그들의 정당한 의견을 주장할 기회를 박탈당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경북고 학생들의 데모 소식을 접하였고 이에 합세하였다.대구공고는 28일의 일요등교를 27일에 지시함에 따라 학생들이 사전에 모의를 한다거나 준비계획을 한다는 등의 조직적이고 집단적인 데모의 준비를 할 수 없었다. 따라서 일요등교 당일 불만이 팽배한 상황에서 타 학교의 데모 소식을 접한 대구공고의 150여 명의 학생들이 이에 합세하기 위해 교정을 박차고 나왔다.교정을 뛰쳐나간 이후 이들은 구 신도극장 앞[현재 칠성교] 파출소 근방에서 곤봉을 든 경관들의 저지를 당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구술자는 집으로 귀가하였는데 경찰에게 얻어맞는 친구도 있었다는 것을 증언했다. 집에 귀가한 이후인 오후 1시 경에 멀리서 공포탄 소리와 경찰 사이렌 소리가 들려 구술자는 소리 나는 쪽으로 가보았고 그곳에서 경북고 학생들이 스크럼을 짜고 뛰면서 시가행진을 하고 있던 것을 목격하였다.2‧28 이후 3월 2일 학교에 등교해 보니 데모를 못하게 한다고 시국강연의 정신교육을 끊임없이 했고 그 내용은 "나라에 충성하고 뭉쳐야 한다", "조국에 대해 비방하지 마라"는 내용의 시국강연을 통해 정신교육을 시켰다.이후 4‧19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전 국민을 비롯해 대구지역의 주민들은 언론매체를 통해 마산의 김주열 사건을 알게 되었고 특히 구술자를 포함한 대구지역의 시민 및 학생들은 "우리 언론도 살아있구나", "때는 지금이다"하며 학교를 마치고 밤새도록 데모를 했다. 구체적으로 구술자의 경험에 따르면 당시 학생들은 까까머리인 까닭에 교복은 안 입어도 교모는 썼는데 방과 후 시내에 나가보니 타교 학생들[대구고, 경북고]이 스크럼을 짜는 것이 아니라 '읏샤! 읏샤' 하며 시내를 뛰어다녔다.당시 가장 타겟이 됐던 것이 국회의원도 했던 신도환이었는데, 그는 대한반공청년단단장으로 자유당 정권의 제일 앞잡이로 인식되어 있었다. 당시 반공이 국시였고 학생들을 상대로 반공교육을 많이 시켰는데 이를 신도환이 주도했고 따라서 자유당 정권의 앞잡이가 신도환이라는 걸 학생들도 다 알고 있었다.당시 그는 대구 시내[매일신문사 옆 진골목 안]에 살았는데 시민들과 학생들로 구성된 데모대가 "신도환이 집에 쳐들어 가자"며 외치자 사람들은 쳐들어갔고 구술자가 신발을 신은 채로 뛰어 들어가서 신도환의 다락을 열어보자 값비싼 일본 고급 접시가 꽉 차 있었고 구술자는 이 사람들이 생활을 위해 그것들을 쌓아놓은 것은 아니라고 생각함에 따라 이를 내팽개치자 사람들이 우레같이 달려들어 집을 다 부쉈다.그날 저녁부터 4‧19까지 대구에서 데모가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었고 당시는 경찰들도 김주열 사건 이후 걷잡을 수 없는 상황에서 이를 저지를 할 수 없었다고 말한다.이상의 2‧28대구민주화운동과 이후 4월혁명으로 이어졌던 당시의 일화들에 있어서 구술자는 비록 대구공고의 학생들은 학교의 거짓말에 속았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사전 계획을 하지는 못했지만 구술자는 이 점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며, 고종 말기 국채보상운동을 비롯하여 IMF 당시 금모으기 운동 등의 구국의 정신, 민족의 정신이 바로 대구의 정신이고 이것이 2‧28의 민주정신과 맥락을 같이 한다고 생각했다.5. 참고자료2‧28민주운동기념사업회, 『횃불』 10-1, 2010.2‧28민주운동기념사업회, 『2‧28민주운동』, 신문사, 2010.2‧28 민주의거 40주년 특별기념사업회, 『2‧28민주운동사』 Ⅰ‧Ⅱ‧Ⅲ, 경북인쇄, 2000.채장수, 「2‧28 대구민주운동의 의미론: '민주화'의 성격을 중심으로」, 『대한정치학회보』 11-3, 2004.이대우, 「2‧28 민주의거의 세계학생운동사에서의 위상」, 미상, 미상.서태영, 「'2‧28'을 청년학생의 품으로…」,『온장』1호,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대구지회, 2005.《대구신문》(www.idaegu.co.kr), <2‧28 민주운동의 역사적 의의>(입력시간: 2010-02-25)《대구신문》(www.idaegu.co.kr), <자유와 정의 외치며 민족혼 일깨워>(입력시간: 2010-0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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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유보1943년 경산에서 농사꾼의 8남매 가운데 셋째 아들로 태어난 구술자는 초등학교 2학년 때 6‧25를 겪었고 당시 그가 다니던 경산초등학교를 미군이 차지함에 따라 일본인이 지은 담배창고를 교실로 이용하는 등 열악한 환경 속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고 경북중학교를 거쳐 경북고등학교에 입학하였다. 