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술 컬렉션
구술컬렉션
4.19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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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병웅구술자 강병웅은 1941년 9월 29일 충북 보은군 해동면 용군리에서 태어났다. 4‧19 당시에는 청주농고 3학년생으로 학도호국단 간부는 아니었다.4‧19 당시는 3‧15 부정선거로 얼룩진 혼탁한 사회 분위기였고 마산 김주열 학생의 죽음이 고교생들에 대한 저항의식을 불러 일으켰다. 구술자는 당시 청주 시내에서 하숙을 하고 있었는데 주변에 다른 학교 학생들도 같이 있었다. 2월 28일 대구 경북고등학교, 경북대 사대부속고등학교, 경북여자고등학교 등 학생들의 시위를 시작으로 전국의 수많은 고등학생들이 시위에 참여했고 '자유당 독재는 물러가라', '3‧15 부정선거 다시 하라' 등의 외침이 전국 방방곡곡에서 하늘을 뚫었고 이로 인한 국민의 경악과 학생들의 분노는 폭발의 도화선이 된 것이다.당시 청주에는 청주사범학교, 청주농업고등학교, 청주고등학교, 청주상업고등학교, 청주공업고등학교, 세광고등학교, 초지여자고등학교, 일신여고, 청주기술고등학교 등등 비교적 학교가 많이 있었는데 실제로 연합시위 계획은 있었지만 성사되지는 못하였다. 그리하여 구술자는 4월 18일까지 '3‧15 부정선거를 결사반대한다', '자유당 독재는 물러나라', '이승만 대통령 하야하라' 등등의 구호를 용지에 2,000여 장 써서 가방에 넣고 4월 19일 화요일 아침에 등교하여 반 대표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 구호문은 직접 볼펜으로 쓴 것이었다.시위 때 시민들은 비교적 찬동의 눈빛을 모두어 주었지만 행동을 같이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때만 해도 살기가 힘든 시절이었고 반정부 행위에는 두려움이 뒤따랐다. 학생들에게 호응하는 것도 경우에 따라서는 반정부적 행위라고 의심을 받을 여지가 있는 것이었다.구술자는 구술자의 하숙집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던 다른 학교 학생들과의 계속적인 연계활동 특히 청주고 이내필, 지훈택, 이태진 등의 이름도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나 다른 고등학교의 시위 사실에 대해서는 거의 기억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구술자는 선봉에 서서 사회 분위기 쇄신을 도왔음을 증언하였고, 그 공로를 인정받아 63년도와 2002년도에 정부로부터 표창장을 받았다. 젊은이들에게 한마디 부탁도 잊지 않았다. 젊은이들이 좋은 면만 생각하고 좋은 꿈을 가지고 열심히 하면 꼭 꿈은 이루어지리라 생각하고 젊은이들이 그렇게 해야 이 나라도 대대로 발전이 되고 좋은 자유민주국가가 될 것이란 말이었다. 시위가 끝난 다음에 학교는 휴교령이 있었고 휴교령이 끝난 다음의 분위기는 학생들이 다시 모여 술렁거리지 않고 차분하게 공부에 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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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우정1) 개인이력과 부친으로부터의 영향1940년생인 구술자는 목사인 아버지에게 큰 영향을 받으며 유년기를 보냈다. 그 속에서 기독교적 가치관의 습득뿐 아니라 나라와 민족, 현실타협보다는 민족운동가들의 지사적 의지와 같은 가치를 더욱 중요시하게 여기며 성장할 수 있었다. 부산 피난시절의 배재중학교와 서울 수복 이후의 서울사대부고를 다니던 시절에는 교회 내 학생조직의 회장을 역임하며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를 쌓았고, 그 외에도 교회를 통한 농촌 전도활동, 친구들과의 전국 무전여행 등을 하며 농촌의 현실을 눈으로 보며 여러 경험을 쌓았다.2) 1950년대 후반 대학생활과 학우들의 의식법관이 되거나 정치계로 나가고 싶어 고려대 법대에 진학한 이후로는 고려대의 아카데믹한 분위기 속에서 다양한 학습과 여러 교수님들의 수업을 들으며 점차 고려대에 대한 애정과 자부심을 키워갔다. 또한 정경대 학생위원회에서 주최하는 모의국회 및 학교의 체육활동 등도 이를 뒷받침했다. 다른 한편으로 당시 구술자를 비롯한 주변 학우들은 정치현실에 대해 비판의 날을 세우며, 고려대생으로서 무엇인가 해야 한다는 정치적 사명감을 느끼고 있었다. 