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술 컬렉션
구술컬렉션
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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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우정1) 개인이력과 부친으로부터의 영향1940년생인 구술자는 목사인 아버지에게 큰 영향을 받으며 유년기를 보냈다. 그 속에서 기독교적 가치관의 습득뿐 아니라 나라와 민족, 현실타협보다는 민족운동가들의 지사적 의지와 같은 가치를 더욱 중요시하게 여기며 성장할 수 있었다. 부산 피난시절의 배재중학교와 서울 수복 이후의 서울사대부고를 다니던 시절에는 교회 내 학생조직의 회장을 역임하며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를 쌓았고, 그 외에도 교회를 통한 농촌 전도활동, 친구들과의 전국 무전여행 등을 하며 농촌의 현실을 눈으로 보며 여러 경험을 쌓았다.2) 1950년대 후반 대학생활과 학우들의 의식법관이 되거나 정치계로 나가고 싶어 고려대 법대에 진학한 이후로는 고려대의 아카데믹한 분위기 속에서 다양한 학습과 여러 교수님들의 수업을 들으며 점차 고려대에 대한 애정과 자부심을 키워갔다. 또한 정경대 학생위원회에서 주최하는 모의국회 및 학교의 체육활동 등도 이를 뒷받침했다. 다른 한편으로 당시 구술자를 비롯한 주변 학우들은 정치현실에 대해 비판의 날을 세우며, 고려대생으로서 무엇인가 해야 한다는 정치적 사명감을 느끼고 있었다. 학생들은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 속에 부정부패에 대한 질타, 반감을 드러내었다.3) 법대학생위원장 선출과 학생위원회 활동정경대가 주최하는 모의국회에서의 활약을 계기로 1959년 11월에 법대 학생위원장으로 선출된 구술자는 학생위원회 활동에 나서게 된다. 당시 고려대에는 학도호국단 체제인 총학생위원회라는 것이 아예 존재하지 않았고, 5개 단과대학 자체의 학생위원회가 존재하였고, 다시 그 속의 5개 단과대 학생위원장들 간에 수평적인 합의체가 꾸려져 학내 활동을 주도적으로 전개하였다. 기존에는 졸업생을 위한 기념품 준비 및 학내 이슈에만 논의가 국한되다가 주변 학우들은 물론 구술자의 가족까지 고대생들이 지금 시점에서 가만히 있으면 안 된다는 주장을 접하며 점차 5개 단과대 학생위원장들 간에서도 현 시국에 대응할 방도를 고민하게 된다.4) 4‧18 고려대 시위의 배경과 시위 직전의 상황김주열의 시신이 떠오른 직후, 시위 개최 여부에 대하여 이견을 보였던 5개 단과대 학생위원장들 간에도 결국 합의가 이루어져 시위 준비가 이루어졌다. 이 소식을 들은 법대 학생위원회 후배들은 너무나 기뻐했지만, 구술자의 경우 한편으로는 4‧18 당일 감옥에 갈 경우를 대비하고 나설 정도로 두려움도 컸다.학교 당국자들은 시위 전날인 4월 17일에 구술자를 찾아와 시위 취소를 설득하려 했고, 4‧18 당일에도 학생위원장들은 이사장실에 불려가 "북한이 호시탐탐 남침의 기회를 노리고 있고, 제2의 6‧25가 난다"는 이유로 시위 중단을 요청받았다.그럼에도 구술자를 비롯한 학생위원장들은 시위 개시에 나섰고, 오히려 당일에 시위 소식을 듣게 된 다른 학우들로부터는 '왜 사전에 시위 사실을 공론화시켜 준비를 철저히 하게끔 하지 못 했나'라는 원망을 들어야 하기도 했다. 그만큼 지도부 차원에서 막상 계획은 했으나 희생은 최소화시키자는 의도 아래 철저히 준비를 하지는 못했었고, 구술자 또한 시위대가 정문을 나설 수 있을 것이라고도 생각하지 못했던 상황이었다.5) 4‧18 시위의 전개예상과는 달리 고려대생들이 막상 거리로 나서자 곳곳에 있던 경찰의 저지선은 쉽게 무너졌고 학생들은 학생위원회의 지휘가 없었음에도 자발적으로 '자유당 독재 물러가라', '자유‧정의‧진리를 드높이자' 등의 구호를 외치며 종로로 향했다. 그러나 구술자는 종로 입구에서 경찰에 연행되었다가 오후에야 유진오 총장에 의해 풀려날 수 있었다. 종로서에서 풀려난 직후 구술자는 학우들이 연좌시위를 벌이고 있던 국회의사당 앞으로 갔다. 구술자는 석방소식을 전하며 학우들의 해산을 호소했으나, 학생들은 그 말을 듣지 않고 시위를 계속하다가 '너희들이 공격을 당할 가능성이 있으니까, 오늘은 일단 물러나라'라는 선배 이철승 의원의 설득 이후에야 대열을 정비해 고려대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이후 천일백화점 앞의 깡패 습격에 의해 구술자도 가격을 당했으나, 다른 학생들과 함께 결국 고려대까지 와서 해산하였다.6) 4‧19 이후 상황에 대한 구술자의 경험4‧18 시위가 끝난 직후 구술자는 시위 주도자인 법대 학생위원장이라는 이유로 체포될 것을 염려하여 친척집에 피신하게 된다. 구술자는 20일 가까운 기간 동안 피신을 계속하였고 이승만 하야가 발표된 이후에야 학교에 복귀할 수 있었다.학교 복귀 후 구술자는 다른 고대생들과 함께 며칠 동안 사회의 치안유지 활동을 전개하였다. 특히 구술자는 경찰이 무력화된 상황에서 중부경찰서를 접수하고 서장 역할을 했다. 하지만 구술자는 그 직후 현 정국에서 학생들이 할 일은 끝났다는 생각에 수업 정상화를 위해 노력하고, 학업에 치중하였다.7) 4‧18 고려대 시위에 대한 평가4월18일 고려대학교 시위 자체가 학생위원회나 일부 주도자에 의해 지휘되고 이끌어졌던 것이 아니라, 당시 학생들의 마음과 마음이 합해서 한군데로 흘러갔던 고려대 학생 전체의 운동이었다. 그 운동을 뒤에서 밀어준 것은 국민 전체의 여망과 도움이었다. 무엇보다 당시 민주화운동은 고려대의 4‧18로 인해 시작되었다는 점에서 고려대와 고려대 학생들의 의의가 있다.5. 