구술자의 작은 아버지가 대구에 거주하였던 까닭에 어린 시절부터 객지생활을 하게 되었다. 경북고등학교에 입학할 당시 대구는 야도라고 해서 특히 이승만 정권에 대해 굉장히 비판적인 정서가 강했다고 한다. 구술자는 아직 어렸던 까닭에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분위기에 영향을 받았고 당시 삼촌이 동아일보를 구독함에 따라 반이승만 정서가 강했음을 체감하였다.그러한 가운데 구술자를 포함해 당시 경북고 학생들은 책을 많이 읽었고 그에 따라 소양이 높았다고 말한다. 2월 25일, 원래 3월 3일에 치르기로 예정되어 있던 시험을 28일 일요일에 당겨서 치니 등교하라는 학교당국의 지시가 내려졌고 학생들은 그것이 일요일 야당유세에 가지 못하게 하려는 속셈임을 알게 됨에 따라 26일부터 학교는 반마다 토론회를 하는 등 불만이 공유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학생들은 '학생회가 왜 가만히 있느냐! 너희들이 가서 못 온다고[등교를 못한다고] 해야 할 것 아니냐'는 이야기들이 나왔고 이에 따라 이대우를 위시한 학생회에서 학생성원들을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구술자는 이 대목에서 이대우를 굉장히 높이 평가하였는데, 이대우는 진보당의 상주의 면책임자였던 아버지의 정치적 영향을 받았는데 선거유세 때마다 참석을 하는 등 당시 나이 어렸음에도 불구하고 여타 학생들과 달리 정치적인 면에서 앞서 나갔다. 더욱이 이대우가 당시 학생회 부위원장임에 따라 학생들의 열망을 모아 공식적으로 항의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이것이 2‧28대구민주화운동을 계획한 배경이었다.또한 구술자는 학생들의 불만에 대한 학교당국의 미숙한 처리가 학생들의 불만과 저항을 더욱 증폭시켰다고 말하면서 당시 담임선생님이었던 안호영 선생님과 김윤식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동조하고 힘을 주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특히 김윤 선생님은 "희들 소신대로 해라. 못 말렸다고 책임을 물으면 나는 사표를 내지"고 했다.이러한 상황에서 27일 학생회에서 각 반장을 통해서 '일 등교를 해라' 따로 지시가 내려왔고 학생들은 당일 데모 계획은 몰랐지만 '지는 모르지만 뭔가가 있나 보다' 생각했고 28일 등교를 했다. 이후 1시 쯤 되어서 이대우가 운동장에 모여 있던 학생들을 대상으로 교단에 올라가 결의문을 낭독하였고 이 과정에서 저지하려는 선생님과 이를 막으려는 학생들 간에 충돌이 있었다. 결의문을 읽고 나서 학생들은 도지사한테 일요등교의 부당함을 따지기 위해 교정을 박차고 거리로 진출하였고 도청까지 갔다.거리로 진출 후 데모대가 도청에 갈 때까지는 경찰의 저지는 전혀 없었고 도청에 운집한 천여 명의 학생들 앞에서 이대우가 성명서를 읽고 하니 그때서야 뒤늦게 경찰들이 동원되었다. 당시 도지사가 이근직이었는데 그가 나와서 학생들한테 훈계를 하려 하였고 이 과정에서 경찰이 출동하였다. 구술자는 경찰에게 잡혀 도청 강당으로 끌려갔고 거기에 한 50여 명의 경북고 학생과 함께 잡혀 있었다. 학생들이었던 까닭에 구술자를 포함한 여타 학생들은 저녁에 훈방조치되었고 선생님들의 인도하에 다시 학교로 돌아갔다.이후 학교에서 데모 참여자들에 대한 어떠한 처벌도 없었다. 그러나 이대우는 3월 들어 3월 15일까지 여러 고등학교가 시위를 하는 등 고등학생들이 다시 술렁거리기 시작함에 따라 경찰이 학교를 찾아와서 학교장의 동의하에 데리고 가버렸다. 구술자는 이를 납치라 표현하였는데 경찰이 포항을 비롯해 여러 곳으로 이대우를 데리고 다녔다고 진술하였다.경북고의 경우 2‧28대구민주화운동 이후 선생님들의 교원노조운동에 동조하여 단식을 하였는데 학생들은 선생님들이 조직화함으로써 불의에 앞서 올바른 목소리를 낼 것이라고 생각하였던 것이다.마지막으로 구술자는 2‧28대구민주화운동과 같은 역사적 사건은 그 사건에 직접 참여하는 사람도 물론이고 목격을 하는 사람도 영향을 받는데, 구술자의 경우 이승만 정권의 4월혁명을 겪으면서 '한국의 제 일차적인 과제는 사회의 민주화다'는 생각을 품게 되었고 이후 한국의 민주화운동에 투신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말한다.5. 참고자료2‧28민주운동기념사업회, 『횃불』 10-1, 2010.2‧28민주운동기념사업회, 『2‧28민주운동』, 신문사, 2010.2‧28 민주의거 40주년 특별기념사업회, 『2‧28민주운동사』 Ⅰ‧Ⅱ‧Ⅲ, 경북인쇄, 2000.채장수, 「2‧28 대구민주운동의 의미론: '민주화'의 성격을 중심으로」, 『대한정치학회보』 11-3, 2004.이대우, 「2‧28 민주의거의 세계학생운동사에서의 위상」, 미상, 미상.서태영, 「'2‧28'을 청년학생의 품으로…」,『온장』1호,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대구지회, 2005.