학생들은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 속에 부정부패에 대한 질타, 반감을 드러내었다.3) 법대학생위원장 선출과 학생위원회 활동정경대가 주최하는 모의국회에서의 활약을 계기로 1959년 11월에 법대 학생위원장으로 선출된 구술자는 학생위원회 활동에 나서게 된다. 당시 고려대에는 학도호국단 체제인 총학생위원회라는 것이 아예 존재하지 않았고, 5개 단과대학 자체의 학생위원회가 존재하였고, 다시 그 속의 5개 단과대 학생위원장들 간에 수평적인 합의체가 꾸려져 학내 활동을 주도적으로 전개하였다. 기존에는 졸업생을 위한 기념품 준비 및 학내 이슈에만 논의가 국한되다가 주변 학우들은 물론 구술자의 가족까지 고대생들이 지금 시점에서 가만히 있으면 안 된다는 주장을 접하며 점차 5개 단과대 학생위원장들 간에서도 현 시국에 대응할 방도를 고민하게 된다.4) 4‧18 고려대 시위의 배경과 시위 직전의 상황김주열의 시신이 떠오른 직후, 시위 개최 여부에 대하여 이견을 보였던 5개 단과대 학생위원장들 간에도 결국 합의가 이루어져 시위 준비가 이루어졌다. 이 소식을 들은 법대 학생위원회 후배들은 너무나 기뻐했지만, 구술자의 경우 한편으로는 4‧18 당일 감옥에 갈 경우를 대비하고 나설 정도로 두려움도 컸다.학교 당국자들은 시위 전날인 4월 17일에 구술자를 찾아와 시위 취소를 설득하려 했고, 4‧18 당일에도 학생위원장들은 이사장실에 불려가 "북한이 호시탐탐 남침의 기회를 노리고 있고, 제2의 6‧25가 난다"는 이유로 시위 중단을 요청받았다.그럼에도 구술자를 비롯한 학생위원장들은 시위 개시에 나섰고, 오히려 당일에 시위 소식을 듣게 된 다른 학우들로부터는 '왜 사전에 시위 사실을 공론화시켜 준비를 철저히 하게끔 하지 못 했나'라는 원망을 들어야 하기도 했다. 그만큼 지도부 차원에서 막상 계획은 했으나 희생은 최소화시키자는 의도 아래 철저히 준비를 하지는 못했었고, 구술자 또한 시위대가 정문을 나설 수 있을 것이라고도 생각하지 못했던 상황이었다.5) 4‧18 시위의 전개예상과는 달리 고려대생들이 막상 거리로 나서자 곳곳에 있던 경찰의 저지선은 쉽게 무너졌고 학생들은 학생위원회의 지휘가 없었음에도 자발적으로 '자유당 독재 물러가라', '자유‧정의‧진리를 드높이자' 등의 구호를 외치며 종로로 향했다. 그러나 구술자는 종로 입구에서 경찰에 연행되었다가 오후에야 유진오 총장에 의해 풀려날 수 있었다. 종로서에서 풀려난 직후 구술자는 학우들이 연좌시위를 벌이고 있던 국회의사당 앞으로 갔다. 구술자는 석방소식을 전하며 학우들의 해산을 호소했으나, 학생들은 그 말을 듣지 않고 시위를 계속하다가 '너희들이 공격을 당할 가능성이 있으니까, 오늘은 일단 물러나라'라는 선배 이철승 의원의 설득 이후에야 대열을 정비해 고려대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이후 천일백화점 앞의 깡패 습격에 의해 구술자도 가격을 당했으나, 다른 학생들과 함께 결국 고려대까지 와서 해산하였다.6) 4‧19 이후 상황에 대한 구술자의 경험4‧18 시위가 끝난 직후 구술자는 시위 주도자인 법대 학생위원장이라는 이유로 체포될 것을 염려하여 친척집에 피신하게 된다. 구술자는 20일 가까운 기간 동안 피신을 계속하였고 이승만 하야가 발표된 이후에야 학교에 복귀할 수 있었다.학교 복귀 후 구술자는 다른 고대생들과 함께 며칠 동안 사회의 치안유지 활동을 전개하였다. 특히 구술자는 경찰이 무력화된 상황에서 중부경찰서를 접수하고 서장 역할을 했다. 하지만 구술자는 그 직후 현 정국에서 학생들이 할 일은 끝났다는 생각에 수업 정상화를 위해 노력하고, 학업에 치중하였다.7) 4‧18 고려대 시위에 대한 평가4월18일 고려대학교 시위 자체가 학생위원회나 일부 주도자에 의해 지휘되고 이끌어졌던 것이 아니라, 당시 학생들의 마음과 마음이 합해서 한군데로 흘러갔던 고려대 학생 전체의 운동이었다. 그 운동을 뒤에서 밀어준 것은 국민 전체의 여망과 도움이었다. 무엇보다 당시 민주화운동은 고려대의 4‧18로 인해 시작되었다는 점에서 고려대와 고려대 학생들의 의의가 있다.5. 참고자료고대신문사, 『고대신문 축쇄판 』2권, 1985.고대신문사, 『고대신문 축쇄판 』3권, 1985.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연구소 엮음. 『한국민주화운동사 I - 제 1공화국부터 제 3공화국까지』돌베개, 2008.고려대학교 한국사연구소, 『4‧18 고대행동과 4월혁명을 통해 조망하는 21세기-4월혁명 50주년 기념학술대회』, 고려대학교 한국사연구소, 2010.고려대출판부. 『고려대학교 100년사- 고려대학교 학생운동사』,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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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재식주 구술자인 강재식은 1939년 신안군(구 무안군)에서 태어나 다소 유복한 환경에서 성장하였다. 