참고자료고대신문사, 『고대신문 축쇄판 』2권, 1985.고대신문사, 『고대신문 축쇄판 』3권, 1985.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연구소 엮음. 『한국민주화운동사 I - 제 1공화국부터 제 3공화국까지』돌베개, 2008.고려대학교 한국사연구소, 『4‧18 고대행동과 4월혁명을 통해 조망하는 21세기-4월혁명 50주년 기념학술대회』, 고려대학교 한국사연구소, 2010.고려대출판부. 『고려대학교 100년사- 고려대학교 학생운동사』,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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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재식주 구술자인 강재식은 1939년 신안군(구 무안군)에서 태어나 다소 유복한 환경에서 성장하였다. 구술자는 고등학교에 입학하여 재학 중 폐결핵을 앓아 약 2년간 학업을 중단하고 치료 후 명지고등학교에 입학한 관계로 당시 동료들에 비해 나이가 많은 편에 속하였다. 구술자는 2001년부터 2004년까지, 2004년부터 2007년까지 4‧19민주혁명회 회장으로 활동하고, 현재는 4‧19민주혁명회 복지사업단 대표이사로 재직 중이다. 차례로 구술에 결합한 이근진, 이강수는 당시 명지고 재학 중 4월혁명에 참여한 경험을 가지고 있는 분들로 이근진은 제16대 국회의원을 역임하였고, 이강수는 현재 서대문 문인협회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4월혁명을 전후한 당시의 정치적 분위기는 이심전심으로 시위에 참여하는 분위기였다. 명지고에서 시위 참여를 주도한 학생들은 최인두, 장철, 이강수, 김도연, 오영길 등으로 기억한다. 이들은 강재식, 이근진와도 서로 절친한 사이였다고 한다.당시 명지고의 시위 참여는 교사들이 교문을 막고 있는 상황이어서 뒷문으로 빠져 나가 남산을 내려가 퇴계로를 거쳐 시청 앞으로 이어졌다. 여기까지는 시위 대열을 유지하며 왔으나, 시청 인근에서 시위대의 인파가 인산인해를 이루게 되자 명지고 시위대는 일부는 경무대 앞, 일부는 광화문 일대, 서대문 일대로 흩어져 시위를 전개한다. 구술에 참여한 3분도 각각 경무대 앞, 광화문 앞, 서대문 이기붕 사저 앞 등 각자 다른 공간에서 4월혁명에 참여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이근진은 경무대 앞에서 총격의 현장을 목격하였고, 강재식은 광화문 인근에서 전차를 앞세우고 시위를 전개하던 중 허벅지와 머리에 두발의 총상을 입어 병원으로 후송되었다. 이근진은 서대문 근처 이기붕 사저에서 시위에 참여하였는데 동대문경찰서 인근의 총격 현장을 목격하기도 하였다. 이들은 이 과정에서 "부정선거 다시 하라", "이기붕은 물러가라"는 구호를 외쳤던 것으로 기억한다.명지고의 순국자는 4월혁명 직후부터 한참동안 알려지지 않았다. 2009년에 순국자를 기리는 기념탑을 학교에 건립하여 세분의 순국자를 기리고 있다. 명지고의 순국자는 김종진, 황규직, 신경제로 확인된다. 명지고는 4월혁명 이후 당시 순국자, 부상자 등에 대해 소상히 알 수 없었다고 한다. 당시 부모가 없는 학생도 있고 해서, 어떤 연유로 학교에 못나오게 되었는지 확인되지 않았다.명지고 4월혁명 참여자 3분은 공통적으로 4월혁명 직후 다음날부터 정상적으로 학교에 등교하였다고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당시 계엄령 하에서 학교에 등교할 수 없었던 상황임을 감안해 보면 사실관계의 확인이 필요한 대목이다.4월혁명 상이자로 민주혁명회 회장을 역임한 강재식은 국가 차원의 위무작업이 보다 적극적으로 진행될 필요가 있음을 주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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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태영
어린시절 성장과정과 영향을 받은 사람들, 4월혁명 당시 상황, 4월혁명이 일어나게 된 역사적 배경,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결성과 활동,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활동으로 안기부에 끌려감, 박정희기념관 반대 활동, 4월혁명에 관한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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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오주권오주는 1941년 서울 성북구 출생으로 1960년 강문고등학교(현 용문고등학교) 야간부 3학년 재학 중에 4월혁명을 맞이하였다.4‧19 이전 강문고 학생들의 정치참여 인식은 언론(신문)과 주변인들을 통한 간접적인 정보교류와 수집이 주였다고 할 수 있다. 구술자 권오주는 당시 선거로 선출된 강문고 야간부 학생위원장을 맡아 '협심회'라는 모임체를 조직하여 고교생 시위를 주도하였다. 협심회에는 강문고 외 동북고, 양정고, 중동고, 오산고, 금명, 숭의, 동구여상 등이 참여했으며 설송웅, 김수길 등이 멤버였다. 리더는 홍충식, 설송웅, 권오주 세 사람이었다.2‧28 이전 단발적인 시위와 서울시내 고등학교(동북고 등) 개별 학생들과 연계하여 1960년 3월 12일-14일 화신백화점 앞 횃불 시위를 소규모로 주도하였다.