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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명철

구술자소개

구술자
박명철
면담자
채장수, 이신용
구술일자
2010년7월 12일
장소
대구 2‧28민주운동기념사업회 사무실
구술시간
1시간 27분 30초
구술아카이브 > 4.19혁명 > 대구 관련 구술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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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내용 요약

1960년 2월 28일 발생한 2‧28대구민주화운동의 참여자들 가운데 당시 대구공고 학생이었던 박명철의 인터뷰를 통해서  2‧28직전 대구지역의 여당(자유당)에 대한 민심과 학생들의 눈에 비춰진 당시의 사회상을 여실히 알 수 있었다. 당시 대구지역은  야도(野都)라 불릴 만큼 여당이었던 자유당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았던 상황이었다. 이러한 지역사회의 분위기는 비록 구체적으로  당시의 시대적 문제를 인식할 수 없었던 대구지역 주민들, 특히 학생들에게도 전이되었다. 즉 당시 학생들은 자유당의 지배에 대해  막연하나마 정의롭지 못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학생이라는 신분적 제약과 경험의 부재로 인해 그러한 불만을 외부적으로 표출하지  못하고 있었다.  
당시 구술자를 비롯해 대구지역의 고등학생들은 대한적십자반 회원으로 방학 때 농활과 다양한 봉사활동에 참여하면서 주변 어른들한테서  "이승만 정권한테 얘기를 잘못하면 빨갱이로 몰리니 학생들도 말조심해라"는 얘기를 자주 들었고, 학생들끼리 "만날 학생들 억압만  하고 거짓말만 한다, 농민들의 어려움은 외면한다", "이놈의 세상, 무조건 야당인 민주당이 해야 한다"는 얘기를 자주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당시 대구공고의 학생들은 학교당국의 일요등교 지시, 즉 일제고사의 실시와 노래자랑의 명목으로 일요등교를 감행한 학교당국의 처사에 대응해 불만을 외부적으로 표출시켰고 이것이 2‧28로 이어진 것이다. 
대구공고의 학생들은 일요등교 지시의 부당함을 알리고자 학생회를 동원하여 교장선생님과의 면담을 요청하였으나 교무과장의 저지와  정학이라는 엄포에 가로막혀 그들의 정당한 의견을 주장할 기회를 박탈당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경북고 학생들의 데모 소식을 접하였고  이에 합세하였다. 
대구공고는 28일의 일요등교를 27일에 지시함에 따라 학생들이 사전에 모의를 한다거나 준비계획을 한다는 등의 조직적이고 집단적인  데모의 준비를 할 수 없었다. 따라서 일요등교 당일 불만이 팽배한 상황에서 타 학교의 데모 소식을 접한 대구공고의 150여 명의  학생들이 이에 합세하기 위해 교정을 박차고 나왔다. 
교정을 뛰쳐나간 이후 이들은 구 신도극장 앞[현재 칠성교] 파출소 근방에서 곤봉을 든 경관들의 저지를 당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구술자는 집으로 귀가하였는데 경찰에게 얻어맞는 친구도 있었다는 것을 증언했다. 집에 귀가한 이후인 오후 1시 경에 멀리서  공포탄 소리와 경찰 사이렌 소리가 들려 구술자는 소리 나는 쪽으로 가보았고 그곳에서 경북고 학생들이 스크럼을 짜고 뛰면서  시가행진을 하고 있던 것을 목격하였다. 
2‧28 이후 3월 2일 학교에 등교해 보니 데모를 못하게 한다고 시국강연의 정신교육을 끊임없이 했고 그 내용은 "나라에 충성하고 뭉쳐야 한다", "조국에 대해 비방하지 마라"는 내용의 시국강연을 통해 정신교육을 시켰다.
이후 4‧19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전 국민을 비롯해 대구지역의 주민들은 언론매체를 통해 마산의 김주열 사건을 알게 되었고 특히  구술자를 포함한 대구지역의 시민 및 학생들은 "우리 언론도 살아있구나", "때는 지금이다"하며 학교를 마치고 밤새도록 데모를  했다. 구체적으로 구술자의 경험에 따르면 당시 학생들은 까까머리인 까닭에 교복은 안 입어도 교모는 썼는데 방과 후 시내에 나가보니  타교 학생들[대구고, 경북고]이 스크럼을 짜는 것이 아니라 '읏샤! 읏샤' 하며 시내를 뛰어다녔다. 
당시 가장 타겟이 됐던 것이 국회의원도 했던 신도환이었는데, 그는 대한반공청년단단장으로 자유당 정권의 제일 앞잡이로 인식되어  있었다. 당시 반공이 국시였고 학생들을 상대로 반공교육을 많이 시켰는데 이를 신도환이 주도했고 따라서 자유당 정권의 앞잡이가  신도환이라는 걸 학생들도 다 알고 있었다. 
당시 그는 대구 시내[매일신문사 옆 진골목 안]에 살았는데 시민들과 학생들로 구성된 데모대가 "신도환이 집에 쳐들어 가자"며  외치자 사람들은 쳐들어갔고 구술자가 신발을 신은 채로 뛰어 들어가서 신도환의 다락을 열어보자 값비싼 일본 고급 접시가 꽉 차  있었고 구술자는 이 사람들이 생활을 위해 그것들을 쌓아놓은 것은 아니라고 생각함에 따라 이를 내팽개치자 사람들이 우레같이 달려들어  집을 다 부쉈다. 
그날 저녁부터 4‧19까지 대구에서 데모가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었고 당시는 경찰들도 김주열 사건 이후 걷잡을 수 없는 상황에서 이를 저지를 할 수 없었다고 말한다.  
이상의 2‧28대구민주화운동과 이후 4월혁명으로 이어졌던 당시의 일화들에 있어서 구술자는 비록 대구공고의 학생들은 학교의 거짓말에  속았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사전 계획을 하지는 못했지만 구술자는 이 점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며, 고종 말기 국채보상운동을  비롯하여 IMF 당시 금모으기 운동 등의 구국의 정신, 민족의 정신이 바로 대구의 정신이고 이것이 2‧28의 민주정신과 맥락을  같이 한다고 생각했다. 

5. 참고자료

2‧28민주운동기념사업회, 『횃불』 10-1, 2010.
2‧28민주운동기념사업회, 『2‧28민주운동』, 신문사, 2010.
2‧28 민주의거 40주년 특별기념사업회, 『2‧28민주운동사』 Ⅰ‧Ⅱ‧Ⅲ, 경북인쇄, 2000.
채장수, 「2‧28 대구민주운동의 의미론: '민주화'의 성격을 중심으로」, 『대한정치학회보』 11-3, 2004.
이대우, 「2‧28 민주의거의 세계학생운동사에서의 위상」, 미상, 미상.
서태영, 「'2‧28'을 청년학생의 품으로…」,『온장』1호,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대구지회, 2005.
《대구신문》(www.idaegu.co.kr), <2‧28 민주운동의 역사적 의의>(입력시간: 2010-02-25)
《대구신문》(www.idaegu.co.kr), <자유와 정의 외치며 민족혼 일깨워>(입력시간: 2010-02-25)

구술상세목록 및 녹취문

  • 2010_4월혁명50주년_박명철(대구)_구술자료상세목록.pdf 69173K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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