《대구신문》(www.idaegu.co.kr), <2‧28 민주운동의 역사적 의의>(입력시간: 2010-02-25)《대구신문》(www.idaegu.co.kr), <자유와 정의 외치며 민족혼 일깨워>(입력시간: 2010-0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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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효영경북 의성에서 태어난 구술자는 안계국민학교를 나왔다. 일제시대 상주 농잠학교를 나오고 금융조합에서 근무했던 구술자의 아버지는 당시 중상층의 사회적 위치에 있었고 공부시키는 것에 대해 열정을 가지셨던 분이었다. 따라서 구술자는 대구로 와서 경북중학교에 1차로 입학시험을 쳤으나 낙방하고 2차로 경상중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졸업 후 경북고등학교로 진학한 구술자는 그 당시 대구지역의 정치적 분위기에 대해 대구는 완전히 야당 도시였다고 말한다. 구체적으로 조재천이 민주당 후보로 출마해 국회의원에 당선될 만큼 자유당에 대해서 지지하거나 자유당이 좋다든가 하는 것이 별로 없었다고 기억한다. 그러한 지역의 반자유당 정서는 어린 나이였던 구술자에게도 감지가 될 정도였는데 구술자는 당시 선거의 개표상황을 일정한 장소에서 공시하였는데 그곳에서 비록 우리 지역이 아니었지만 다른 지역의 야당이 표를 많이 얻으면 박수를 쳐주고 했던 일화를 기억하였다.경북고등학교 1,2학년 때 학급 반장 즉, 학교 학생운영위원을 역임했던 구술자는 당시 3학년이 졸업한 관계로 교내 최고 학년으로서 학생회 부위원장을 하던 이대우 군과 함께 학생회를 이끌었다. 당시 경북고 학생들은 『플루타르크 영웅전』, 톨스토이의 『죄와 벌』과 같은 책과 『사상계』, 『현대문학』을 많이 읽음에 따라 비록 어렸지만 어느 정도 깊고 넓게 볼 수 있는 정치적 시야를 가지고 있었다고 말한다.따라서 학교당국의 28일 일요등교 지시는 28일 장면 야당후보의 유세에 참석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라는 사고로 자동적으로 연결되었다. 즉, 그 전에도 자유당 정권이 가졌던 부도덕성에 대한 사전 지식이 있는 상황에서 일요등교를 지시하니 '이게 그런 문제구나' 하고 전 학생들에게 인식이 된 것이었다. 따라서 각 반마다 선생님들과, 그리고 선생님들이 없을 때에도 치열하게 등교문제를 토론하였고 '이것은 부당하다. 우리가 뭔가를 해야 하지 않겠는가' 의 공감대를 형성해 나갔다.그러나 대구 10‧1사건과 6‧25전쟁을 겪으면서 반공이 강화되었던 당시의 시대상황에서 자기표현의 방식으로서 데모를 하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알기는 했지만 그것을 학생들이 실행을 한다는 것은 굉장한 도전이었다. 왜냐하면 자유당 정권이 일어난 이후 대구에서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반대데모를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처음에 학생들은 '가만히 있을 수 없다', '뭔가를 하기는 해야 한다'고는 생각했으나 '데모하자'는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각 반마다 토의, 토론이 되는 과정에서 '이것은 우리가 중앙청으로 달리는 수밖에 없다. 달리 우리를 나타낼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이에 따라 학생회 임원을 중심으로 이대우, 홍종흠, 구술자, 권준하, 전하섭, 윤종명 등 학생들이 27일 저녁 이대우 군의 집에 모여 대구고와 사대부고 등의 다른 학교와의 연합데모를 계획하였다. 이날 자리에 모인 3개교 학생들은 데모 실행 이후 '암묵적으로 우리가 다 했다고 하자. 학생운영위원들이 했다고 하자. 그리고 다른 사람은 그냥 참여한 사람들이라고 해야 우리가 그들을 보호를 해 줄 것이 아니냐'는 결론에 도달했다.다음날인 2월 28일 교정을 박차고 거리로 진출해 데모를 감행함에 있어 경북고 학생들의 가장 큰 고민은 만약 선생님들이 이를 저지할 시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문제였다. 따라서 학생들은 선생님들이 교무회의를 하고 나오기 전에 교정 밖으로 진출하기로 결의하였다.28일 당일 학교로 등교한 800여 명의 학생들은 이대우의 결의문 낭독이 끝나자마자 '반월당으로 가자'는 외침에 교정을 박차고 나왔다. 학생들은 누구 할 것 없이 삼덕우체국을 지나서 대구상고에서 학생들의 동참을 호소한 뒤 반월당으로 갔고 시내의 대구매일 신문사에 들러 일요등교의 부당함을 전했다. 이후 학생들은 도청으로 진출하였고 그곳에서 구술자는 일요등교의 부당함을 성토하였고 열화와 같은 학생들의 응원을 받았다. 그때부터 경찰이 풀리기 시작했고 학생들은 사분오열되었다.이후 경찰에 연행된 구술자는 경찰 취조실에서 '배후가 누구냐, 누가 뒤에서 시켰느냐, 누구와 이런 일을 했느냐', '선생님들 가운데 누가 시킨 사람 없느냐' 등의 취조를 받았고 선무방송을 한 이후에 귀가조치되었다.