이후 3월 5일 명동 시공간 삐라 살포를 주도하여 경찰에 연행되어 훈방되었으며 4월 11일 김주열 학생 사건과 4월 18일 고려대생 피습사건은 4월19일 시위참여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당시 강문고는 99칸이었는데 4월18일 날 학교 내 선생님들의 저지를 뚫고 교문을 나서 고려대생 피습사건 현장을 목격하였다. 당시 강문고는 창신동에 위치해 있어 고대생들이 시내로 진출하려면 대광고와 강문고를 거칠 수밖에 없었다. 을지로 천일백화점 앞에 이르렀을 때 고대생들이 갈고리에 찍혀 바닥에 피 흘리며 누워있는 것을 보았다. 고대생들을 인근 천일약국으로 옮기고 분이 안 풀려 동대문파출소에 불을 질렀다. 학교를 나설 때 전교생 2천 명 중 천 명 정도가 합류했는데 나중에는 3백 명 정도 남았다.4월 19일 강문고 시위는 4월 18일 고려대생들의 피습사건에 자극받아 자연발생적으로 발생하였다. 전날 자정이 다 되어 학교로 돌아왔지만 다음날 시위에 대해서는 별다른 계획이 없었으나 19일 아침 저절로 시위 참여 분위기가 형성되었다.4월19일 학교 밴드를 앞세워 교문을 나서 동대문을 거쳐 종로5가, 종로4가, 국민대학 앞으로 시위를 전개하였다. 종로4가 시위 도중 총격을 받아 그룹별로 이루어지던 시위대가 해산된 후 흩어져 시위대를 형성하였다. 종로4가에서는 광화문 방향이 막혀 원남동 쪽으로 가다가 보성고 , 동성고 와 합류하였다.경무대 문 앞에서 이승만 대통령과의 면담을 요구하여 시민학생대표 중 한 명으로 협심회의 설송웅이 갔는데 대표를 따로 뽑지는 않고 맨 앞줄에 있던 사람이 들어간 것이다.4월 20일 이후 계엄령 선포와 해제, 대학교수단 시국선언문에 이은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발표의 수습과정은 정치인들에게 맡기고 대다수 학생들은 본연의 임무로 돌아왔다. 당시 구술자는 1960년 5월 18일 4‧19 위령제에 참여 하여 4월혁명 수습대책에 참여하였다.4월 24일 이기붕의 사퇴 발표 다음 날인 25일에 있은 대학교수 시국선언에 대해서는 기회주의적이라는 생각을 가졌다고 증언했다. 또 4‧19 주체세력에 대해서는 고등학생이 주체다, 대학생이 주체다 하는 것은 다 부질없고 국민 전체가 봉기해 자유를 쟁취한 것이라는 평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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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갑중구술자 김갑중은 대전 출생으로 대전서중을 나와 덕수상고 야간을 다녔다. 함께 배석한 어홍일은 서울 출생이다.4‧19 이전 덕수상고 학생들은 상업학교의 특성상 학교운영(매점, 이발소 등)에 있어 학생들의 자치 참여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는 자연히 국내 정치상황 인식을 눈 뜨게 하는 하나의 계기가 되었으며 3‧15 부정선거와 연이은 시위에 자극받아 학생들에게 자연발생적인 4‧19 시위로 이어지게 되었다.덕수상고 맞은편에 서울운동장이 있었는데 3‧15를 앞두고 '통반장 위원회의 밤' 등 행사를 하여 학교 안까지 소음이 들려와 운동장을 월담하여 '자유당 정권 무너져라' 등의 소리를 지르다 파출소에 붙잡혀 가 두들겨 맞기도 했다.또한 4‧19 이전 개별 학생들 간에 이루어진 모임은 학교 간 정보교류에 있어 촉매제 역할을 하였다. 3월 중순부터 중동, 동구여상, 강문, 동북 등 7~8개 고등학교 학생 60, 70명이 모임을 가졌고 어홍일이 대표로 참석했다. 모임장소는 수표교회였다. 수표교회 모임에는 특별한 명칭은 없었으며 '협심회'는 이 중 일부가 따로 만든 모임으로 기억한다.구술자의 기억에 따르면 당시 정보 수집을 위해 학교 내 수위실에 형사들이 상주했다.4월 19일 당일 덕수상고 시위는 학교 내 선생님(간부급)들의 제지에도 불구하고, 1교시 끝날 때쯤 찾아온 타 학교 학생의 시위참여 독려에 자극받아 덕수상고 학생(김갑중)이 학교 비상종을 울린 후 자연발생적으로 운동장에 집결하였다. 이후 강대상의 '우리는 자유당 정권을 무너뜨려야 한다' 시위 참여유도 선언 후 시위가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당시 시위전개과정을 보면 동대문 옆 '기동차 정거장'에서 재집결 후 종로 5가, 종로 4가, 국민대학 앞, 경무대까지 시위를 벌였다. 12시 경 경무대로 가는 도중에 동성고, 동국대, 서울사대생 시위대와 만났다.구술자는 이기붕 집 앞 시위상황과 당시 동양극장 옆 농협에 기관포를 거치시키고 있는 장면을 증언해 주었다.이기붕 자택 앞에 도착했을 때 군인들이 한 쪽 무릎을 꿇고 거총하고 있었다. 그 뒤 동양극장 옆 농협이 있었는데 농협에 그 기관포를 걸고 있었고 거기도 경찰들이 다 배치해가지고 그 담 위에 총을 대고 있었다. 그러나 사람들이 밀려오면서 집 앞의 경찰들과 뒤에 총 든 사람도 사라져 버렸고 마침내 이기붕 자택이 시위대에 의해 점령이 되었다.4월 20일 이후 계엄령 선포와 해제, 대학교수단 시국선언문에 이은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 성명 발표 상황을 지켜보고 구술자는 자신들의 시위가 정당했다는 데에 대해서 자긍심을 가지고 학생 본연의 임무인 면학분위기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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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강준당시 선린상고는 오랜 전통과 역사를 가지고 있는 명문 고등학교로서의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야구부, 농구부 등의 다양한 운동부와 동아리 모임이 활성화되어 있어서, 학생들 간의 연대감이 높았다. 