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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유보
구술채록 정보
- 구술자
- 성유보
- 면담자
- 채장수, 이신용
- 구술일자
- 2010년 8월 16일
- 구술장소
- 경기도 일산 구술자의 연구실
- 구술시간
- 1시간 27분 40초
구술컬렉션 > 4.19혁명 > 대구
관련 구술아카이브
구술채록 내용
- 구술자 이력
- 1943년 출생 1958년 경북고등학교 입학 1960년 2‧28 시위 참여
- 구술내용 요약
-
1943년 경산에서 농사꾼의 8남매 가운데 셋째 아들로 태어난 구술자는 초등학교 2학년 때 6‧25를 겪었고 당시 그가 다니던 경산초등학교를 미군이 차지함에 따라 일본인이 지은 담배창고를 교실로 이용하는 등 열악한 환경 속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고 경북중학교를 거쳐 경북고등학교에 입학하였다. 구술자의 작은 아버지가 대구에 거주하였던 까닭에 어린 시절부터 객지생활을 하게 되었다. 경북고등학교에 입학할 당시 대구는 야도라고 해서 특히 이승만 정권에 대해 굉장히 비판적인 정서가 강했다고 한다. 구술자는 아직 어렸던 까닭에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분위기에 영향을 받았고 당시 삼촌이 동아일보를 구독함에 따라 반이승만 정서가 강했음을 체감하였다.그러한 가운데 구술자를 포함해 당시 경북고 학생들은 책을 많이 읽었고 그에 따라 소양이 높았다고 말한다. 2월 25일, 원래 3월 3일에 치르기로 예정되어 있던 시험을 28일 일요일에 당겨서 치니 등교하라는 학교당국의 지시가 내려졌고 학생들은 그것이 일요일 야당유세에 가지 못하게 하려는 속셈임을 알게 됨에 따라 26일부터 학교는 반마다 토론회를 하는 등 불만이 공유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학생들은 '학생회가 왜 가만히 있느냐! 너희들이 가서 못 온다고[등교를 못한다고] 해야 할 것 아니냐'는 이야기들이 나왔고 이에 따라 이대우를 위시한 학생회에서 학생성원들을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구술자는 이 대목에서 이대우를 굉장히 높이 평가하였는데, 이대우는 진보당의 상주의 면책임자였던 아버지의 정치적 영향을 받았는데 선거유세 때마다 참석을 하는 등 당시 나이 어렸음에도 불구하고 여타 학생들과 달리 정치적인 면에서 앞서 나갔다. 더욱이 이대우가 당시 학생회 부위원장임에 따라 학생들의 열망을 모아 공식적으로 항의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이것이 2‧28대구민주화운동을 계획한 배경이었다.또한 구술자는 학생들의 불만에 대한 학교당국의 미숙한 처리가 학생들의 불만과 저항을 더욱 증폭시켰다고 말하면서 당시 담임선생님이었던 안호영 선생님과 김윤식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동조하고 힘을 주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특히 김윤 선생님은 "희들 소신대로 해라. 못 말렸다고 책임을 물으면 나는 사표를 내지"고 했다.이러한 상황에서 27일 학생회에서 각 반장을 통해서 '일 등교를 해라' 따로 지시가 내려왔고 학생들은 당일 데모 계획은 몰랐지만 '지는 모르지만 뭔가가 있나 보다' 생각했고 28일 등교를 했다. 이후 1시 쯤 되어서 이대우가 운동장에 모여 있던 학생들을 대상으로 교단에 올라가 결의문을 낭독하였고 이 과정에서 저지하려는 선생님과 이를 막으려는 학생들 간에 충돌이 있었다. 결의문을 읽고 나서 학생들은 도지사한테 일요등교의 부당함을 따지기 위해 교정을 박차고 거리로 진출하였고 도청까지 갔다.거리로 진출 후 데모대가 도청에 갈 때까지는 경찰의 저지는 전혀 없었고 도청에 운집한 천여 명의 학생들 앞에서 이대우가 성명서를 읽고 하니 그때서야 뒤늦게 경찰들이 동원되었다. 당시 도지사가 이근직이었는데 그가 나와서 학생들한테 훈계를 하려 하였고 이 과정에서 경찰이 출동하였다. 구술자는 경찰에게 잡혀 도청 강당으로 끌려갔고 거기에 한 50여 명의 경북고 학생과 함께 잡혀 있었다. 학생들이었던 까닭에 구술자를 포함한 여타 학생들은 저녁에 훈방조치되었고 선생님들의 인도하에 다시 학교로 돌아갔다.이후 학교에서 데모 참여자들에 대한 어떠한 처벌도 없었다. 그러나 이대우는 3월 들어 3월 15일까지 여러 고등학교가 시위를 하는 등 고등학생들이 다시 술렁거리기 시작함에 따라 경찰이 학교를 찾아와서 학교장의 동의하에 데리고 가버렸다. 구술자는 이를 납치라 표현하였는데 경찰이 포항을 비롯해 여러 곳으로 이대우를 데리고 다녔다고 진술하였다.경북고의 경우 2‧28대구민주화운동 이후 선생님들의 교원노조운동에 동조하여 단식을 하였는데 학생들은 선생님들이 조직화함으로써 불의에 앞서 올바른 목소리를 낼 것이라고 생각하였던 것이다.마지막으로 구술자는 2‧28대구민주화운동과 같은 역사적 사건은 그 사건에 직접 참여하는 사람도 물론이고 목격을 하는 사람도 영향을 받는데, 구술자의 경우 이승만 정권의 4월혁명을 겪으면서 '한국의 제 일차적인 과제는 사회의 민주화다'는 생각을 품게 되었고 이후 한국의 민주화운동에 투신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말한다.5. 참고자료2‧28민주운동기념사업회, 『횃불』 10-1, 2010.2‧28민주운동기념사업회, 『2‧28민주운동』, 신문사, 2010.2‧28 민주의거 40주년 특별기념사업회, 『2‧28민주운동사』 Ⅰ‧Ⅱ‧Ⅲ, 경북인쇄, 2000.채장수, 「2‧28 대구민주운동의 의미론: '민주화'의 성격을 중심으로」, 『대한정치학회보』 11-3, 2004.이대우, 「2‧28 민주의거의 세계학생운동사에서의 위상」, 미상, 미상.서태영, 「'2‧28'을 청년학생의 품으로…」,『온장』1호,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대구지회, 2005.《대구신문》(www.idaegu.co.kr), <2‧28 민주운동의 역사적 의의>(입력시간: 2010-02-25)《대구신문》(www.idaegu.co.kr), <자유와 정의 외치며 민족혼 일깨워>(입력시간: 2010-02-25)
- 하이라이트 영상 내용
- 구술상세목록 및 녹취문
- 2010_4월혁명50주년_성유보(대구)_구술자료상세목록.pdf 65859K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