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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효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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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채록 정보

구술자
안효영
면담자
채장수, 이신용
구술일자
2010년 8월 4일
구술장소
충남 서산 웅도교회
구술시간
1시간 43분 44초
구술컬렉션 > 4.19혁명 > 대구 관련 구술아카이브
  • 기세환

  • 박명철

  • 성유보

  • 안효영

  • 구술채록 내용

    구술자 이력
    1943년 출생 1958년 경북고등학교 입학 1960년 2‧28 시위 참여
    구술내용 요약
    경북 의성에서 태어난 구술자는 안계국민학교를 나왔다. 일제시대 상주 농잠학교를 나오고 금융조합에서 근무했던 구술자의 아버지는 당시  중상층의 사회적 위치에 있었고 공부시키는 것에 대해 열정을 가지셨던 분이었다. 따라서 구술자는 대구로 와서 경북중학교에 1차로  입학시험을 쳤으나 낙방하고 2차로 경상중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졸업 후 경북고등학교로 진학한 구술자는 그 당시 대구지역의 정치적  분위기에 대해 대구는 완전히 야당 도시였다고 말한다. 구체적으로 조재천이 민주당 후보로 출마해 국회의원에 당선될 만큼 자유당에  대해서 지지하거나 자유당이 좋다든가 하는 것이 별로 없었다고 기억한다. 그러한 지역의 반자유당 정서는 어린 나이였던 구술자에게도  감지가 될 정도였는데 구술자는 당시 선거의 개표상황을 일정한 장소에서 공시하였는데 그곳에서 비록 우리 지역이 아니었지만 다른  지역의 야당이 표를 많이 얻으면 박수를 쳐주고 했던 일화를 기억하였다. 
    경북고등학교 1,2학년 때 학급 반장 즉, 학교 학생운영위원을 역임했던 구술자는 당시 3학년이 졸업한 관계로 교내 최고 학년으로서  학생회 부위원장을 하던 이대우 군과 함께 학생회를 이끌었다. 당시 경북고 학생들은 『플루타르크 영웅전』, 톨스토이의 『죄와  벌』과 같은 책과 『사상계』, 『현대문학』을 많이 읽음에 따라 비록 어렸지만 어느 정도 깊고 넓게 볼 수 있는 정치적 시야를  가지고 있었다고 말한다.
    따라서 학교당국의 28일 일요등교 지시는 28일 장면 야당후보의 유세에 참석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라는 사고로 자동적으로  연결되었다. 즉, 그 전에도 자유당 정권이 가졌던 부도덕성에 대한 사전 지식이 있는 상황에서 일요등교를 지시하니 '이게 그런  문제구나' 하고 전 학생들에게 인식이 된 것이었다. 따라서 각 반마다 선생님들과, 그리고 선생님들이 없을 때에도 치열하게  등교문제를 토론하였고 '이것은 부당하다. 우리가 뭔가를 해야 하지 않겠는가' 의 공감대를 형성해 나갔다. 
    그러나 대구 10‧1사건과 6‧25전쟁을 겪으면서 반공이 강화되었던 당시의 시대상황에서 자기표현의 방식으로서 데모를 하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알기는 했지만 그것을 학생들이 실행을 한다는 것은 굉장한 도전이었다. 왜냐하면 자유당 정권이 일어난 이후 대구에서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반대데모를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처음에 학생들은 '가만히 있을 수 없다',  '뭔가를 하기는 해야 한다'고는 생각했으나 '데모하자'는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각 반마다 토의, 토론이 되는 과정에서  '이것은 우리가 중앙청으로 달리는 수밖에 없다. 달리 우리를 나타낼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이에 따라 학생회 임원을 중심으로 이대우, 홍종흠, 구술자, 권준하, 전하섭, 윤종명 등 학생들이 27일 저녁 이대우 군의 집에  모여 대구고와 사대부고 등의 다른 학교와의 연합데모를 계획하였다. 이날 자리에 모인 3개교 학생들은 데모 실행 이후 '암묵적으로  우리가 다 했다고 하자. 학생운영위원들이 했다고 하자. 그리고 다른 사람은 그냥 참여한 사람들이라고 해야 우리가 그들을 보호를 해  줄 것이 아니냐'는 결론에 도달했다. 