이후 학교로 돌아온 학생들은 다친 사람이 없고 연행된 사람도 없음을 확인하고 안도했다. 그리고 학생들의 마음에는 자랑스러운 마음이 생겼는데 학생들의 이기적인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문제로 한 것에 대해 시민들이 박수를 쳐 주고 신문에서 학생들을 옹호해 주었기 때문이다. 이후 경북고의 학생들은 4월혁명으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선생님들의 교원노조운동에 동조하여 단식농성을 하였다.구술자는 2‧28대구민주화운동이 기존 질서에 대해 최초로 항거한 것이었다고 말하는데 당시 권위 사회가 가지고 있었던 부조리와 부정적이고 기득권을 지키려는 사람들이 극에 달했던 상황에서 학생들이 그들 집단의 사적인 이익이 아니라 공적인 이유로 거리로 뛰쳐나왔음에 큰 자부심을 느꼈다.2‧28대구민주화운동의 현대적 의미 및 지향점에 대해서 구술자는 당시에도 그렇고 그 후에도 그러한데, 사회 부정의에 항거한다는 것이 파괴를 전제로 하였는데 이제는 창조적인 부문을 먼저 생각해야하며 따라서 2‧28대구민주화운동은 무언가를 창조하는 따듯함을 구현해내야 할 것이라고 말한다.5. 참고자료2‧28민주운동기념사업회, 『횃불』 10-1, 2010.2‧28민주운동기념사업회, 『2‧28민주운동』, 신문사, 2010.2‧28 민주의거 40주년 특별기념사업회, 『2‧28민주운동사』 Ⅰ‧Ⅱ‧Ⅲ, 경북인쇄, 2000.채장수, 「2‧28 대구민주운동의 의미론: '민주화'의 성격을 중심으로」, 『대한정치학회보』 11-3, 2004.이대우, 「2‧28 민주의거의 세계학생운동사에서의 위상」, 미상, 미상.서태영, 「'2‧28'을 청년학생의 품으로…」,『온장』1호,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대구지회, 2005.《대구신문》(www.idaegu.co.kr), <2‧28 민주운동의 역사적 의의>(입력시간: 2010-02-25)《대구신문》(www.idaegu.co.kr), <자유와 정의 외치며 민족혼 일깨워>(입력시간: 2010-0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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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형
어린시절 성장과정과 가계 이야기, 6.3 한일회담반대 시기 정만진 선생과 서적에 관련된 일화, 한국민계몽운동과 7.29 총선 관련 이야기, 한국전쟁 당시 인민군 장교에 대한 기억, 1974년 인민혁명당재건위원회사건, 대구지역운동의 보수화와 4월혁명에 대한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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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주효구술자는 2‧28대구민주화운동을 이끈 여타 학생들과 마찬가지로 경상중학교 출신이다. 구술자는 경북중학교에 응시했다가 떨어지고 경상중학교에 입학을 했고 2학년 때 운명적으로 이대우라는 친구를 만났다. 만나서 정말 형제같이 온갖 얘기를 나누며 지냈고 당시 시대적인 상황들이 입시나 학력문제에 대해서 비교적 자유로워서 그런지, 아니면 정치적 사안에 대해 관심이 많아서 그런지 그런 학생들과 주로 모여서 지냈다. 이후 경북고등학교에 응시했다가 떨어지고 대구고등학교에 입학한 구술자는 학생회 회장에도 출마하기도 하였다.이런 가운데 결정적으로 이런 친구들과 광범위하게 어울리게 된 계기는 그 당시 경상북도 학무국에서 주최했던 도내 학도호국단 간부학생들의 수련회였다. 그때 경북고에서 이대우, 경북대사대부고에서 최용호, 대구고등학교에서 구술자 본인과 이성실이라는 당시 학생회 부회장이 참가했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아주 의기가 투합하는 사람들과 만나는 계기가 되었고 그 연장선상에서 2‧28대구민주화운동을 이끈 학생들의 끈끈한 인연을 찾을 수 있다고 구술자는 생각한다. 더불어 2‧28대구민주화운동과 결정적인 연계는 없지만 농촌봉사활동이 아주 활발하게 진행되었고 그때 '새날동지회'라는 범 대구지역 고등학교 학생회 간부들의 모임이 있었는데 그 모임에서 위에 언급한 친구들을 포함하여 경북여고, 대구여고, 대구농고의 학생들이 교류했다. 이 또한 2‧28대구민주화운동에 일정한 영향을 미친것이 아닌가라고 구술자는 생각했다.해방이 되고 난 후에 소위 미국식 민주주의 교육을 받은 것 중 좋은 측면은 토론문화가 적극적으로 진행되었다는 것인데 중학교와 고등학교에 들어갈 당시 언론의 자유는 지금과 비교해도 놀라울 정도였다고 구술자는 회상한다. 특히 당시에 소위 야당지라고 하는 동아일보의 여당에 대한 비판적 논조가 아주 대단했으며 대구지역의 대구매일신문과 영남일보, 대구일보, 또한 여론 선도에 있어 많은 역할을 했다.또한 당시에 못 살았기 때문에 정치 과잉이 아니었나 하는 측면과, 다른 한편으론 교육에 의해서 정치적인 상황에 대해서 굉장히 민감하면서도 활발했다고 회상한다.