구술자는 고등학교에 입학하여 재학 중 폐결핵을 앓아 약 2년간 학업을 중단하고 치료 후 명지고등학교에 입학한 관계로 당시 동료들에 비해 나이가 많은 편에 속하였다. 구술자는 2001년부터 2004년까지, 2004년부터 2007년까지 4‧19민주혁명회 회장으로 활동하고, 현재는 4‧19민주혁명회 복지사업단 대표이사로 재직 중이다. 차례로 구술에 결합한 이근진, 이강수는 당시 명지고 재학 중 4월혁명에 참여한 경험을 가지고 있는 분들로 이근진은 제16대 국회의원을 역임하였고, 이강수는 현재 서대문 문인협회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4월혁명을 전후한 당시의 정치적 분위기는 이심전심으로 시위에 참여하는 분위기였다. 명지고에서 시위 참여를 주도한 학생들은 최인두, 장철, 이강수, 김도연, 오영길 등으로 기억한다. 이들은 강재식, 이근진와도 서로 절친한 사이였다고 한다.당시 명지고의 시위 참여는 교사들이 교문을 막고 있는 상황이어서 뒷문으로 빠져 나가 남산을 내려가 퇴계로를 거쳐 시청 앞으로 이어졌다. 여기까지는 시위 대열을 유지하며 왔으나, 시청 인근에서 시위대의 인파가 인산인해를 이루게 되자 명지고 시위대는 일부는 경무대 앞, 일부는 광화문 일대, 서대문 일대로 흩어져 시위를 전개한다. 구술에 참여한 3분도 각각 경무대 앞, 광화문 앞, 서대문 이기붕 사저 앞 등 각자 다른 공간에서 4월혁명에 참여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이근진은 경무대 앞에서 총격의 현장을 목격하였고, 강재식은 광화문 인근에서 전차를 앞세우고 시위를 전개하던 중 허벅지와 머리에 두발의 총상을 입어 병원으로 후송되었다. 이근진은 서대문 근처 이기붕 사저에서 시위에 참여하였는데 동대문경찰서 인근의 총격 현장을 목격하기도 하였다. 이들은 이 과정에서 "부정선거 다시 하라", "이기붕은 물러가라"는 구호를 외쳤던 것으로 기억한다.명지고의 순국자는 4월혁명 직후부터 한참동안 알려지지 않았다. 2009년에 순국자를 기리는 기념탑을 학교에 건립하여 세분의 순국자를 기리고 있다. 명지고의 순국자는 김종진, 황규직, 신경제로 확인된다. 명지고는 4월혁명 이후 당시 순국자, 부상자 등에 대해 소상히 알 수 없었다고 한다. 당시 부모가 없는 학생도 있고 해서, 어떤 연유로 학교에 못나오게 되었는지 확인되지 않았다.명지고 4월혁명 참여자 3분은 공통적으로 4월혁명 직후 다음날부터 정상적으로 학교에 등교하였다고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당시 계엄령 하에서 학교에 등교할 수 없었던 상황임을 감안해 보면 사실관계의 확인이 필요한 대목이다.4월혁명 상이자로 민주혁명회 회장을 역임한 강재식은 국가 차원의 위무작업이 보다 적극적으로 진행될 필요가 있음을 주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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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창덕
- 통일운동에 관계하는 근황
- 유년 시절의 가정환경과 생장 과정
- 식량검사소 근무와 고학
- 항일투쟁 이야기로 경찰서 구속, 구류생활
- 8.15 해방
- 단선단정반대웅변대회 참가와 우익단체의 테러만행
- 대구 10월항쟁
- 2.7 투쟁
- 한국전쟁 당시 상황
- 경산 진량중고등학교 교사
- 진보당 입당, 대통령선거운동 참가
- 영남일보사 기자
- 대구매일 정치부 기자로 입사, 대통령선거의 각종 부정행위 목격
- 경산피학살자유족회 조직, 피해상황조사, 위령사업 활동
- 혁신운동 투신, 사회대중당에 입당
- 1967~1968년 대통령선거 시 대구에서 반박통일전선 구축 활동
- 소위 남조선해방전략당사건
- 민주수호국민협의회 조직, 반박정희활동
- 반유신활동
- 소위 인민혁명당재건위원회사건
- 1987년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 재건
- 반노태우 반부시 투쟁
- 민족자주평화통일중앙회의를 대표하여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에 참가
- 신민주연합당 활동, 최근 열린우리당 활동
- 박정희 관련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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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혜자구술자 강혜자의 고향은 충북 음성이다. 아버지가 석산 일로 전주로 이사를 오면서 전주에서 전주여고를 다니게 되었다. 고등학교 당시 문예부 활동을 하면서 『거울』이라는 학교 교지를 만드는데 일을 많이 했다. 그리고 학교 대표로 배구 선수 활동도 했다. 4월혁명이 있던 시기에 구술자는 고등학교 3학년이었다. 