    다음날인 2월 28일 교정을 박차고 거리로 진출해 데모를 감행함에 있어 경북고 학생들의 가장 큰 고민은 만약 선생님들이 이를  저지할 시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문제였다. 따라서 학생들은 선생님들이 교무회의를 하고 나오기 전에 교정 밖으로 진출하기로  결의하였다. 
    28일 당일 학교로 등교한 800여 명의 학생들은 이대우의 결의문 낭독이 끝나자마자 '반월당으로 가자'는 외침에 교정을 박차고  나왔다. 학생들은 누구 할 것 없이 삼덕우체국을 지나서 대구상고에서 학생들의 동참을 호소한 뒤 반월당으로 갔고 시내의 대구매일  신문사에 들러 일요등교의 부당함을 전했다. 이후 학생들은 도청으로 진출하였고 그곳에서 구술자는 일요등교의 부당함을 성토하였고  열화와 같은 학생들의 응원을 받았다. 그때부터 경찰이 풀리기 시작했고 학생들은 사분오열되었다. 
    이후 경찰에 연행된 구술자는 경찰 취조실에서 '배후가 누구냐, 누가 뒤에서 시켰느냐, 누구와 이런 일을 했느냐', '선생님들 가운데 누가 시킨 사람 없느냐' 등의 취조를 받았고 선무방송을 한 이후에 귀가조치되었다. 
    이후 학교로 돌아온 학생들은 다친 사람이 없고 연행된 사람도 없음을 확인하고 안도했다. 그리고 학생들의 마음에는 자랑스러운 마음이  생겼는데 학생들의 이기적인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문제로 한 것에 대해 시민들이 박수를 쳐 주고 신문에서 학생들을 옹호해 주었기  때문이다. 이후 경북고의 학생들은 4월혁명으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선생님들의 교원노조운동에 동조하여 단식농성을 하였다.  
    구술자는 2‧28대구민주화운동이 기존 질서에 대해 최초로 항거한 것이었다고 말하는데 당시 권위 사회가 가지고 있었던 부조리와  부정적이고 기득권을 지키려는 사람들이 극에 달했던 상황에서 학생들이 그들 집단의 사적인 이익이 아니라 공적인 이유로 거리로  뛰쳐나왔음에 큰 자부심을 느꼈다. 
    2‧28대구민주화운동의 현대적 의미 및 지향점에 대해서 구술자는 당시에도 그렇고 그 후에도 그러한데, 사회 부정의에 항거한다는  것이 파괴를 전제로 하였는데 이제는 창조적인 부문을 먼저 생각해야하며 따라서 2‧28대구민주화운동은 무언가를 창조하는 따듯함을  구현해내야 할 것이라고 말한다. 




    5. 참고자료

    2‧28민주운동기념사업회, 『횃불』 10-1, 2010.
    2‧28민주운동기념사업회, 『2‧28민주운동』, 신문사, 2010.
    2‧28 민주의거 40주년 특별기념사업회, 『2‧28민주운동사』 Ⅰ‧Ⅱ‧Ⅲ, 경북인쇄, 2000.
    채장수, 「2‧28 대구민주운동의 의미론: '민주화'의 성격을 중심으로」, 『대한정치학회보』 11-3, 2004.
    이대우, 「2‧28 민주의거의 세계학생운동사에서의 위상」, 미상, 미상.
    서태영, 「'2‧28'을 청년학생의 품으로…」,『온장』1호,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대구지회, 2005.
    《대구신문》(www.idaegu.co.kr), <2‧28 민주운동의 역사적 의의>(입력시간: 2010-02-25)
    《대구신문》(www.idaegu.co.kr), <자유와 정의 외치며 민족혼 일깨워>(입력시간: 2010-0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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