그래서 당시 고등학생 정도가 되면 상당한 정치적인 식견을 가지고 있었고, 대구라는 지역사회가 지금과는 달리 국회의원 선거 결과를 보면 지역을 달리하는 사람들이 출마해서 야당의원으로 많이 당선이 될 만큼 굉장히 역동적이고 여당에 비판적이었던 야당도시였다고 말한다. 심지어 4‧19 이후에 진보세력들이 대구에서 아주 큰 활동을 했었다고 회상한다.대구고의 학생들은 입시에 실패한 학생들이 많이 입학함에 따라 학생들은 차후 대학입시에서 좋은 결과를 내기 위해 입시공부에 치중하였고 그에 따라 그러한 모임들이 꽤 있었다. 반면에 정치모임은 존재하지 않았는데 그러한 것이 별도로 없어도 될 정도로 당시 자유당의 폭정에 대해서 절대적으로 공감을 하고 있던 상황이었다.이러한 상황에서 대구고에 일요등교 지시가 하달되었고 이에 따라 경북고의 이대우, 안효영, 대구고의 구술자와 손진홍 등이 중심이 되어 데모를 위한 사전계획을 논의하였다. 학교당국의 일요등교 지시는 학생들이 토요일에는 자유당이 신천에서 유세가 있으니 참여하도록 하고 일요일은 민주당이 하니 참여를 못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2‧28대구민주화운동 전날인 27일 저녁에 이대우의 집에서 이대우 본인과 전하섭, 권준하, 윤종명, 대구고의 손진홍, 구술자, 윤풍홍, 경북대 사대부고의 최용호 등이 모여 의논을 했다. 이 과정에서 학생들은 일요등교 지시가 부당하다는 데 뜻을 모았고 그에 따라 '선언문을 어떻게 할 것인가'의 문제를 두고 의논하였다. 경북고는 한 해 쉬고 있던 하청일 이라는 학생에게 결의문을 쓰도록 하고, 대구고는 25일에 일요등교 지시를 알게 되고 부당함을 공감할 시간이 많았던 경북고와 달리 준비가 많이 부족한 상태임에 따라 학생들을 독려해서 데모를 하자고 해야 될 입장이므로 선언문을 쓸 형편이 되지 않았다. 따라서 사대부고의 최용호에게 결의문 작성을 부탁하고 10시쯤 헤어져서 대구고의 학생들을 만나러 갔다.그래서 대구고 친구들에게 데모 계획을 설명하고 다시 이대우의 집에 오니 구술자와 손진홍이 자리를 비운 사이에 경북고 일부 대의원들이 와서 '데모는 곤란하다'고 함에 따라 데모의 실행 가부를 놓고 격론이 벌어졌으나 결국 데모를 실행하는 쪽으로 결정이 났다. 그때부터 구체적으로 구호와 데모 코스를 정하였다.2‧28 당일 손진홍이 사람을 몇 차례 경북고로 보냈으나 경북고로부터 교정 밖으로 진출했다는 소식이 없었다. 결국 손진홍이 경북고로 직접 갔고 그곳에서 '역시 어렵다'는 말을 듣고 "좋다! [너희들이 못 나가면] 우리라도 나간다. 나갔다"고 현재진행형으로 얘기하고 뒤돌아서니 경북고에서 학생들이 쏟아져 나왔다.그런 속에 대구고 상황은 구술자 혼자서 상황을 주시하면서 학생들을 독려하고 있었는데 손진홍이 허겁지겁 들어오면서 "나가자"고 함에 따라 150여 명의 학생들이 교정을 박차고 거리로 진출했고 이후 데모의 전말을 알게 된 나머지 학생들도 거리로 진출하였다. 데모대는 남문시장에서 일차적으로 경찰에게 저지당하였고 반월당에서 이차적으로 저지당했다. 이에 따라 학생들은 시청과 도청으로 진출했다.구술자는 데모대의 주도자로 지목되어 손진홍, 장주효, 이대우, 안효영과 함께 취조를 당하였고 그러는 와중에 사대부고 학생들에 의해 저녁에 데모가 또 일어났다. 이러한 상황에서 경찰은 이들에게 선무방송을 지시하였고 이에 따라 '모든 건 끝났다. 학우들은 돌아가라. 우리는 승리했다'고 돌아다니며 선무방송을 했다.이후 구술자를 포함한 데모를 주도한 학생들은 경찰의 미행을 받았고 특히 이 가운데 이대우는 4월혁명으로 이어지는 당시 혼란한 상황에서 또 다시 학생들을 선동할까봐 의심한 경찰에게 납치되어 구금되는 상황까지 발생하였다.구술자는 2‧28대구민주화운동의 의미를 부여한다면 적어도 4‧19 공간에서 모두가 공감을 했지만 그 기폭제라고 하는, 그것도 고등학교 학생들이 의도를 가지고 자기 의견을 표현을 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고 생각한다. 여당의 폭정에 대한 반발이 당시 어느 곳에서든 일어날 시대적 배경이 있었지만, 그리고 사회적인 식견이나 뭐가 더 있을 수도 있는 대학생과 사회인도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고등학생들이 했다는 것에 대해, 좋게 말하면 순수하고 아무것도 모르니까 했다는 측면도 되고 또 한편으론 가장 때 묻지 않고 해서 나름대로 교과서적인 의미에서 '이래서는 안 되겠다'고 해서 과감히 행동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부여한다.5. 참고자료2‧28민주운동기념사업회, 『횃불』 10-1, 2010.2‧28민주운동기념사업회, 『2‧28민주운동』, 신문사, 2010.2‧28 민주의거 40주년 특별기념사업회, 『2‧28민주운동사』 Ⅰ‧Ⅱ‧Ⅲ, 경북인쇄, 2000.채장수, 「2‧28 대구민주운동의 의미론: '민주화'의 성격을 중심으로」, 『대한정치학회보』 11-3, 2004.이대우, 「2‧28 민주의거의 세계학생운동사에서의 위상」, 미상, 미상.서태영, 「'2‧28'을 청년학생의 품으로…」,『온장』1호,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대구지회, 2005.《대구신문》(www.idaegu.co.kr), <2‧28 민주운동의 역사적 의의>(입력시간: 2010-02-25)《대구신문》(www.idaegu.co.kr), <자유와 정의 외치며 민족혼 일깨워>(입력시간: 2010-0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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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재창
