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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표

구술자소개

구술자
김영표
면담자
현대사기록연구원(이주실)
구술일자
2010년 11월 2일
장소
경기도 군포 구술자 자택
구술시간
1시간 42분 6초
구술아카이브 > 4.19혁명 > 서울 관련 구술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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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내용 요약

김영표는 만주 길림성에서 태어나 평안북도 정주군 곽산으로 다시 이주하여 곽산인민학교를 다녔다. 1947년경 때 해주를 거쳐 월남을 했다. 구술자의 부친은 만주 길림성 반석현에서 정미소를 하고 아주 큰 농장을 경영했었다고 한다. 1920년대 쯤 만주로 이주해서 살다가 해방 후에 원래 본적지인 평안북도 정주군으로 이주했다가 월남하게 되었다고 한다. 생활이 부유했던 편인지 구술자의 형제자매들은 모두 대학에 진학했다. 
구술자는 서울사대부고를 거쳐 1956년 고려대 농화학과에 입학하였는데 전공은 원하던 것이 아니었다고 한다. 대학 입학하기 전에 다리를 다쳐 1년을 쉬고 고려대학교를 들어오게 되었는데 고려대나 전공과는 원해서 들어온 것이 아니고 집이 개운사 앞으로 고대와 붙어있어서라고 한다. 
구술자는 전공보다는 써클인 역도부 활동과 합창부 활동을 더 열심히 하였는데 4‧19 때도 역도부원 중심으로 참여를 했고 지금도 교류하고 있다. 

1960년에 대학 4학년이었고 한 해 늦게 입학해서인지 주변 동기나 후배들이 모두들 구술자를 리더로 인식했고, 당시 1960년대 사회상황에 대한 토론들을 자주 하며 울분을 토로하며 지내다가 1960년 4월 18일 고대 신입생환영회 날을 기해서 시위를 하기로 계획했다. 구술자는 5개 단과대학 운영위원장을 선별해서 고대 전체를 시위에 가담시키는 노력을 했다고 증언했는데 당시의 운영위원장들이 구술자를 잘 따랐다고 한다. 그런데 시위 날짜가 여러 번 정보가 새서 무산되었다가 4월 18일에 하게 된 것이라고 한다.

신입생환영회 날을 고대 시위로 어느 단위에서 누가 주도했던 것인지에 대래서는 구체적으로 알지 못했고 구술자는 본인이 모든 것을 주도했으며 사전 계획이 있었다고 얘기하는 것은 사실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당시 고려대, 서울대, 중앙대 등 다른 대학연합들이 4월 21일 시위를 계획하고 있던 것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으며, 고대 내 다른 학생들의 시위 계획에 대해서도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4월 18일 시위에 앞서 선언문 낭독에 대해 알지 못하고 있었으며 선언문 자체의 사실 관계를 부정하고 있다. 

구술자는 선언문 자체는 중요하지 않고 그 날 앞장서서 시위에 참여한 것이 중요하고 그 사람들이 훨씬 더 기억되어야 하는데 누가 선언문을 쓰고 누가 훈장을 받았고 하는 이야기들이 더 회자되는 것에 대해서 울분을 토로하며 상당 부분을 할애해 증언하였다.
구술자는 역도부가 중심이 되어 신입생환영회 날인 4월 18일 아침부터 정경대학과 문과대학에서 플래카드 작성 등의 시위 준비를 하고 구술자는 도서관, 강의실 등을 돌면서 시위참여를 유도했는데 이때도 역도부가 선도적으로 시위를 준비했다고 한다.

교문을 나가 안암동 로터리에서 경찰들의 제지를 받았고, 대광고를 지나 신설동 로터리에서 최루탄이 터졌다고 한다. 이때 부상당한 동료를 병원으로 옮기고 최루탄 때문에 시위대가 반으로 끊어졌지만 골목골목으로 점점 더 많은 시위대가 모여서 국회의사당 앞까지 도착했다. 구술자는 처음 학교를 나올 당시에 목표 지점이 국회의사당으로 계획되지는 않았다고 한다. 

국회의사당 앞에서 고려대 학생들은 자유 발언을 하고, 구호를 외치고 연좌시위를 하고 있는데 유진오 총장이 나와서 연설을 했으나 학생들의 호응을 얻지 못하다가 고대 역도부 선배인 이철승이 나와서 귀교를 설득하자 귀교를 위해 움직였다고 증언하였다. 당시 국회의사당 앞에서 구술자는 여러 언론사 기자들과 인터뷰를 했다고 한다. 

귀교길에 오른 고대 학생들은 서울운동장에서 만세를 부르기로 하고 길을 나섰는데 종로4가 천일백화점 앞에서 자꾸 경찰들이 한 쪽으로 학생대열을 몰아넣으려고 유도하는 것을 느꼈다고 한다. 그러다가 천일백화점 앞에서 이정재 등 깡패들에게 피습을 당하고 그 때 머리에 부상을 입어서 모교인 서울사대부고로 피신을 했다. 교사들이 퇴근하지 않고 교무회의를 하고 있던 와중에 구술자의 모교 교사들을 만나고 나서야 부상당한 줄을 깨달았다고 한다. 서울사대부고에서 나와 고대를 거쳐서 개운사 근처의 집에 당도했다고 한다. 

4월 19일 시위에는 늦게 참여를 했고 전날의 부상의 피로감 때문에 국회의사당 앞을 거쳐 경무대 앞, 을지로 내무부 앞을 거쳐서 일찍 귀가했다고 한다. 상대적으로 18일에 비해 19일 시위에 대해서는 잘 기억하지 못했다. 4월 20일부터 26일까지의 일 역시 잘 기억하지 못 했으며 26일 이승만 하야 이후 치안질서유지활동으로 중부경찰서를 담당하여 활동했다. 

구술자는 올해 4‧19 포상을 받았는데, 처음 박정희 정권에서 제정되어 줄 때 받은 자들과 민주화 정부 이후에 받은 사람들은 그 성격이 다르다고 주장했다. 또한 4‧19에 직접 참여하지 않은 사람들이 각종 관련 단체에서 활동하는 것을 보고 많은 회의를 느낀다고 증언하였다.


5. 참고자료

1) 저서
4‧19혁명기념사업회(4‧19사랑방회 엮음), 『4‧19혁명사』, 2003
홍영유, 『홍영유가 쓰고 엮은 4월혁명통사』, 천지창조, 2010
김정남, 『4‧19혁명』,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03
강만길, 『고쳐 쓴 한국현대사」, 창작과비평사, 2006
서중석, 『지배자의 국가 민중의 나라』, 돌베개, 2010

2) 연구논문
정창현, 「4월민중항쟁연구의 쟁점과 과제」, 『4‧19와 남북관계』, 민연, 2001 

3) 잡지, 기관지 등
김행선, 「선언문과 구호로 보는 4‧19」, 『내일을 여는 역사』 23, 서해문집, 2006
박현채, 『4‧19 민주혁명과 이의 계승;민족민중론의 시각에서』, 『사상』4, 사회과학원, 1990

구술상세목록 및 녹취문

  • 2010_4월혁명50주년_김영표(서울지역대학생2)_구술자료상세목록.pdf 70896K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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