3‧15 부정선거가 있기 하루, 이틀 전에 민주당에서 한창 운동을 하고 계시던 의원의 아들 집에 모여 선거함을 때려 부수자는 모의를 했다. 당시 모의를 같이 했던 학교들은 신흥고, 전주공고, 전주고, 전주여고, 사범학교 등 20명쯤 되었던 것 같은데, 전주고생이 네댓 명으로 제일 많았고, 전주여고는 구술자와 다른 한 친구 두 명이 참여했었다. 들키지 않으려고 신발을 커다란 가마솥에 집어넣었지만, 결국 어떻게 된 일인지 발각이 되어 14일 밤 집에서 경찰 백차에 실려 연행되고 말았다. 경찰서에 갔더니 잡혀간 학생이 굉장히 많았다. 경찰서에서 계속 문초를 당했으나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여학생은 맞지 않았지만 남학생은 맞기도 했다. 그렇게 경찰서에서 나온 후에는 교장 선생님 댁에 감금되어 4, 5일 정도를 보냈다. 구술자는 어떻게 하여 의원 아들 집에 모이게 되었는지, 누구에게 연락을 받았는지 그런 것은 잘 기억하지 못하지만 그 아들이 송(광우)씨였던 것만 기억하고 있다. 그 당시 구술자와 둘도 없이 친하게 지냈던 친구가 장면 박사와 친분이 있는 분 딸이었는데, 하루는 선생이 구술자를 불러 그 친구와 지내지 말라고 했다. 그렇지만 구술자는 학교가 이렇게까지 해야 하냐며 막 대들었다. 그 때 구술자의 집은 중앙동이었고, 그 송씨 의원 집은 다가동이었던 것 같다. 구술자는 3‧15 선거 방해 모의를 같이 했던 친구들과는 계속 연락하고 지내면서 '여명동지회'를 조직하고 시내 조기청소도 하고 고아원도 방문하는 봉사활동을 하고 다녔다. 그게 4월혁명 이전이었는지, 이후였는지는 기억이 안 나지만 아무튼 계속 연락을 하며 지냈던 것 같다. 4월 시위는 서울보다 하루 늦었을 게다. 구술자는 친구들과 도청 광장에 모여서 당시 도지사인 박정권 나오라고 소리 지르고, 유리에다 돌 던지고 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시위 시각은 아주 일찍도 아니고, 오후도 아니고, 10시나 11시쯤이었던 것으로 막연하게 기억하고 있으며, 시내를 돌아다녔는지, 안 돌아다녔는지도 생각이 잘 안 난다고 했다. 4월혁명에 대해서는 기억이 별로 없다. 4월혁명 이후 4‧19에 대해 시화전도 하고, 시낭독회도 하고 그랬다. 시내 조기청소도 계속 했다. 4월혁명 이후에는 학교 내에서 여당 쪽 활동을 했던 교사들 퇴진 운동도 했었는데, 강당에 전교생이 모여 교사와 교장 선생 물러나라고 농성을 했다. 구술자는 그 분들도 직업이 있고, 가족도 있는데, 학생들이 용서를 해줘야 한다고 설득을 하러 다녔다. 그래서 그렇게 무마가 되고 교장 선생만 남중학교인가, 그 쪽으로 발령을 갔다. 4월 시위를 위해 대학생과 연락을 하거나 상의를 하거나 그러지 않았다. 시위에 참여하면서 전대열 등 대학생들과 알고 지냈지만, 조직적인 연락망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전주고 학생들은 전북대생과 그랬는지는 몰라도 전주여고는 하지 않았다. 구술자는 4월혁명이 대학생이 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전국적으로도 그렇고 전주도 그렇고 전부 고등학생들이었다. 대학생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이승만 하야 후 학교 내 '여명동지회' 활동을 하면서 보육원 가서 애들 봐주고, 음식 만들어주는 등의 일을 했다. 구술자는 별다른 정치적인 활동은 하지 않고, 졸업을 한 후 대학에도 들어가지 않고, '삼남일보'라는 곳에 타이피스트로 취직을 한 후 63년도인가, 65년도까지 일하다 그냥 결혼했다. 5‧16이 있던 때도 학생들이 다시 만나자, 그런 활동에 대해서는 전혀 들은 바도 없다. 친구들도 대학교에 가거나, 서울에 가 버리고, 이후 연락이 자연스럽게 끊어졌다. 결혼 이후에는 아이들 키우고 살면서 4‧19에 대해서 생각해보고 그런 적이 없었기 때문에 별다른 기억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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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시홍구술자는 1958년 서울 교통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재수한 뒤 1959년 4월 제주대학교에 입학하였다. 1960년 3월 자유당이 장기집권을 기도하는 부정선거를 통한 정‧부통령 선거를 자행할 당시 제주대학 법학과 2학년이었다.1960년에 접어들자 부정선거 공작(3인조, 5인조 선거 등)에 관한 유언비어가 나돌았다. 《제주신보》 등 신문 기사를 통해서도 부정선거의 정보가 알려졌다. 1960년 2월 겨울방학 기간에 법학과 학생들을 중심으로 부정선거를 비판하는 분위기가 조성되었다.전국적으로 4월 18일부터 대규모 시위가 전개되고 있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제주도에서도 제주시내 고등학생 대표들과 연계하여 시위를 전개할 것을 모의하였다. 