어린 시절 성장과정과 가계 이야기, 삶에 영향을 많이 받은 사람과 대구사범학교 시절, 국민계몽운동과 7.29 총선 상황, 2대악법반대투쟁 활동 ,형님 전재권 선생에 대한 이야기 ,사월혁명회와의 만남과 4월혁명에 대한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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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용호1943년 경북 의성 봉양면 도륜에서 태어난 구술자는 도륜국민학교를 1회, 도륜의 봉양중학교를 4회로 졸업했다. 이후 경북대 사대부고로 진학하였다. 중학교시절 이순구라는 국어선생님이 구술자에게 웅변을 권하였고 이 과정에서 표현력을 배우고 외향적 성격이 되었다. 특히 구술자의 어머니가 도륜에서 동아일보 지국을 경영하여 중등시절에 신문을 보는 것에 익숙해지게 되었고 봉양중학교 시절 학생회장을 역임하여 사회문제에 대해 일찍이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고등학교에 진학한 이후에도 웅변반에 가입해서 특별활동을 했는데 당시 상업을 담당했던 이목 선생님한테서 웅변을 배웠다. 이를 통해 대구 시내의 각 고등학교나 대학생들과 교류가 있었는데 특히 당시 '새날동지회'라는 대구 시내의 경북고, 대구고, 대구농고, 경북여고, 대구여고, 경북대 사대부고의 연합서클에서 주로 농촌 봉사활동을 통해 여러 학생들과의 교우관계를 맺었던 것이 2‧28대구민주화운동과정에서 타 교와의 연계과정에 중요한 밑바탕이 되었다. 특히 1959년 여름방학 때 일주일 동안 경북 도내의 학도호국단 간부연수회가 포항에서 개최되었는데 이를 통해 대구경북의 중고등학생 간부학생들이 서로 알게 되었고 연수회를 마치고도 자주 만나고 같이 활동을 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데모가 일어난 것이 처음이었지만 당시 데모를 하는 것이 사회적으로 굉장히 숙달되어 있었는데, 그때만 하더라도 학생들이 여러 관제데모에 동원되었기 때문에 그러한 집단 활동에 익숙해져 있었다. 즉 반공데모, 관제데모에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에 2‧28대구민주화운동의 경우 데모의 형식을 빌려 이뤄질 수 있었던 것이다.경북대 사대부고는 일요등교에 관한 지시를 제일 늦게 알게 되었다. 그러나 앞서 말한 그러한 인적 네트워크를 통해 늦었지만 26, 27일부터 같이 뭉칠 수 있었다. 27일 종례시간에 일요등교 지시가 하달되었고 학생들을 이미 흩어진 다음이라 이에 대해 의논할 여유가 없었다.그날 대구고 손진홍 학생위원장과 그의 친구 윤순홍이 구술자를 찾아와서 자기들은 아침에 얘기를 들었는데 '이래서 되겠는가' 하면서 경북고 이대우의 집에 가서 함께 논의해보자고 했고 해질 무렵 이대우의 집에서 3개 학교 학생들이 만났다. 당시 경북고의 경우 이미 시위 논의가 성숙되어 진행되고 있었고 대구고도 3명이 모였고 경북대 사대부고는 구술자 혼자였다. 이 자리에서 연합해서 시위를 하자고 결의하였다.어느 누구한테 항변하더라도 학생들한테 일요일에 등교하라는 것은 부당한 것이며 젊은 학생들에게 휴식을 취해야 할 일요일에 나오라는 것은 그들에게 직접적으로 와 닿는 문제였다. 특히 당시 2‧28대구민주화운동에 참여했던 학생들은 한글세대로서 일제하에서 식민지교육을 받은 적도 없고 민주주의에 대해 배운 세대였다. 법치와 삼권분립에 대해 원론적으로 배운 그들에게 있어 당시의 정치 행태는 전혀 그렇지 못했다. 그래서 민감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당장 일요일에 나오라고 하니 수긍할 수 없었고 이에 청순한 정의감이 뒷받침되어 2‧28대구민주화운동을이 표출되었다. 당시 대학생들을 비롯해 기성세대는 고등학생들처럼 행동하는 데는 미치지 못했다.특히 2‧28대구민주화운동이 있기 직전 정‧부통령 선거를 앞두고 조병옥이 2월 15일 미국에서 사망함에 따라 2월 16일 점심시간에 학교 교실 칠판에 '가련다. 떠나련다. 해공선생 뒤를 따라. 장면박사 홀로 두고 조 박사는 떠나간다. 가도 가도 가망 없는 당선 길은 몇 굽이냐. 자유당에 꽃이 피네. 민주당에 비가 오네'라는 내용의 당시 유행했던 '유정천리'의 가사를 바꿔서 적은 소위 '노가바 사건'이 일어났고 이후 학교 전체와 전국적으로 전파되었다. 이로 인해 이를 주도한 학생은 무기근신을 당했고 당시 학생회 부위원장이었던 구술자 또한 남대구경찰서에 호출되어 조사를 받았다.