구술자는 당시 선린상고 1학년 재학 중이었다.4‧19 이전 선린상고 학생들 즉, 당시 고등학생들이 갖는 현실정치에 대한 인식은 그다지 높지 않았다. 대통령각하 탄신 기념 글짓기 대회를 했는데 ‘이승만 대통령 머리는 서리가 맞아서 하얗다.’고 쓴 학생이 징계를 받기도 했다.신문배달과 초등학생들 과외를 했던 구술자는 학생 대부분이 담배를 피우는데 구술자만 안 피울 정도로 모범생이어서 규율부를 했다. 규율부는 3학년 선배 부원들과 얘기가 많았는데 선배들이 시켜 다른 학교 규율부와 연락을 하곤 했다. 4‧19가 지나 공무원이던 부친이 그만 두었을 때는 군수를 찾아가 항의로 혈서를 쓰기도 했다.자유당과 이기붕 일가, 그리고 3‧15 부정선거에 대한 부정적 인식만은 대부분의 선린상고 학생들이 공유했다. 특히, 4‧11 김주열 학생사건은 이러한 인식을 극도로 심화시키는 결정적 배경이 되었다. 쉬는 시간에 학생들끼리 삼삼오오 얘기를 나누었고 선생님들은 평소와 다른 움직임을 보이면 규율부를 평소보다 많이 배치하는 등 단속을 강화했다. 4‧18 고려대 시위가 알려지면서 선린상고 역시 분위기가 뒤숭숭하였다. 학생들 사이에서는 무언가 터질지도 모른다는 그리고 우리도 무언가를 해야 하지 않나하는 생각들이 팽배했다. 단속 역시 강화되었는데 구술자도 선생님 지시로 단속에 나섰다. 그때 선배들은 각 학교 서로 연락하는 것 같았다. 18일에 특별히 다음 날 행동을 준비하는 것은 없었지만 서울시 전체 휴교령이 내려지지 않을까 하는 얘기들을 하면서 다들 술렁거렸다.4월 19일 학교를 가니 휴교를 알리는 방이 붙어 있었고 문이 잠겨 있었다. 수위 아저씨에게 따달라고 해서 들어가니 운동장에 학생들이 잔뜩 모여 있었다. 8시가 채 안 되었을 때였다.9시 넘어 2천여 명의 학생들이 학교운동장에 모여서 성명을 발표하고 학교를 나갔다. 문이 잠겨 있어 담을 넘기도 했다. 교문을 나옴과 동시에 학교 주변에 있었던 당시 자유당의 거물인 한희석의 집을 쳐들어가 부수기도 했다. 지하에 내려가니 설탕이 쌀 포대처럼 지하에 천정까지 닿게 잔뜩 쌓여 있었다. 서울역으로 가자는 외침을 듣고 밖으로 나갔다. 다음은 최균환 박사 집으로 갔다. 책들만 빼곡한 집을 보고는 이런 사람은 덩달아 희생되는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원효로 입구로 나와 만리동 쪽으로 가니 경찰들이 다 도망가고 보이지 않았다. 만리동파출소를 들어가니 먼저 온 사람들이 불을 질러 집기들이 타고 있었지만 유리창을 깨고 물건을 부수고 하였다. 파출소를 나오니 아현동 고개 쪽에서 아마도 배문고 학생들로 짐작되는 학생들이 내려오고 있었다. 염천교에서 신촌에서 몰려오던 연세대와 이대 시위학생들과 합류하여 스크럼을 짜고 서울역으로 행진했다. 당시 서울역에는 곳곳에서 밀려온 수만의 학생과 시민들의 시위대가 있었다. 남대문으로 가니까 영등포공고 학생들이 소방차를 탈취해 운전을 하고 있었고 본네트 위에 부상자가 실려 있었다. 남대문 있을 때 남산 쪽에서 새카맣게 사람들이 내려오는데 용산고 학생들이라는 얘기가 있었다. 여기서 스크럼을 짜서 이동하는데 대열이 이십 명 정도 되었다. 사람이 많아지니까 시민들 호응도 커졌고 바가지에 물을 떠서 갖다 주기도 했다. 가다보니 시청이 나왔고 거기서 사람이 너무 많아 뒤로 밀려나는데 서울신문사 불타는 게 보였다. 경무대 쪽에 바리케이드 치고 경찰들이 총을 쏜다는 얘기가 들렸다.뒤에서는 밀고 앞에서는 안 가고 하니까 넘어지는 사람도 있고 했는데 총 소리가 따다다 들렸고 좀 밀리다 보니 스크럼 짰던 사람이 점점 무거워져서 살펴보니까 총을 맞았는지 피를 흘리면서 실신해 있었다.총소리와 함께 대열이 풀어졌고 주택가로 가서 대문을 두드렸으나 문을 열어주지 않아 왔던 길로 해서 되돌아오는데 세종로 쪽으로는 못 나오고 고려병원 쪽으로 해서 만리동 쪽으로 왔다. 한희석네 불 지른 것도 있고 해서 집으로는 못 갔다. 밤에 학교에 숨어 있다가 하숙집에 가니 형사인지 사복 입은 사람들이 찾아와서 시골 갔다고 그랬다는 소리를 들었다.4‧19 직후 시위주도 학생들은 피신하게 되는데, 구술자 역시 시골 고향집으로 피신하였다. 이 과정에서 시민들의 도움을 받게 되는데, 구술자는 이를 통해서 당시 시민들의 4‧19에 대한 뜨거운 지지를 알 수 있었다 한다. 4‧19 직후 선린상고의 시위 참여는 구술자의 피신으로 알 수 없다. 그러나 4‧25 대학교수 시위, 4‧26 이승만의 하야 성명을 들으면서 학생들은 자신들이 4‧19에 참여했다는 것에 대한 정당성과 자부심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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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순구술자는 1960년 4월혁명 당시 경성전기공업고등학교 3학년 재학 중이었다. 구술자는 평안남도 대동군 금제면이 고향으로 1‧4후퇴 당시 내려왔다고 한다. 구술자는 수도중학교를 거쳐 1958년 경성전기공업고등학교에 입학하여 4월혁명 당시 체육부장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당시 경성전기공업고등학교는 서울역 앞 동자동 인근에 위치하고 있었다.당시 경성공고 재학 중 4월 18일 고대생들의 피습 소식을 듣고 동료들과 우리도 무언가 역할을 해야 한다는 이야기들이 나왔다고 한다. 