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바로가기주메뉴 바로가기

글자 크기 조절

강우정

구술자소개

구술자
강우정
면담자
이정은
구술일자
2010년 8월31일
장소
한국성서대학교 총장실
구술시간
1시간 30분 1초
구술아카이브 > 4.19혁명 > 서울 관련 구술아카이브
공유

구술내용 요약

1) 개인이력과 부친으로부터의 영향
1940년생인 구술자는 목사인 아버지에게 큰 영향을 받으며 유년기를 보냈다. 그 속에서 기독교적 가치관의 습득뿐 아니라 나라와  민족, 현실타협보다는 민족운동가들의 지사적 의지와 같은 가치를 더욱 중요시하게 여기며 성장할 수 있었다. 부산 피난시절의  배재중학교와 서울 수복 이후의 서울사대부고를 다니던 시절에는 교회 내 학생조직의 회장을 역임하며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를  쌓았고, 그 외에도 교회를 통한 농촌 전도활동, 친구들과의 전국 무전여행 등을 하며 농촌의 현실을 눈으로 보며 여러 경험을  쌓았다. 

2) 1950년대 후반 대학생활과 학우들의 의식
법관이 되거나 정치계로 나가고 싶어 고려대 법대에 진학한 이후로는 고려대의 아카데믹한 분위기 속에서 다양한 학습과 여러 교수님들의  수업을 들으며 점차 고려대에 대한 애정과 자부심을 키워갔다. 또한 정경대 학생위원회에서 주최하는 모의국회 및 학교의 체육활동  등도 이를 뒷받침했다. 다른 한편으로 당시 구술자를 비롯한 주변 학우들은 정치현실에 대해 비판의 날을 세우며, 고려대생으로서  무엇인가 해야 한다는 정치적 사명감을 느끼고 있었다. 학생들은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 속에 부정부패에 대한 질타, 반감을  드러내었다.

3) 법대학생위원장 선출과 학생위원회 활동
정경대가 주최하는 모의국회에서의 활약을 계기로 1959년 11월에 법대 학생위원장으로 선출된 구술자는 학생위원회 활동에 나서게  된다. 당시 고려대에는 학도호국단 체제인 총학생위원회라는 것이 아예 존재하지 않았고, 5개 단과대학 자체의 학생위원회가  존재하였고, 다시 그 속의 5개 단과대 학생위원장들 간에 수평적인 합의체가 꾸려져 학내 활동을 주도적으로 전개하였다. 기존에는  졸업생을 위한 기념품 준비 및 학내 이슈에만 논의가 국한되다가 주변 학우들은 물론 구술자의 가족까지 고대생들이 지금 시점에서  가만히 있으면 안 된다는 주장을 접하며 점차 5개 단과대 학생위원장들 간에서도 현 시국에 대응할 방도를 고민하게 된다.

4) 4‧18 고려대 시위의 배경과 시위 직전의 상황 
김주열의 시신이 떠오른 직후, 시위 개최 여부에 대하여 이견을 보였던 5개 단과대 학생위원장들 간에도 결국 합의가 이루어져 시위  준비가 이루어졌다. 이 소식을 들은 법대 학생위원회 후배들은 너무나 기뻐했지만, 구술자의 경우 한편으로는 4‧18 당일 감옥에 갈  경우를 대비하고 나설 정도로 두려움도 컸다. 
학교 당국자들은 시위 전날인 4월 17일에 구술자를 찾아와 시위 취소를 설득하려 했고, 4‧18 당일에도 학생위원장들은 이사장실에  불려가 "북한이 호시탐탐 남침의 기회를 노리고 있고, 제2의 6‧25가 난다"는 이유로 시위 중단을 요청받았다. 
그럼에도 구술자를 비롯한 학생위원장들은 시위 개시에 나섰고, 오히려 당일에 시위 소식을 듣게 된 다른 학우들로부터는 '왜 사전에  시위 사실을 공론화시켜 준비를 철저히 하게끔 하지 못 했나'라는 원망을 들어야 하기도 했다. 그만큼 지도부 차원에서 막상 계획은  했으나 희생은 최소화시키자는 의도 아래 철저히 준비를 하지는 못했었고, 구술자 또한 시위대가 정문을 나설 수 있을 것이라고도  생각하지 못했던 상황이었다. 

5) 4‧18 시위의 전개
예상과는 달리 고려대생들이 막상 거리로 나서자 곳곳에 있던 경찰의 저지선은 쉽게 무너졌고 학생들은 학생위원회의 지휘가 없었음에도  자발적으로 '자유당 독재 물러가라', '자유‧정의‧진리를 드높이자' 등의 구호를 외치며 종로로 향했다. 그러나 구술자는 종로  입구에서 경찰에 연행되었다가 오후에야 유진오 총장에 의해 풀려날 수 있었다. 종로서에서 풀려난 직후 구술자는 학우들이 연좌시위를  벌이고 있던 국회의사당 앞으로 갔다. 구술자는 석방소식을 전하며 학우들의 해산을 호소했으나, 학생들은 그 말을 듣지 않고 시위를  계속하다가 '너희들이 공격을 당할 가능성이 있으니까, 오늘은 일단 물러나라'라는 선배 이철승 의원의 설득 이후에야 대열을 정비해  고려대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이후 천일백화점 앞의 깡패 습격에 의해 구술자도 가격을 당했으나, 다른 학생들과 함께 결국 고려대까지  와서 해산하였다.

6) 4‧19 이후 상황에 대한 구술자의 경험
4‧18 시위가 끝난 직후 구술자는 시위 주도자인 법대 학생위원장이라는 이유로 체포될 것을 염려하여 친척집에 피신하게 된다.  구술자는 20일 가까운 기간 동안 피신을 계속하였고 이승만 하야가 발표된 이후에야 학교에 복귀할 수 있었다. 
학교 복귀 후 구술자는 다른 고대생들과 함께 며칠 동안 사회의 치안유지 활동을 전개하였다. 특히 구술자는 경찰이 무력화된 상황에서  중부경찰서를 접수하고 서장 역할을 했다. 하지만 구술자는 그 직후 현 정국에서 학생들이 할 일은 끝났다는 생각에 수업 정상화를  위해 노력하고, 학업에 치중하였다. 

7) 4‧18 고려대 시위에 대한 평가
4월18일 고려대학교 시위 자체가 학생위원회나 일부 주도자에 의해 지휘되고 이끌어졌던 것이 아니라, 당시 학생들의 마음과 마음이  합해서 한군데로 흘러갔던 고려대 학생 전체의 운동이었다. 그 운동을 뒤에서 밀어준 것은 국민 전체의 여망과 도움이었다. 무엇보다  당시 민주화운동은 고려대의 4‧18로 인해 시작되었다는 점에서 고려대와 고려대 학생들의 의의가 있다. 


5. 참고자료

고대신문사, 『고대신문 축쇄판 』2권, 1985.
고대신문사, 『고대신문 축쇄판 』3권, 1985.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연구소 엮음. 『한국민주화운동사 I - 제 1공화국부터 제 3공화국까지』돌베개, 2008.
고려대학교 한국사연구소, 『4‧18 고대행동과 4월혁명을 통해 조망하는 21세기-4월혁명 50주년 기념학술대회』, 고려대학교 한국사연구소, 2010.
고려대출판부. 『고려대학교 100년사- 고려대학교 학생운동사』, 2005.

구술상세목록 및 녹취문

  • 2010_4월혁명50주년_강우정(418고려대시위)_구술자료상세목록.pdf 69271KB

    Download