고등학생들과의 연결은 1958년과 1959년 두 해에 걸쳐 제주대학 법학과가 주최하는 세계인권선언기념식 행사에 고등학생들이 참여한 것을 인연으로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4월 20일 아침 10시 30분에 제주대학생 30~40명이 대학 강의실에 모여서 시위를 전개할 것을 결의했으나, 교직원들과 경찰의 만류로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4월 27일 밤에 학생, 시민 등 천여 명이 제주시 관덕정 광장에 모여서 집회를 전개하였다. 당시 고등학생 대표들은 제주대학 학도호국단 산하 농촌계몽단이 부정선거에 협조했다는 이유로 '제주대학 물러가라'는 구호를 외치는 등 대학생들에 대한 불신이 팽배했다. 이때 집회 군중 앞에 구술자가 나서서 혈서를 쓰며 '기성세대 물러가라'고 외치자, 고등학생들이 제주대학들의 시위에 동참하게 되었다.당시 제주도 시위에는 서울에서 시위를 치르고 귀향한 강경선(서울대), 강영석(중앙대), 고태호(연세대), 양영식(고려대) 등 재경 유학생들도 동참하였다.5월 초에는 법학과 선배 이문교 등과 더불어 '4‧3진상규명동지회'를 조직하여 4‧3진상규명운동을 전개하였다. 제주대학생을 중심으로 '한국통일문제연구회'를 결성하여 통일방안 공청회(1960. 11. 13, 제주시 중앙극장)를 열어 통일운동을 전개하였다.5‧16이 일어나서 수배령이 내렸는데, 구술자는 제주대학 법학과를 휴학하고 동국대에 입학한 때여서 검거를 피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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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석종공석종은 1960년도 당시 전북대 문리과대학 4학년이었으며, 주로 문리대 화학과 내에서만 활동을 했다. 1959년도 아마도 전국의 학생회 총회장을 대상으로 필리핀 관광을 시키려고 했던 것 같은데 무산된 것 같다. 김용화(당시 총학생위원장)는 4‧19 이전부터 서울지역 학생회 활동 학생들로부터 서울 상황을 전해들은 것 같다. 김용화가 서울 상황을 듣고 우리도 준비해야 하는 것 아닌가 라고 했다. 4‧19가 일어나기 전부터 경찰이 감시하기 시작했다. 구술자는 주로 고사동 삼양다방에서 은거했다. 4‧20 전주 시위로 유치장에 갇힌 사람만 300-400명 가량 되었다. 학생들은 유치장 밥을 먹을 수 없다고 불평하여, 전주 시내 빵집 세 곳을 돌아다니면서 빵을 싸게 얻어 유치장에 갇힌 학생들에게 먹이기도 했고, 노송동 형무소에 솥단지를 걸어놓고, 설렁탕을 만들어 그 곳에 갇힌 학생들에게 먹인 기억이 있다. 시위 자금으로 총장, 부총장 판공비가 일부 들어갔고, 양계장을 하는 총무과장이 사비를 털어 도와주기도 했다. 시위 이후, 전북대에서 학생회 15명 정도 2박 3일 제주도를 보내줬는데, 구술자는 당시 제주도 가서 있었던 일들이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시위에 참여한 중고생 학생과 어떻게 선이 닿았는지를 설명하기는 좀 어렵다. 시위대 조직은 이미 김용화를 학생회장으로 만들기 시작하면서부터 가능할 수 있었다. 또 당시 전주 육군병원인 98병원의 간호장교가 뒤늦게 국문과에 다녔는데, 그 여장교를 포섭하니 자연스럽게 여장교를 중심으로 학생이 동원되었다. 그리고 전주고라는 학연을 통해서도 가능했다. 김용화가 회장에 당선된 것은 1959년인데, 이미 1958년부터 서울 쪽 학생들과 관계를 맺고 있었던 듯하다. 김용화 집은 부유했고 전화도 있었으니까 말이다. 4‧20 시위 당시 전북대에서 정문이 막히자 이씨왕릉 방향과 종합운동장 방향 뽕나무밭으로 빠져 나갔다. 한꺼번에 나가면 데모 나가는 것으로 아니까 몇 시 어디에서 만자자고 해놓고 두 세 사람씩 빠져 나가는 식으로 했다. 집결 장소는 처음부터 중앙성당 앞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전북대에서 했었으면 아예 나올 수 없었을 거다. 모였던 인원은 처음 3, 4백명이었는데 그 이튿날부터 점점 확산되었고, 이승만이 손 들 때까지 일주일 간 시위를 했던 걸로 기억한다. 장소가 매번 바뀌었다. 전동성당 앞에서 집합하기도 하고, 남부시장에서 완산국민학교를 넘어가는 다리 밑에 모이기도 하고, 그래서 전동 쪽으로 빠져 나가기도 하고 그랬다. '내일은 어디서 모인다'는 식으로 오더를 내렸다. '내일은 풍남문에서 하자'라는 식이었다. 구술자는 앞에서 주도하지는 않았다. 첫 날 시위는 아마 10시에 시작해서 5시까지 했던 것 같다. 최루탄 그런 것은 없었고, 학생들도 돌멩이나 화염병 그런 걸 던지지는 않았다. 서울과는 달랐다. 중‧고생 쪽 회장과 만나거나 그러지는 않았다. 1965년도 선배 형사 하나가 구술자와 관련된 중앙정보부 수사 기록이 있다고 그걸 갖다 줘서 황방산에서 한 장씩 한 장씩 불태워 버렸다. 