이러한 분위기에서 27일 이대우의 집에서 모인 학생들은 대구고, 경북대 사대부고, 경북고가 연합해서 데모를 하기로 결의하였다. 다음 날 아침 구술자는 친구인 김영대를 찾아가 데모 계획을 알리고 언론에 이를 알리기로 합의했다. 이후 11시에 학생회를 소집해서 이에 관해 논의하는 가운데 12시쯤 경북고 쪽의 학생들이 경북대 사대부고 앞을 지나가면서 데모에 동참하기를 종용했다. 그러나 학교에서 교문을 닫아 걸고 '전 학생들은 교실로 들어가라'는 지시를 내려서 학생들은 교실로 들어갔고 학생회 간부들은 과학실에서 긴급 간부회의를 위해 모였고 교무주임, 학생주임 선생님들을 상대로 해서 '왜 부당하게 일요일 등교를 시키느냐'고 항의했다.당시 교무주임 선생님은 교정 밖으로 진출하려는 학생들을 만류하며 '태평양 한가운데 큰 물결이 흐르는데 젓가락 하나로 휘저어서 태평양의 물을 바꿀 수 있느냐, 부당하고 참 나쁠지라도 너희들이 더 공부하고 힘을 길러서 너희들 세대가 되어서는 이러지 않도록 지금은 참아라'라고 계속 설득했다. 이에 학생들은 교실에 모여 일요등교 지시의 부당함을 알리기 위해 농성을 시작하였고 이에 소식을 들은 신문사 기자들이 찾아와 사건의 진상을 알게 되었다. 저녁이 돼서야 대략 70-80명이 학교 밖으로 진출하여 도지사의 관사로 가서 도지사를 만나 일요등교의 부당함을 따졌다.이후 3월 1일 남대구경찰서에서 이미 조사가 다 끝이 나고 시위를 했던 학생 간부들을 소집해서 서장은 '학생들이 순수해서 북괴에게 이용당하고 있으니 반정부 투쟁이 아니라 단순히 일요등교에 대한 항의였다'는 성명서를 학생대표들이 발표하라는 권유를 하였고 김영대가 '안 되겠다. 이런 자리에서 그런 내용을 더군다나 서장실에 성명서를 발표하는 것은 이것이 오히려 우리의 순수한 의도를 왜곡하는 것이 된다'며 반대하였고 결국 성명서의 발표는 없었다.구술자는 2‧28대구민주화운동에 참여했던 한 사람으로서 그리고 그것을 고민했던 사람으로서 모든 삶의 궤적에 하나의 자부심도 되지만 자신이 부정을 한다든지 불의를 보면 참을 수 없었다든지 등 삶을 살아가는 가운데 행동 하나하나에 제약요인으로 작용하기도 했다고 말하면서 당시 사회에 대한 반면교사가 되어 70 평생을 살면서 삶에 있어 크게 흔들리지 않고 걸어오는 데 큰 힘이 되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그 시기를 함께 겪었던 많은 친구들과 지금까지 소중한 관계가 유지되는 것을 고맙게 생각한다고 말하였다.5. 참고자료2‧28민주운동기념사업회, 『횃불』 10-1, 2010.2‧28민주운동기념사업회, 『2‧28민주운동』, 신문사, 2010.2‧28 민주의거 40주년 특별기념사업회, 『2‧28민주운동사』 Ⅰ‧Ⅱ‧Ⅲ, 경북인쇄, 2000.채장수, 「2‧28 대구민주운동의 의미론: '민주화'의 성격을 중심으로」, 『대한정치학회보』 11-3, 2004.이대우, 「2‧28 민주의거의 세계학생운동사에서의 위상」, 미상, 미상.서태영, 「'2‧28'을 청년학생의 품으로…」,『온장』1호,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대구지회, 2005.《대구신문》(www.idaegu.co.kr), <2‧28 민주운동의 역사적 의의>(입력시간: 2010-02-25)《대구신문》(www.idaegu.co.kr), <자유와 정의 외치며 민족혼 일깨워>(입력시간: 2010-0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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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종흠1943년 군위군 부계면 대을동에서 태어난 구술자는 어린 시절 대구로 나와서 달성초등학교와 경산의 경상중학교, 경북고등학교에 입학했다. 경북고에 입학한 특별한 이유는 없고 당시 경북고가 대구-경북지역에서 제일 좋은 학교였기 때문이었다.경북고에 입학하여 두 종류의 친구들을 만났는데 하나는 정식으로 시험을 치고 들어온 실력 있는 친구들과 다른 하나는 부모들의 배경이 좋아 들어온 친구들이었다. 이들 간에 알력은 크게 없었으나 성적 격차와 생활 격차가 있다 보니 친해지기 어려웠다. 즉 농촌 출신이고 못살아서 떠돌듯이 그리고 학비를 낼 수 있을지 말지를 모르던 구술자와 달리 부모들의 배경이 좋아 기부입학한 학생들은 대단한 행세를 하던 집안들의 자제들이어서 구술자의 부류와는 소통이 잘되지 않았고 구술자는 그러한 상황에서 사회현실을 깨달아 갔다.2‧28대구민주화운동 직전 대구지역의 분위기에 대해 앞서 6‧25전쟁과 그 앞서의 10‧1사건을 겪으면서 좌우익 문제와 행정당국, 지배층과 억눌린 서민들의 갈등이 상당히 존재했다고 말한다. 특히 자유당 정권기에 아버지, 삼촌, 형님들은 조심조심 세상을 살았는데 왜냐하면 잘못하면 잡혀 들어가 두들겨 맞거나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던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이를 예전 칠레의 군사정부 피노체트 치하나 스탈린 치하, 남미의 군부정권, 아프리카의 일부 군부정권과 유사했으며 대상이 지배층 대 일반 피지배층[국민들]이었다. 