점심시간이 끝나고 5교시 수업 무렵인 1시 30분 경 중앙대학교 학생들의 시위 행렬을 목격하고 경성공고 학생들이 시위에 참여하게 된다. 경성공고 재학생은 약 800여 명으로 전체가 다 시위에 참여하였다. 선생님은 약 20분 이상이 시위 대열에서 학생들을 보호하기 위해 결합하였다.경성공고 학생들은 시위 대열이 워낙 많아 광화문 인근에서 안국동 풍문여고 방향으로 이동하였고, 그 후 염천교 다리, 서대문으로 이동하여 종국에는 이기붕 사저 앞에서 시위에 참여하였다. 구술자는 4월혁명 과정에서 "부정선거 물리치라", "자유당정권 물러가라"는 구호를 외쳤던 것으로 기억한다. 구술자는 키가 크고 체육부장을 맡아 활동하던 관계로 대열을 유지하는 역할을 맡았다. 이기붕 가 앞 동양극장 안에 같은 학교 동료생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 들어가 적십자병원으로 후송할 수 있었던 것도 구술자의 이러한 역할이 작용하였다. 당시 순국한 최기태와는 얼굴만 아는 정도였는데 등에 업어 병원으로 후송한 인연으로 그 어머님, 가족들과 지금도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경성전기 공고는 현재 수도전기공고로 개명하여 개포동에 위치하고 있는데 당시 4월혁명을 경험한 3학년들이 1961년 졸업한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육일장학회를 결성하여 학교의 4월혁명 기념사업 등을 총괄해 왔다. 교문을 들어서면 바로 눈에 보이도록 현정비를 건립하여 4월혁명 당시 순국한 최기태를 기념하고 있다. 최기태 장학회가 설립되어 수도전기공고 학생들에게 매년 장학금을 수여하고 있으며 4월혁명과 관련한 기념행사도 매년 성대히 진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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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긴태구술자는 1942년 5월 24일 전라북도 정읍에서 7남매 중 막내로 출생했다. 1958년 서울로 올라오기 전까지 정읍에서 중학교를 다녔다. 당시 집안은 중농으로 서울로 고등학교 유학을 보낼 정도의 여력이 있었다. 구술자는 1958년 서울 만리동 고개에 있는 균명고등학교를 선택하여 진학한다. 당시 학교의 외형이 마음에 들었다고 한다. 균명고등학교는 서울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 보일만큼 높은 위치에 있었다. 고교 재학 중에는 규율부 활동을 하였다. 1960년 4월 구술자는 균명고 2학년 재학 중이었다.구술자는 정치적 관심이 많았다. 1960년 2월 경에는 야당의 유세에 수업을 빠지면서 구경 갈 정도였다. 구술자는 신익희의 한강 백사장 유세에도 참여하였다. 구술자는 1960년 3월 14일 서울 광화문, 세종로 인근에서 전개된 고교생 야간 시위에 참여하였다. 이 시위로 연행되어 다음날 오전 학교 선생님의 보증으로 풀려나기도 하였다.구술자는 4월혁명에 참여하여 총상을 입고 입원하는 경험을 하였다. 4월 19일 당일에는 서울 시내 인근에서 지나가던 소방차를 잡아타고 서울 시내를 전전하며 시위에 참여하였다. 같은 날 동대문경찰서 약 50미터 지점에서 손목에 총상을 입고 서울대학병원에 입원하였다. 당시 분위기는 대통령의 하야를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병원에서도 시위로 인한 신변의 위협을 많이 느꼈다. 그 후 대통령의 하야 발표가 있고 나서는 사회적 분위기도 급반전 되어 위로금 등을 수령하였다고 한다. 퇴원 후 구술자는 재학 중이던 균명고에서 4월혁명 부상자로 대대적 환영을 받았다.구술자는 대학 진학 후에도 4월혁명의 정신으로 군부정권에 대한 비판 활동을 전개하여 많은 고초를 받았다. 1963년 2월 민정이양을 번의한 박정희 정권에 항의하기 위하여 유인물을 제작하여 직접 살포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고, 이로 인해 구금되기도 하였다. 1963년 4월에는 박정희 정권이 4‧19공로자들에게 건국포장을 수여하였다. 구술자는 당시 건국포장을 수여하는 자리에서 할복하였다. 그 후에도 박정희 정권 반대 시위를 지속하였다. 현재는 4‧19민주혁명회 사무총장으로 활동하면서 지속적인 4월혁명 정신계승 작업을 전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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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달중/안병준김달중은 경기고등학교 학생위원장 출신으로 전국 고등학생 대표 역할을 하다가 1957년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했다. 안병준은 부산사범학교를 졸업하고 부산동신국민학교 교사를 하다가 같은 해에 같은 학교, 같은 과에 진학했다. 두 사람은 정치학도로서 독서회 등의 활동과 문과대학 과목을 같이 수강하면서 친분이 두터워졌고, '정외과 문과대생'이라는 별명을 들을 정도로 인문학적 소양을 함께 쌓았다.4월혁명이 일어나던 해인 1960년 두 사람은 정외과 4학년생으로서 연세대 4‧19 시위에 참여했다. 김달중은 당시 연세대 학생 조직을 사실상 대표한다고 할 기독학생회[SCA] 회장직에 있었다. 학도호국단은 학생들의 정서를 대변하거나 대표하는 위치에 있지 않았다. 하지만 김달중은 4‧19 시위를 직접 주동하거나 시위 조직에 직접적으로 참여한 것은 아니었다.