요즘은 컴퓨터에 다 저장되어 있지만 당시 먹지 대고 쓴 것이어서 불태워 버리면 끝나는 거였다. 그 뒤로 활개치고 다녔다. 시위 후 일정은 따로 없었다. 김용화가 서울에서 2대악법인지 뭔지 하는 걸로 시위를 한 번 했었던 기억이 있을 뿐, 지방대학에서는 큰 것은 없었다. 당시 교수들도 욕을 하는 교수, 방관하는 교수, 도와주는 교수들 각각 있었는데, 고형곤 총장은 적극적으로 지지해 주었다. 총장퇴진운동을 주도했던 이들은 그 이후 회장이 된 이민수를 중심으로 한 학생들이었다. 고형곤 총장 반대파 교수들이 퇴진운동을 시킨 것이다. 이후 5개 단과대가 모두 회장이 바뀌었다.4월 시위를 조직한 것은 아마도 4월 10일 이후였던 것 같다. 김주열이 시체로 발견된 후, 우리도 가만히 있을 수 없지 않겠냐 해서 시작했으나 시발은 4월 4일이다. 3개 대학만 참가한 모임으로 출발했다. 4‧20시위를 조직한 것은 학생회 간부들이었다. 구술자는 시위 후 졸업할 때까지는 다른 활동은 전혀 안 했다. 구술자는 그 후 화학과 조교로 있다가 군대 갔다 온 후 잠시 서울에서 생활을 하다 이리에서 교사를 했다. 그 전에 유청의 국회의원 유세를 도와주고, 교육감까지 한 김영환의 일을 함께 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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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태영
어린시절 성장과정과 영향을 받은 사람들, 4월혁명 당시 상황, 4월혁명이 일어나게 된 역사적 배경,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결성과 활동,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활동으로 안기부에 끌려감, 박정희기념관 반대 활동, 4월혁명에 관한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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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양술구술자 구양술은 전라남도 보성군 노동면 학동리 출신으로 1939년생이며, 1960년 당시 조선대학교부속고등학교(조대부고) 3학년이었다. 구술자는 3‧15 선거와 관련해 이 지역에서 일어난 보성닭죽사건, 함평올빼미사건 등 당시 정치적 정세와 분위기에 대해서 구술하였다.4‧19시위 상황에 대해서는 오후 6시 동방극장에서 집결된 이후부터 소상히 들을 수 있었다. 구술자는 동방극장 앞에서 계엄령이 내려진 이후에도 시위를 계속 해 나갈 것을 모여 있는 시위대들과 결의하고 적극적으로 시위에 동참하게 된다. 시위대가 도청 방향으로 진격하면서 시위대가 광주시청에 불을 지르려고 하는 것을 구술자는 시청에 불이 나면 주변까지 위험해지므로 불을 지르면 안 된다고 시위대를 막았다고 한다. 시위대가 학동파출소에 이르자 학동파출소 소장인 김남중은 시위대에게 해산할 것을 요구했고, 시위대는 투석전으로 대항하게 된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시위대를 향해 발포가 이뤄졌고, 여기에서 한 학생이 총에 맞아 쓰러지게 된다. 이에 구술자는 주변에 있던 학생들과 함께 시신을 전대병원으로 이송하였지만 그 학생의 사망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그가 바로 광주 4‧19의 첫 번째 희생자인 故강정섭이다.구술자는 양림동파출소로 가서 시위대에 합류했고 양림동파출소를 지나 광주경찰서 쪽으로 진격하게 된다. 이때는 모든 시위대들이 운집한 상태였으며, 밤이 깊어갈수록 시위대의 열기는 높아갔다고 한다. 9시 40분경, 시위대가 광주경찰서를 에워싸자 경찰서 쪽에서 갑자기 헤드라이트가 켜지고 '쏴라, 밀어라, 공격하라'라는 소리와 함께 시위 군중들을 향해 발포가 시작되었다. 경찰의 총알을 피해 시위 군중들은 도망쳤으나, 이곳에서 7명의 사망자와 수많은 부상자들이 발생하게 된다. 구술자는 시위대 앞에 있었지만 다행히 부상을 당하지 않고 경찰의 연행을 피하기 위해 밤새 숨어 있다가 새벽녘에야 집으로 돌아갔다.구술자는 20일 전남대생들을 중심으로 전개된 시위에도 참석했다고 하나 이와 관련해서는 별다른 내용을 구술하지 않았으며, 이후 4‧19광주발포사건 재판 과정에서 참관하여 목격한 내용을 소상히 구술하였다.5. 