이러한 시대를 살면서 구술자를 비롯해 당시 고등학생들은 이를 늘 예민하게 보아왔다.특히 대구 10‧1사건이나 조봉암이 이승만보다 득표율이 높았던 지역이 대구가 유일했고 이에 따라 대구를 모스크바라고 부를 정도로 야성이 강했으며 이것이 바로 당시 대구의 정치적 상황이었다.자유당 독재가 6‧25를 거치면서 엄청나게 가혹한 상황에서 일반 국민들은 데모는커녕 반정부적인 말도 함부로 못했던 당시 상황에서 대구의 경북고 학생들이 어떻게 해서 최초로 그러한 반정부 데모를 할 수 있었는가? 즉 어디서 벤치마킹을 했느냐에 대해 구술자는 관제데모에서 벤치마킹을 했다고 보면서 당시 학생들이 온갖 관제시위에 많이 동원됨에 따라 이에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28일 당일 교정을 박차고 나온 약 500여 명의 학생데모대를 특별히 누가 나서서 주도하거나 대열을 이끈 사람은 없었으며 반월당으로 진출하였고 도청에서 최초로 경찰과의 충돌이 시작되었고 구술자를 포함한 일부 학생들은 경찰에 연행되었고 일부는 흩어져 산발적인 시위를 계속하였다.2‧28대구민주화운동에 관해 말하면서 구술자는 기념문집의 편집을 하면서 강조했던 바와 같이 '2‧28대구민주화운동은 특정한 영웅이 지도를 해서 일어난 것이 절대 아니다. 발생의 제일 바탕은 그 당시 자유당 정부의 부패와 독재가 핵심적인 바탕이 되고 거기에 불을 지른 동기는 3‧15부정 선거를 획책하는 과정에서 학생들을 정치 도구화하는 것이 도화선이었다. 그러나 이 도화선이 생겼을 때 거기에 빨리 불을 댕긴 것은 학생들인데, 그 학생들이 불을 댕기는 과정에서 당시 학도호국단의 학생 부회장, 일반 학급의 회장을 했던 친구들이 일부 역할을 하기는 했지만 그 당시 학교의 분위기는 그 사람들이 안 나와도 2‧28대구민주화운동이 발생했을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즉 이미 풍선이 터질 만큼 부풀어 오른 상태에서 학생회 지도층이 역할을 한 것이며 논의의 초점을 맞추면 영웅적인 얘기만이 나올 뿐이라는 것이다.다만, 경북고의 경우에는 결의문 낭독이 있었는데 당시 학생회 부회장이었던 이대우가 이를 읽었고 그리고 결의문을 빼앗길 때를 대비해 대독할 안효영 같은 친구들이 일정 부문 역할을 했다. 2월 28일 전에 학생회장이나 회장이 아닌 사람들이 밤에 모여 의논도 하는 등의 역할이 있지만 실제 당시 등교해서 보면 수업시간에도 그 문제로 인해 수업을 못하고 이 반 저 반 친구들이 복도에 서서 '이번에는 참아서는 안 된다'며 교내 전체가 불만을 공유하고 있었다는 것이다.2‧28대구민주화 운동 이후 학교로 돌아온 경북고 학생들은 선생님들의 교원노조운동에 동조해 단식농성을 벌였는데 구술자는 교원노조가 탄생된 배경에 있어 2‧28대구민주화운동이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말한다. 즉 '선생님들이 참교육을 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기 때문에 2‧28대구민주화운동과 같은 일이 일어났다. 쉽게 말해 선생님들이 전제권력을 막아야 하는데 못 막아서 학생들이 터져 나온 것 아니냐' 하는 자괴감이 전국 교원노조로 발전했다는 것이다. 이에 경북고 학생들은 선생님들을 지지를 하고 단식농성을 감행했다.구술자는 2‧28대구민주화운동이 첫째로 우리가 민주주의를 이 땅에 정착시키고 꽃피우려 했다는 점, 둘째로 '횃불을 들어라 동방의 빛들아'라는 구호가 그 당시에는 생경하고 엉뚱하게 여겨졌던 부분도 있었지만 그 속에 민족통일 문제를 비롯해서 한반도와 한반도를 넘어서서 우리 민족적 역량을 세계사에 기여하고자 하는 열망이 내포되어 있었다는 점에서 상당한 의미를 가지며, 만약 언젠가 세상이 어두워지면 2‧28민주화운동이 전례로서 횃불과 같은 역할을 할 것이라고 말한다. 마지막으로 지역의 민주화를 위한 노력의 소산으로서 후손들에게 본보기가 되어야 하는 이것이 2‧28대구민주화운동의 정신이 오늘날 대구 지역에 지속적 살아있어야 하는 이유라고 말한다.5. 참고자료2‧28민주운동기념사업회, 『횃불』 10-1, 2010.2‧28민주운동기념사업회, 『2‧28민주운동』, 신문사, 2010.2‧28 민주의거 40주년 특별기념사업회, 『2‧28민주운동사』 Ⅰ‧Ⅱ‧Ⅲ, 경북인쇄, 2000.채장수, 「2‧28 대구민주운동의 의미론: '민주화'의 성격을 중심으로」, 『대한정치학회보』 11-3, 2004.이대우, 「2‧28 민주의거의 세계학생운동사에서의 위상」, 미상, 미상.서태영, 「'2‧28'을 청년학생의 품으로…」,『온장』1호,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대구지회, 2005.《대구신문》(www.idaegu.co.kr), <2‧28 민주운동의 역사적 의의>(입력시간: 2010-02-25)《대구신문》(www.idaegu.co.kr), <자유와 정의 외치며 민족혼 일깨워>(입력시간: 2010-02-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