두 사람이 4월혁명과 관련해 의미 있는 역할을 한 것은 후세 학자들을 위한 사료로서 4월혁명에 대한 자료와 기록 전반을 수집‧정리한 것이었다. 4‧19 시위가 일어난 뒤이면서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하기 이전, 즉 계엄 상태인 1960년 4월 23일쯤에 이들이 만든 4월혁명연구반의 활동과 결과물이 바로 그것이다. 4월혁명연구반의 활동은 한미재단 단장이자 호러스 언더우드의 친동생인 리처드 언더우드의 제의로 시작되었다. 그는 4‧19의 중요성을 간파하고 평소 친하게 지내던 김달중에게 4월혁명 관련 자료의 수집을 제안했다. 김달중은 안병준과 함께 연구반을 만들어 4‧19와 관련된 기록과 자료를 광범위하게 수집하기 시작하였다.처음에는 한미재단의 자금 지원으로 활동이 이루어졌다. 그런데 중간에 문제가 생겼다. 한미재단 본부에서 허가 없이 진행한 것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자 리처드 언더우드 단장도 후속 작업은 두 사람이 독자적으로 수행하기를 원한 것이다. 두 사람이 김하태 연세대 대학원장에게 도움을 구한 결과 연세대 대학원 프로젝트로 작업을 계속할 수 있게 되었다. 김하태 원장과 홍이섭 교수, 조승순 박사가 4월혁명연구반의 지도교수를 맡았다.4월혁명연구반은 초기에 주로 서울지역을 대상으로 4‧18과 4‧19 관련 자료를 모으는 일을 했다. 두 사람이 구축해놓은 와이엠시에이라든가 기독학생회 같은 기독교 학생 조직의 인맥, 연세대와 서울대‧고려대 3개 대학 정외과 네트워크 등이 주로 활용되었다. 나중에는 범위를 확대해 관계 기관은 물론 대구와 마산 등 지방에 가서 2‧28, 3‧15 등을 수집하는 일도 하였다. 4‧19에 참여한 일반인 대상 설문조사와 시위 주동자, 부상자 면담조사도 실시하였다.자료 수집 작업은 김달중‧안병준 두 사람이 진행했다. 나중에 김달중이 7월과 8월, 프랑스 스트라스부르그와 가나의 수도 아크라에서 각각 열린 세계기독학생연맹[WSCF] 세계대회와 세계청년회[WAY] 제8차 이사회 등의 국제회의에 한국 학생 대표로 참석하면서 손이 모자라 마지막 정리 단계에서 정외과 동급생인 박충석이 가세한 것이 전부다. 이렇게 인원을 제한한 것은 그 일이 민감할 뿐 아니라 경우에 따라 위험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4‧19가 어떻게 전개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피조사자나 자료 제공자가 피해를 입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이를테면 대구 2‧28운동의 주동자인 이대우는 자료를 넘겨주면서 그 점을 매우 걱정을 하였다.두 사람은 오로지 당대에 없어질 수 있는 사료를 후세의 학자들을 위해 충실하게 남긴다는 원칙을 철저히 지켰다. 수집한 자료는 10년 동안 비공개로 하고, 그들 스스로는 개인적으로 그 자료를 연구 목적 등으로 절대로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두 사람은 이 원칙을 지금까지 지키고 있다. 이 자료를 이용한 연구, 강연, 자문, 토론 등에 일체 응하지 않았다. 4월혁명연구반 활동과 관련한 본격적인 언급은 이 구술이 처음이다.당시 수집‧정리한 자료에 눈독을 들인 곳도 있었다. 미국 대사관의 문정관인 그레고리 핸더슨이 자료를 한국에 두는 것보다 미국에서 보관하는 것이 안전하다며 집요하게 설득하였다. 마찬가지로 두 사람은 집요하게 거절하였다. 두 달여에 걸쳐 수집‧정리된 4‧19 관련 기록은 결국 연세대 도서관 희귀자료실에 봉인해서 보관되었다.연세대 4‧19는 이념적인 색채나 정치색을 띠지 않은, 학생들의 순수한 마음이 표출된 것이다. 4‧19 참여를 계기로 연세대는 그 후에 전개되는 학생운동에서 중심적 역할을 하게 되었다. 6.3사태라든가 10.26 이후 5.18까지 전개된 학생 시위가 그렇다. 특히 1987년 6월항쟁 당시 이한열의 죽음과 더불어 연세대는 학생운동의 본부 역할을 하게 되었다. 두 사람은 모교 교수로 재직하면서 학생처장과 교무처장을 맡아 학생운동과 또 다른 인연을 맺게 됐지만 학생운동의 순수성을 유지하고 학생을 보호하는 교수사회의 전통은 4‧19 이후에도 이어졌다. 그것은 4월혁명을 통해 다져진 연세대의 전통이다.4‧19는 뒷날 민주화 과정에서 큰 역할을 하는 전국적인 기독청년조직의 탄생에도 영향을 주었다. 4‧19 직후 김달중이 학생 대표로 참여한 케이에스시에프 세계대회와 세계청년회 8차 이사회에서 한국의 4월혁명은 외국 관계자로부터 지대한 관심을 받았다. 그해 국제적 성원 속에 대한민국 역사상 처음으로 청년단체들이 서울 감리회관에서 모여 전국적인 청년운동체를 결성, 1960~1970년대 민주화운동에 큰 기여를 하는 조직적 바탕을 마련하는 것이다.4월혁명은 한국 현대사와 정치사의 큰 사건이지만 세계사적으로도 큰 의미가 있다. 1960~70년대에 전 세계적으로 인구의 절반이 민주화됐는데, 그 시발점이 한국이라는 새뮤얼 헌팅턴의 평가가 있다. 개도국이 학생혁명을 통해 정부를 전복한 첫 사례일 것이다. 비록 번복이 되기는 했지만 우리 역사상 최초로 시민사회의 자발적인 혁명이라고 할 수 있다.개인적으로는 두 사람 모두에게 4‧19는 정치나 다른 직업을 선택하지 않고 학자의 길로 들어선 동기가 되었다.5. 기초자료 목록연정60년사편찬위원회, 『延政六十年史 1945-2004』, 씨아이알, 2004학민사 편집실, 『4‧19의 민중사』, 학민사, 1993(5판)사월혁명연구소 편, 『한국 사회변혁운동과 4월혁명 2』, 한길사, 1990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엮음, 『한국민주화운동사 1』, 돌베개,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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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총1) 성장과정과 집안환경구술자는 1939년 경남 통영 세병관(洗兵館)에서 출생했다. 