참고자료四‧一九革命負傷者會 光州‧全羅支部 湖南 四‧一九 三十年史 編纂委員會, 『湖南 四‧一九 三十年史』, 三和文化社, 1995四‧一九革命負傷者會 光州‧全羅支部, 『湖南 四‧一九革命 資料史』上, 코리아기획인쇄, 2004홍영유, 『4월혁명통사』제8권, 도서출판 천지창조,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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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오덕구술자 권오덕은 대전시 대흥동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성장했고 대전에서 초중고등학교 대학교를 모두 다녔다.3.8 시위 당시에는 대전고등학교 1학년으로서 2학년 진급을 앞둔 시점이었다. 당시에는 TV도 없었고 방송도 듣기 힘든 상황이었지만, 집에서 구독하는 조선일보나 동아일보 등을 볼 수 있었고 잡지로서는 형이 구독하는 『사상계』를 열심히 읽기도 했다.그 당시 자유당 독재정권은 십년 동안 계속되었고 국정을 제대로 운영하지 못하고 있었으며 이러한 여러 가지 상황이 학생들로 하여금 봉기하게 된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대전고 학생들은 그 당시 수준이 높고 조숙한 학생들이어서 어리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고 충분하게 시위를 할 수 있는 입장이 되었던 것이다. 더불어 군대조직과도 같은 학도호국단 활동이 학생들을 옥죄고 학생들의 자유를 억압하는 그런 도구로 쓰였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당시 야당 대통령 후보였던 조병옥 박사가 갑자기 타계를 하고 장면 부통령 후보가 대전에 와서 유세를 한다고 하니까 학생들이 거기에 가서 유세강연을 듣고 우리의 뜻을 야당 부통령 후보에게 전달을 하고 시위를 하자고 해서 지당한 일로 생각하고 참여를 하게 되었다.대전고 3.8 시위는 진정한 학원민주화운동이고 자유당 정권의 부정부패와 독재의 항거하기 위해서 자발적으로 일어난 학생운동임을 상기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기억에 새로운 것은 학교 옆에 미군부대가 있었는데 철조망 사이로 미군 병사들이 우리들을 흥미롭게 쳐다보던 모습, 경관이 말을 타고 와서 총을 겨누고 발사하던 공포 분위기(확인 결과 그 실탄은 공포탄이었음), 바가지에 물을 타서 염산을 뿌리던 가슴 섬뜩한 광경, 몇몇 동료가 말발굽에 짓밟히던 모습, 일부 동료가 인분을 뒤집어쓰고 그래도 도망치던 모습 등이다. 아울러 숨겨주고 먹을 것도 주고 박수를 쳐주던 시민들의 환호도 잊을 수 없는 일이었다.박정희 대통령의 은사였고 경북대학교 학장을 하다 대전고로 온 박관수 교장에 대한 기억은 더욱 새로운 것이었으며 김종석 음악 선생, 김지연 사회 선생, 이재창 체육 선생을 비롯한 국어, 영어, 수학 선생 등 평소에 정의감과 불굴의 투혼정신을 심어준 훌륭한 선생님들은 진정한 멘토였다고 기억을 하고 있다.결국 3.8 시위는 마산의 3‧15와 총체적 혁명으로서의 4‧19가 있게 한 디딤돌을 놓은 것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다.특히 구술자는 3‧8민주의거기념사업회 제안자로서 그 갚진 의거의 정신을 후배들에게 유산으로 남겨야한다고 주장하며 3‧8민주의거기념사업회의 실적을 일일이 열거하고 있다. 그 내용을 집약해서 여기 수록한다.① 3‧8 민주의거 40주년 기념 학술대회 개최《20세기의 4‧19 정신과 시민의식》(2000.3.8 : 대전고등학교 총동창회)좌장 : 김용재(대전대 문과대학장)주제발표 : 박선영(동국대교수) 안성호(대전대교수) 정구종(동아일보 이사)지정토론 : 이계희(충남대교수) 김혁동(배재대교수) 김조년(한남대교수)② 3‧8민주의 41주년 기념 학술세미나 개최《3‧8민주의거와 한국의 민주화》(2001.3.8 : 3‧8민주의거기념사업회)좌장 : 김혁동(배재대교수)주제발표 : 박선영(동국대교수) 조남진(한남대교수) 정구종(동아일보 이사)지정토론 : 이계희(충남대교수) 박재목(전 한남대교수) 박광기(대전대교수)③ 『우리 고장의 역사와 문화』(2006. 대전광역시)에 3‧8의거 내용 수록이승만 정권은 1960년 3월 15일로 예정된 선거에서 이기붕을 부통령으로 당선시키기 위해 갖가지 부정을 자행하였다. 1960년 2월 28일에는 민주당 선거 유세에 학생들이 참석하지 못하도록 일요일임에도 불구하고 등교를 명령했다. 참다못한 학생들은 자유당 정권의 횡포에 반기를 들며 거리로 뛰쳐나와 경찰과 충돌했다. 그날 이후 대전에서도 대전고등학교 1, 2학년 학생 1,000여 명이 시위를 벌이다 경찰과 유혈사태를 빚었다. 이 사건은 대구 2‧28의거와 함께 3‧15의거와 4‧19혁명의 기폭제가 된 중요한 사건으로 평가받고 있다.「역사속의 대전 - 3‧8민주의거 편」④ 『대전의 역사와 문화』(2006. 대전광역시)에 3‧8의거 내용 수록6‧25전쟁 후 이승만 정권은 장기 집권을 위해 무리한 헌법 개정과 독재정치를 강화하였다. 1960년 3월의 정‧부통령 선거에서 자유당은 대대적인 부정 선거를 감행하여 정권을 연장하려 하였다. 이에 학생과 시민들이 자유당의 독재에 항거하였다. 