아버지가 진주농고를 나온 후 공무원이 되어 통영으로 발령받아 그곳에서 태어나게 되었다. 친척으로는 이모부가 초대 해군참모총장, 국방부장관 등을 지낸 손원일이 있다. 해방 이후에는 외가였던 마산으로 이사와 자리를 잡았다. 아버지는 마산에서 과수원을 경영하면서 교편을 잡았기 때문에, 비교적 유복한 환경에서 자라났다. 고등학교는 지역 명문인 마산고등학교를 나왔다. 학창시절부터 글쓰기 재주가 있어 고등학교 3학년 때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이 되었다.2) 대학진학과 마산시위 경험구술자는 문학에 소질이 있었지만, 문학을 하려면 철학과에 가라는 선생님의 권유로 1957년 고려대 철학과에 입학했다. 당시 국방부장관이었던 이모부 손원일의 집에서 통학했던 구술자는 통학을 군 짚차로 하는 등 또래의 친구들에 비해 어려움 없이 대학생활을 보냈다.그러다가 방학 중 고향 마산에 내려갔던 구술자는 3‧15를 우연찮게 겪게 되었다. 당시 마산시위에 참가했던 구술자는 총 맞은 사람을 업고 병원으로 옮겼다고 한다. 그런데 당시 고려대 교복을 입고 있었기 때문에 경찰의 눈에 띄어 마산경찰서로 끌려가게 된다. 당시 아버지가 마산지역의 유지인데다가 이모부가 국방부장관이었기 때문에 '고초'를 겪지는 않았지만, 이 경험이 나중에 학교로 올라와 4‧18에 앞장서는 계기가 된다.3) 4‧18 고려대 시위 배경과 전개구술자는 4월 11일 마산에서 김주열의 시신이 발견된 것을 듣고, 마산의 친구에게 전화로 확인을 했다. 그리고 마산의 상황을 교내 학우들에게 전파하는 역할을 했다.그렇지만 이미 학생회장단 모임 등 교내에서도 시위가 준비되고 있었기 때문에 4‧18 당일 다른 역할은 하지 않고, 여러 학생 군중들과 함께 단지 시위에만 참여했다. 그런 점에서 구술자는 4‧18과 4‧19가 단지 지도부 몇몇의 선동으로 시작된 것이 아님을 강조한다. 당시 모두가 선동자였으며 참여자였다고 한다.4‧18 당일 처음에는 200~300명 밖에 되지 않던 학생들이, 운동장을 몇 바퀴 돌고나자 1,000여명 정도가 되어 낮 12시 경에 교문 밖으로 진출했다고 한다. 당시 시민들이 빵도 가져오고 물도 떠다주는 등 호응이 대단했다고 한다.시위대는 국회의사당 앞에서 정치 발언을 하면서 연좌시위를 전개했는데, 지도부가 없는 상황에서 자율적으로 시위가 진행되었다. 시위대를 진정시키기 위해 당시 국회의원이었던 이철승과 유진오 총장이 나와 연설을 했다. 시위대는 유진오 총장의 회유로 일단 귀교했다. 귀교 과정에서 천일백화점 앞에서 깡패들이 습격을 했는데, 이것이 4‧19민주화운동의 도화선이 되었다고 평가했다. 당시 철학과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한 사람은 구술자와 함께 독고중원, 김민준 등이 있었다.4) 4‧18 이후 마산 귀향구술자는 학교가 휴교를 하자 고향인 마산으로 내려갔다. 고향에 내려가서 '재경마산학우회'를 통해 당시 마산지역 계엄사령관이었던 김기덕 준장 앞으로 선언문을 쓰고 그것을 마산일보에 게재했다. 그 내용은 "이렇게 안하면, 우리가 또 일어난다"라는 것이었다.5) 6.3항쟁 경험구술자는 대학 졸업 이후 동아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당시 4‧18에 참가했던 경험이 학교에서도 소문이 나서인지, 고등학교 학생회 간부들이 구술자를 찾아와 "선생님, 우리도 해야 안 되겠습니까"라고 했다. 선생 된 마음에 야단을 치면서도 "신념대로 살아야 된다"라는 말을 한 이후, 동아고등학교 학생들이 6‧3시위를 전개했다.이후 "데모 주동교사 색출하라"라는 조치 때문에 구술자는 서울로 약 1년간 피신해 와 있었다. 이로써 구술자는 3‧15, 4‧18, 4‧19, 6‧3 등 역사적 사건에 직간접적으로 경험을 하게 되었다.6) 4‧18 역사소설 준비구술자는 문인으로서 4‧18에 관련한 역사소설을 준비하고 있다.5. 참고자료변광도 편, 『민주혁명 승리의 기록』, 마산일보사, 1960.지헌모 편저, 『마산의 혼』, 한국국사연구회, 1961.고대신문사, 『고대신문 축쇄판 』2권, 1985.고대신문사, 『고대신문 축쇄판 』3권, 1985.고려대출판부. 『고려대학교 100년사- 고려대학교 학생운동사』, 2005.고려대학교 한국사연구소, 『4‧18 고대행동과 4월혁명을 통해 조망하는 21세기-4월혁명 50주년 기념학술대회,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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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균
- 성장과정과 4월혁명 전후 상황
- 학내 은사들의 영향
- 5.16 군사쿠데타 이후 수감생활 등
- 민족통일학생연맹 활동 및 조직 과정
- 한미경제협정 및 2대악법반대투쟁
- 활동 동지들에 관한 일화
- 6.3 한일국교정상화반대투쟁 및 한미행정협정촉구 시위
- 삼선개헌 반대, 1971년 대선 공간 및 교련반대투쟁시기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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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표김영표는 만주 길림성에서 태어나 평안북도 정주군 곽산으로 다시 이주하여 곽산인민학교를 다녔다. 1947년경 때 해주를 거쳐 월남을 했다. 구술자의 부친은 만주 길림성 반석현에서 정미소를 하고 아주 큰 농장을 경영했었다고 한다. 1920년대 쯤 만주로 이주해서 살다가 해방 후에 원래 본적지인 평안북도 정주군으로 이주했다가 월남하게 되었다고 한다. 생활이 부유했던 편인지 구술자의 형제자매들은 모두 대학에 진학했다.구술자는 서울사대부고를 거쳐 1956년 고려대 농화학과에 입학하였는데 전공은 원하던 것이 아니었다고 한다. 대학 입학하기 전에 다리를 다쳐 1년을 쉬고 고려대학교를 들어오게 되었는데 고려대나 전공과는 원해서 들어온 것이 아니고 집이 개운사 앞으로 고대와 붙어있어서라고 한다.구술자는 전공보다는 써클인 역도부 활동과 합창부 활동을 더 열심히 하였는데 4‧19 때도 역도부원 중심으로 참여를 했고 지금도 교류하고 있다.1960년에 대학 4학년이었고 한 해 늦게 입학해서인지 주변 동기나 후배들이 모두들 구술자를 리더로 인식했고, 당시 1960년대 사회상황에 대한 토론들을 자주 하며 울분을 토로하며 지내다가 1960년 4월 18일 고대 신입생환영회 날을 기해서 시위를 하기로 계획했다. 구술자는 5개 단과대학 운영위원장을 선별해서 고대 전체를 시위에 가담시키는 노력을 했다고 증언했는데 당시의 운영위원장들이 구술자를 잘 따랐다고 한다. 그런데 시위 날짜가 여러 번 정보가 새서 무산되었다가 4월 18일에 하게 된 것이라고 한다.신입생환영회 날을 고대 시위로 어느 단위에서 누가 주도했던 것인지에 대래서는 구체적으로 알지 못했고 구술자는 본인이 모든 것을 주도했으며 사전 계획이 있었다고 얘기하는 것은 사실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당시 고려대, 서울대, 중앙대 등 다른 대학연합들이 4월 21일 시위를 계획하고 있던 것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으며, 고대 내 다른 학생들의 시위 계획에 대해서도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4월 18일 시위에 앞서 선언문 낭독에 대해 알지 못하고 있었으며 선언문 자체의 사실 관계를 부정하고 있다.구술자는 선언문 자체는 중요하지 않고 그 날 앞장서서 시위에 참여한 것이 중요하고 그 사람들이 훨씬 더 기억되어야 하는데 누가 선언문을 쓰고 누가 훈장을 받았고 하는 이야기들이 더 회자되는 것에 대해서 울분을 토로하며 상당 부분을 할애해 증언하였다.구술자는 역도부가 중심이 되어 신입생환영회 날인 4월 18일 아침부터 정경대학과 문과대학에서 플래카드 작성 등의 시위 준비를 하고 구술자는 도서관, 강의실 등을 돌면서 시위참여를 유도했는데 이때도 역도부가 선도적으로 시위를 준비했다고 한다.교문을 나가 안암동 로터리에서 경찰들의 제지를 받았고, 대광고를 지나 신설동 로터리에서 최루탄이 터졌다고 한다. 이때 부상당한 동료를 병원으로 옮기고 최루탄 때문에 시위대가 반으로 끊어졌지만 골목골목으로 점점 더 많은 시위대가 모여서 국회의사당 앞까지 도착했다. 구술자는 처음 학교를 나올 당시에 목표 지점이 국회의사당으로 계획되지는 않았다고 한다.국회의사당 앞에서 고려대 학생들은 자유 발언을 하고, 구호를 외치고 연좌시위를 하고 있는데 유진오 총장이 나와서 연설을 했으나 학생들의 호응을 얻지 못하다가 고대 역도부 선배인 이철승이 나와서 귀교를 설득하자 귀교를 위해 움직였다고 증언하였다. 당시 국회의사당 앞에서 구술자는 여러 언론사 기자들과 인터뷰를 했다고 한다.귀교길에 오른 고대 학생들은 서울운동장에서 만세를 부르기로 하고 길을 나섰는데 종로4가 천일백화점 앞에서 자꾸 경찰들이 한 쪽으로 학생대열을 몰아넣으려고 유도하는 것을 느꼈다고 한다. 그러다가 천일백화점 앞에서 이정재 등 깡패들에게 피습을 당하고 그 때 머리에 부상을 입어서 모교인 서울사대부고로 피신을 했다. 교사들이 퇴근하지 않고 교무회의를 하고 있던 와중에 구술자의 모교 교사들을 만나고 나서야 부상당한 줄을 깨달았다고 한다. 서울사대부고에서 나와 고대를 거쳐서 개운사 근처의 집에 당도했다고 한다.4월 19일 시위에는 늦게 참여를 했고 전날의 부상의 피로감 때문에 국회의사당 앞을 거쳐 경무대 앞, 을지로 내무부 앞을 거쳐서 일찍 귀가했다고 한다. 상대적으로 18일에 비해 19일 시위에 대해서는 잘 기억하지 못했다. 4월 20일부터 26일까지의 일 역시 잘 기억하지 못 했으며 26일 이승만 하야 이후 치안질서유지활동으로 중부경찰서를 담당하여 활동했다.구술자는 올해 4‧19 포상을 받았는데, 처음 박정희 정권에서 제정되어 줄 때 받은 자들과 민주화 정부 이후에 받은 사람들은 그 성격이 다르다고 주장했다. 또한 4‧19에 직접 참여하지 않은 사람들이 각종 관련 단체에서 활동하는 것을 보고 많은 회의를 느낀다고 증언하였다.5. 참고자료1) 저서4‧19혁명기념사업회(4‧19사랑방회 엮음), 『4‧19혁명사』, 2003홍영유, 『홍영유가 쓰고 엮은 4월혁명통사』, 천지창조, 2010김정남, 『4‧19혁명』,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03강만길, 『고쳐 쓴 한국현대사」, 창작과비평사, 2006서중석, 『지배자의 국가 민중의 나라』, 돌베개, 20102) 연구논문정창현, 「4월민중항쟁연구의 쟁점과 과제」, 『4‧19와 남북관계』, 민연, 20013) 잡지, 기관지 등김행선, 「선언문과 구호로 보는 4‧19」, 『내일을 여는 역사』 23, 서해문집, 2006박현채, 『4‧19 민주혁명과 이의 계승;민족민중론의 시각에서』, 『사상』4, 사회과학원, 19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