대전에서도 3월 8일 대전고등학교 학생들이 부정선거 중단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다. 이 사건은 대구 2‧28의거와 함께 전국 학생 시위의 도화선이 된 역사적인 사건으로, 4‧19혁명의 계기가 되었다.「현대의 대전」편⑤ 『3‧8민주의거』(2005. 4x6배판 253p. 3‧8민주의거기념사업회) 발행⑥ 「3‧8민주의거 기념탑」(2006.7.14) 건립 제막⑦ 『대전사랑시선집』(2009. 대전문인총연합회)에 3‧8관련 작품수록대전고 현정탑(顯正塔) - 지헌영 <송시>3‧8민주의거 기념탑 - 김용재 <증언의 얼굴>김용재 시 - 꽃보다 더 밝은 민주의 등불김명아 시 - 삼월 정신은 4월에 꽃으로 피어⑧ 『대전사랑에세이선집』(2009. 대전문인총연합회)에 3‧8관련 작품수록이용웅 에세이 - 3‧8민주의거의 두 가지 추억이원옥 에세이 - 대전상고의 민주의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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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오봉
- 가계 및 출생, 해방공간에서의 생활, 대한방적 입사
- 대한방적노조 활동, 대구지구연합회 활동, 대구노협 활동, 4월혁명시기 활동
* 이 구술은 권오봉, 나경일의 집단구술로 진행되었으며, 하이라이트 영상은 권오봉 선생으로 선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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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오주권오주는 1941년 서울 성북구 출생으로 1960년 강문고등학교(현 용문고등학교) 야간부 3학년 재학 중에 4월혁명을 맞이하였다.4‧19 이전 강문고 학생들의 정치참여 인식은 언론(신문)과 주변인들을 통한 간접적인 정보교류와 수집이 주였다고 할 수 있다. 구술자 권오주는 당시 선거로 선출된 강문고 야간부 학생위원장을 맡아 '협심회'라는 모임체를 조직하여 고교생 시위를 주도하였다. 협심회에는 강문고 외 동북고, 양정고, 중동고, 오산고, 금명, 숭의, 동구여상 등이 참여했으며 설송웅, 김수길 등이 멤버였다. 리더는 홍충식, 설송웅, 권오주 세 사람이었다.2‧28 이전 단발적인 시위와 서울시내 고등학교(동북고 등) 개별 학생들과 연계하여 1960년 3월 12일-14일 화신백화점 앞 횃불 시위를 소규모로 주도하였다.이후 3월 5일 명동 시공간 삐라 살포를 주도하여 경찰에 연행되어 훈방되었으며 4월 11일 김주열 학생 사건과 4월 18일 고려대생 피습사건은 4월19일 시위참여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당시 강문고는 99칸이었는데 4월18일 날 학교 내 선생님들의 저지를 뚫고 교문을 나서 고려대생 피습사건 현장을 목격하였다. 당시 강문고는 창신동에 위치해 있어 고대생들이 시내로 진출하려면 대광고와 강문고를 거칠 수밖에 없었다. 을지로 천일백화점 앞에 이르렀을 때 고대생들이 갈고리에 찍혀 바닥에 피 흘리며 누워있는 것을 보았다. 고대생들을 인근 천일약국으로 옮기고 분이 안 풀려 동대문파출소에 불을 질렀다. 학교를 나설 때 전교생 2천 명 중 천 명 정도가 합류했는데 나중에는 3백 명 정도 남았다.4월 19일 강문고 시위는 4월 18일 고려대생들의 피습사건에 자극받아 자연발생적으로 발생하였다. 전날 자정이 다 되어 학교로 돌아왔지만 다음날 시위에 대해서는 별다른 계획이 없었으나 19일 아침 저절로 시위 참여 분위기가 형성되었다.4월19일 학교 밴드를 앞세워 교문을 나서 동대문을 거쳐 종로5가, 종로4가, 국민대학 앞으로 시위를 전개하였다. 종로4가 시위 도중 총격을 받아 그룹별로 이루어지던 시위대가 해산된 후 흩어져 시위대를 형성하였다. 종로4가에서는 광화문 방향이 막혀 원남동 쪽으로 가다가 보성고 , 동성고 와 합류하였다.경무대 문 앞에서 이승만 대통령과의 면담을 요구하여 시민학생대표 중 한 명으로 협심회의 설송웅이 갔는데 대표를 따로 뽑지는 않고 맨 앞줄에 있던 사람이 들어간 것이다.4월 20일 이후 계엄령 선포와 해제, 대학교수단 시국선언문에 이은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발표의 수습과정은 정치인들에게 맡기고 대다수 학생들은 본연의 임무로 돌아왔다. 당시 구술자는 1960년 5월 18일 4‧19 위령제에 참여 하여 4월혁명 수습대책에 참여하였다.4월 24일 이기붕의 사퇴 발표 다음 날인 25일에 있은 대학교수 시국선언에 대해서는 기회주의적이라는 생각을 가졌다고 증언했다. 또 4‧19 주체세력에 대해서는 고등학생이 주체다, 대학생이 주체다 하는 것은 다 부질없고 국민 전체가 봉기해 자유를 쟁취한 것이라는 평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